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이미 온종일 했던 생각,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떠올리려 했지만 그런 방법은 없었다.
그가 말을 꺼냈고, 그리고 그걸로 끝인 거였다. 하수 처리장에서 녹다 만 점액으로 발견될 생각이 없다면 일단 그걸로 끝이다.
데제브 아브가니스와 관계를 해야 한다.
에라블은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물을 틀고, 창고 근무로 지저분해진 머리를 다시 감고, 팔다리를 제모했다.
본래 체모가 거의 없어 평소엔 하지 않는 짓이었지만, 꼼꼼하게 다 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원작에서 상대를 안던 방식에 대해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상황에선 스너프 필름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자꾸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면도기를 쥔 손을 멈춰야만 했다. 손이 떨려 살을 베어낼 것만 같았다. 내가 나서서 그러지 않아도 오늘 무사하진 못할 텐데.
‘흑-….’
에라블은 손바닥으로 뜨거운 눈두덩이를 짓눌렀다.
그가 상대를 안는 방식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는 때론 다정했고, 때론 잔인했다. 어느 순간에도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때로는 눈만 질끈 감고 있으면 되는 식이기도 했고, 또 때로는 며칠씩 관계가 이어지기도 했다.
사실 상대를 갖고 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늘-…, 상관없어.
내가 해야 할 건 한가지다.
‘버티면 돼.’
에라블은 짓누르고 있던 눈두덩이를 세게 문질렀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 날이 되진 않을 거야.
그가 상대를 다 죽이리란 법은 없다.
그런 법은 없지, 그러니까 버티자. 버틸 수 있어. 이세계에 온 이후 어차피 항상 그러면서 살아왔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에라블은 입에 시그눔 안정제 두 알을 털어 넣고, 홈 웨어로 입는 후드 추리닝에 머리를 씌워 넣었다.
무슨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알몸에 목욕 가운 하나 걸치고 나갈 용기는 없다. 속옷까지 꼼꼼히, 브래지어도 후크를 다 채워 입었다.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거나 뭐 그럴 수도 있으니까. 에라블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한테 왜, 난 거슬릴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일도 진짜 열심히 했는데, 근데 왜, 왜 나한테…, 뭐, 이유 따윈 알든 모르든 별 차이 없다. 알면 어쩔 건데?
그러니까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자.
에라블은 말린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옷소매를 손등 아래까지 끌어 내린 다음 욕실에서 나왔다.
“세상에, 에라블. 다 꽁꽁 싸매고 나왔네요?”
패드 스크린을 훑으며 식탁에 기대있던 데제가 후드 끈까지 꼭 조이고 나온 꼴을 보곤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빨리는 나왔네. 한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그가 들고 있던 패드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 188.2cm에 달하는 체고는 그 자체로 심히 위협적이었다.
에라블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러 참았다.
어떻게 참을 만했다. 욕실에서 털과 함께 마음마저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버티자, 버틸 수 있어.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요.”
아니야, 안 될 것 같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착실히 대답하고 있었다.
“예.”
유서는 냉동고에 있고, 보험 증서는 침대 밑 서랍에 있다. 사후 대비책을 되새긴 에라블은 이어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 20시 47분.
식사는 가볍게 밖에서 먹고 가자 그가 제안했고, 그래서 그들은 집에 들어오기 전 군 식당에서 저녁을 때웠다.
에라블은 내일 아침까지 최대한 컨디션을 보존하기 위해 음식으로 위장을 채웠고, 샤워도 했고, 시간을 끌 수 있는 모든 일과를 다 처리하고 현재 시각은 20시 48…, 49.
출근 시간은 07시 10분.
10시간 21분, 621분, 37,260초, 59초…. 58초만 버티면 된다. 출근은 시켜 주시겠지.
‘37,258… 57….’
지시대로 먼저 침실에 들어간 에라블은 초를 거꾸로 세며 정처 없이 안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지나기 마련이었다. 숫자가 3만 6천 대쯤으로 줄었을 때 그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새카만 머리칼이 물기에 젖어있고, 벗은 상체에 트레이닝 팬츠 하나만 걸친 차림새였다.
관계를 앞에 둔 남자의 모습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예상 범위 내였다. 하지만….
“……!!”
그가 허밍을 흥얼거리며 손바닥만 한 작은 검은색 플라스틱 케이스의 잠금장치를 열고 있었다.
순간 에라블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장면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야, 약은 싫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쾌락을 좇던 그의 적합자들, 에라블은 비참했던 그들이 떠올라 그에게 매달렸다.
“약은! 아, 안 됩니…! 제, 제발…!”
그가 약간 놀란 듯 내려다보았다.
“진정해요, 에라블. 가벼운 국소마취제에요.”
“…예?”
에라블은 눈을 껌벅였다.
