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9화 (19/132)

19.

“노이즈를 측정하러 갔었습니다.”

한참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데제가 다시 물었다.

“의무실은요?”

“갔었, 갔었습니다.”

“그런데?”

“크, 클리닉의 측정이…, 아무래도 더 정확하다고 해서 클리닉도….”

대답하며 에라블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다른 이용 사항은?”

“없…, 없었습니다.”

데제가 지그시 에라블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에라블, 말하고 가요.”

에라블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폈다. 뭘 더 묻기도 전에, 그가 부드럽게 눈매를 흐리고 웃으며 먼저 선수를 쳤다.

“저녁 먹어야죠?”

마치 방금의 무거웠던 분위기가 다 착각이라는 것만 같이….

“그래서 측정 결과는 어떻던가요?”

그가 일어서서 디너 박스를 꺼내며 지나가듯 물었다.

“정상 범위였습니다.”

“다행이네요.”

“저, 제가 진짜….”

에라블을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가까이 다가온 그가 몸을 숙여 가볍게 입술을 맞춰왔다. 숨결이 오싹하도록 달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식사부터 해요, 그 얘긴 천천히 하고. 음식 식습니다.”

* * *

“지난번에 채혈했던 것 기억해요?”

식사를 하고 두 사람은 평소처럼, 대체 왜 이게 평소가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데제는 캔맥주를 건넸고 에라블은 차가운 알루미늄 캔을 꽉 움켜쥐었다.

“예, 기억합니다.”

“소위의 NS가 147로 나와 적합이 뜰 가능성이 컸어요. 여단장 이상의 적합 대상자는 대외비라, 검사 여부를 말해주기 어려웠어요. 이건 소위가 양해를 해줘요.”

“저, 그럼….”

“네, 소위와 나는 적합이에요.”

데제브 아브가니스가 확인 사살을 했다. 이제 무덤에 들어가 눕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좋은 일 아닌가요?”

약간 넋이 나가 있던 에라블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의문 어린 시선으로 지독하게 아름다운 13레벨짜리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인생 망했단 확신이 강하게 드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끌리는 상대가 적합 대상자라는 거 말이에요. 꽤 운 좋은 일인데.”

그가 너스레를 떨 듯이 웃었다.

“…끌리, 저 말씀이십니까?”

“여기 누구 또 있어요?”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이게 그렇게 충격받을 얘긴가. 내가 소위와 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검사 결과는 채혈하고 3일 만에 나왔어요.”

“그….”

“알고는 있겠지만 내 적합자가 소위뿐인 것도 아니고요. 난 처음부터 그냥 소위한테 끌린 건데.”

에라블은 숨을 골랐다.

솔직히 뭐가 더 충격적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의 적합자라는 사실, 아니면 그가 지금 내게 끌린다고 말하는 중이란 현실 중에서…, 아무래도 후자가 영 신빙성이 없다.

“…저 2레벨.”

“솔직히 내 눈엔 다 비슷하게 못생겼어요.”

그럴싸하다.

“그, 그래도 잘못 아신 게 아닐까요.”

“그걸 어떻게 잘못 알아요.”

딱 자르는 말에 에라블은 조금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가 떨어진 턱을 손끝으로 도로 올려주곤, 다물린 입술에 또 쪽-, 입을 맞췄다.

“이제 이해가 됐으면 난 씻고 올게요.”

전혀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는 일어나 욕실로 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나와선 평소처럼 젖은 머리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은 채 돌아다녔다.

‘…….’

에라블은 느리게 눈만 껌벅거렸다. 다 마신 빈 캔을 들고 있자니 문득 술 생각이 났다. 이걸 언제 다 마셨지? 이상해하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내왔다.

“그렇게 더 마셔도 돼요?”

그가 패드 스크린을 넘기며 물었다.

“소위는 스트레스받으면 위염으로 오잖아요. 지금 나 때문에 꽤 아슬아슬할 텐데.”

아니라고 거짓말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건강기록을 의무실에서 직접 보고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 쓸데없는 보고는 왜 받으시나 했지. 이런 이유인지도 모르고.

“한 캔…, 정도는 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또 위장병 걸리면 화낼 거예요.”

“안 마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떨어트렸다. 웅크린 어깨가 작게 떨린다.

대체 왜 웃으시는 거지. 뭣 때문인지 갑자기 터져 웃고 있는 그와는 달리 에라블은 착잡했다.

무섭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남자의 적합자라니…, 무서웠다.

이 기회에 냉동실에 놔둔 유서나 진짜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 보험 증서는 우체국에 가서 미리 조건부 예약이라도 걸어놓으면 되겠지.

“아무래도 한 캔 정도는 그냥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에라블은 결국 꺼낸 캔을 까며, 빤히 저를 쳐다보는 그에게 변명했다.

“공포 영화 말고 다른 거 봐봐요, 그럼.”

데제는 눈을 가늘게 흐리며 즐거워했다.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본인을 옆에 두고 실컷 벌벌 떨 수 있어서 공포 영화만 봤다는 사실을…, 뭐….