맺혔던 눈물이 뚝뚝 뺨으로 떨어진다. 멍한 표정에 벌어진 입에선 침도 떨어지고 있었다.
패닉이라고 이마에 써 붙여놓은 것 같은 보기 흉한 얼굴이었지만, 알았다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국소마취제라고요. 처음이면 몸이 좀 불편할 테니까.”
마취제…, 조금 진정이 된 에라블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후드를 걷어 어지럽게 흐트러진 에라블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무릎까지 꿇고 앉아 매달리는 그녀를, 데제가 다정한 얼굴로 달랬다.
“내가 처음이잖아요, 에라블. 준비 없이 하면 많이 불편할 테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싫으면 그냥 없이 할까요?”
“제, 제가 처음인 건 어떻게…?”
“카밀리아 오베아 중위가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니까. 제발 좀 하라고. 우리 부대에서 소위가 버진인 걸 모르는 사람도 없을걸요.”
“아….”
다행이다. 에라블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았다. 수치심보단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데제는 에라블의 겨드랑이 사이에 두 손을 집어넣어 여자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에라블의 얼굴이 다시 희게 굳었다.
차라리 약이라도 써서 정신을 빼놓는 편이 더 안전할지 모른다. 이렇게 겁먹은 사냥감처럼 그의 공격성을 자극해선 이 일이 좋게 끝날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이럴까 봐 며칠을 기다려줬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나 봐요?”
내가 이런 쪽으론 재능이 없나, 그는 얄팍하게 투덜거리며 들어 올린 에라블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에라블은 아주 경악스럽다는 얼굴 했다.
그는 픽 웃으며 이번엔 조금 더 길게 입술을 맞췄다가, 촉-, 소리를 내며 떼어냈다.
여린 몸이 놀라 파르르 떨렸다. 꼭 거미줄에 걸린 작은 사냥감처럼.
“에라블.”
“…예, 예?”
하지만 에라블은 조금 혼란스럽기도 한 듯했다.
약간이긴 하지만 적합자의 타액이 섞였으니까. 이상한 것을 느꼈을 거다. 뭔가 뜨겁고 근질근질한.
그런데도 여전히 반라인 그의 몸에 맞닿아 있는 작은 여자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걱정되네요, 에라블. 내가 소위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에요. 단순한 관계잖아요? 기분 좋을 거예요. 안정제보다 몸에도 좋을 거고. 긴장 풀어요.”
“아, 안정제 말씀이십니까…?”
데제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영문을 몰라하고 있는 에라블을 자기 허벅지 위에 앉혔다.
에라블의 몸이 또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긴장 풀라니까.”
뭐, 그게 마음대로 되면 세상에 문제가 없겠지. 그는 한 손으로 에라블의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작은 머리통은 그의 손아귀에 넉넉하게 쥐이고도 남았다.
그 차이를 느꼈는지 또 공포스러운 얼굴이다.
데제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살살 달래는 것엔 취미가 없는데. 그는 이렇게까지 집중한 스스로가 사실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물린 입술을 살살 핥았다. 혀끝으로 틈새를 비비니, 눈치 빠른 에라블이 벌벌 떨면서도 작게 입을 벌렸다.
그의 눈매에 웃음기가 어리며 곱게 흐려졌다.
“흐-….”
숨소리에 젖은 살 부딪히는 소리가 얽힌다. 입맞춤이 조금 더 깊어지며, 에라블의 막힌 목구멍에서 비음이 샜다.
“삼켜야죠.”
그는 말랑한 입술을 지그시 물어주었다. 에라블은 저도 모르게 고인 타액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러고도 넘치는 타액을 그가 혀로 길게 핥아 올리며, 에라블의 다리 안쪽을 쓸었다.
작고 말랑말랑하다. 그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말랑말랑한 촉감을 즐겼다.
긴장한 밤갈색 동공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턱을 쥐고 저를 바로 보게 했다. 슬슬 초점이 돌아오는 눈을 그는 가만히 마주 보았다.
“…흣.”
에라블이 민감하게 움찔거렸다. 기껏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려주었는데, 초점이 잡히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들었다.
데제는 그런 에라블을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었다.
“……!”
놀라 악다문 입에서 침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다시 달래듯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질끈 감은 에라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쯧, 데제는 혀를 찼다.
그 소리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슬그머니 올려다보는 밤갈색 눈동자에 작은 희망이 반짝였다.
“저, 저는 역시 별로 재미가….”
데제는 빤히 시선을 맞추며 트레이닝복 밴드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에라블이 새빨개진 얼굴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자기가 그랬단 사실에 놀라 다시 황급히 손을 떼어내곤 후드 밑단을 움켜쥐었다.
데제는 걱정스러운 듯 에라블을 쳐다보았다.
계속 이렇게 굴다간 오늘 정말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