냉장고에 위스키 좀 남은 게 있는데 맥주에 섞어 마시면 안 되겠지. 응급실에서 딱 이틀만 기절해 있으면 좋겠는데.

“예, 그럼….”

공포 영화 말고 이번엔 추리 스릴러를 골라보았다.

“안 무서워할 자신 있으면 그거 보고.”

그럴 자신은 전혀 없었으므로 그냥 조용히 개그 프로그램을 틀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가 또 웃어댔다.

그러더니 아예 패드까지 끄고 소파 옆자리에 와 앉았다.

공포 영화엔 영 집중을 못 하던 그가 개그 프로는 곧잘 봤다. 제법 취향에 맞으시는 듯했다. 그의 취향을 새롭게 알게 돼 몹시 슬펐다.

“…….”

모르겠다. 내 인생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에라블은 그저 멍하니 TV만 쳐다봤다.

키득대는 그 옆에 앉아 고래가 포유류인지 어류인지를 놓고 대토론을 벌이는 교수 분장의 코미디언들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멍해졌다.

고래는 역시 어류지, 왜냐하면 그래야 보는 사람들이 더 빡칠 테니까….

허리가 결린다. 조금 뒤척이니 그가 자연스럽게 쿠션을 하나 집어 건네주었다. 쿠션이 그쪽에 다 몰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에라블은 쿠션을 받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베란다 창안으로 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들어왔다. 선선하게 쿠션 찌든 내가 맡아졌다. 슬슬 빨래해야겠다….

“세탁기에 넣어놔요. 아, 세제 다 떨어졌던데, 뭐 가리는 거 없죠? 사실 내가 벌써 시켜놔서.”

“예, 없습니다….”

그와 개그 프로를 틀어놓고 나란히 앉아 세제 얘기를 하고 있자니 역시 소름 끼치는데 뭔가…, 묘하게 평화롭기도 했다. 그래서 더 소름이었다. 완벽한 악순환이었다.

* * *

“외근 다녀올 일이 좀 생겼어요.”

에라블 버밀리언은 놀랍게도 한 달 반이 지난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었다.

원인은 불명확했다.

늘 하던 대로 출근을 하고, 업무를 보고, 간간이 야근도 하고. 지난 2년간 그랬듯이 그냥 할 일을 하며 살았는데. 왠지 모르게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한 5일 정도 걸릴 거예요.”

데제는 오늘 새벽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다. 사적인 일인 듯했다.

어떻게 아느냐면, 그의 작전복과 정복 모두 그녀의 집에 있었는데 바로 셔틀 이착륙장으로 간다는 그가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쯤 되면 아주 여기서 사시는 것 같다….

“…아, 뭐가 이렇게 많아.”

어쨌든 오랜만에 사단장도 없는 느지막한 휴일 오전, 에라블은 개인용 미로를 열어 밀린 청소를 하고 있었다.

21기의 대정령 중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한 개체.

입대 이후 새로 추가된 개체에 적재량도 작아 수뇌부에서 별반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개인 용도로 사용 중이었다.

그나마도 깨끗하게는 못 쓰고 대충 쓰는 중이다.

“웬 쓰레기가-.”

에라블은 거실에 반 소환한 미로의 입을 벌리고 분리수거를 했다. 곧 써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먹고 봉지째 묶어 던져뒀던 쓰레기들, 사고 대충 밀어놨던 온갖 잡동사니들, 안에 주차해 둔 캠핑카도 되는 대로 치웠다.

아카데미 시절 룸 쉐어비가 아까워 샀던 중고 캠핑카인데, 미로 안에 처박아 두고 간이침대로 사용 중이다.

캠핑카 내부엔 아직 아카데미 생도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술 마시고 긁어놓은 탁자, 술 마시고 걷어차 살짝 찌그러진 쓰레기통, 술 마시고 잡아당긴 커튼 반쪽… 간이 건강했을 때였다.

“쓰레기봉투가, 모자라겠는데.”

대충 하자. 어차피 대충 하려고 했지만,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기뻐하며 대충 청소하던 에라블은 그날 오전 택배 한 상자를 받았다.

59에서 시킨 추가 약물이었다. 시켰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근력향상제 B]

[스피드업 A]

[실드 디스크]

[마력 순환제]

그 외 기타 등등,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분쟁지역에서 필요할 만한 건 거의 다 시킨 듯했다. 심지어 생체 앰플까지 있었다.

내가 정말 살고 싶었나 보다.

그야, 당연히 살고 싶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삶에 대한 집착으로 꽉 찬 택배 상자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어째 좀 그랬다.

아니, 뭐. 어떻게 버틴 2년인데. 억울해서라도 못 죽지.

‘…분쟁지역이라.’

에라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상자를 덮어 캠핑카 구석에 넣어 두고, 전화기를 켰다.

“여보세요, 중위님? 지금 한가하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화기에서 욕이 바가지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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