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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3화 (13/132)

13.

진짜 잘 쳐줘서 한 달, 한 달 보름이다. 에라블은 비교도 안 되는 미인들도 보름이 한계였다.

데제는 성질이 더러웠고, 그와 관계를 한 인간치고 그 성질을 안 건드리는 인간을 개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들 중 제일 더럽게 노는 비르고도 데제보단 나았다. 데제는 툭하면 상대를 환자로 만들어 놓으니까.

“근데 오늘 며칠째지?”

데제가 불쑥 물었다.

“3일쨉니다.”

“3일짼데 결과가 위궤양이야? 세상에, 나도 다 됐네.”

그는 다시 한탄했다.

“뭘 어떻게 해야 우리 소위님 긴장이 좀 풀어지시려나. 올, 우회 접속되는 광자 패시브 계열 찾아서 나한테 자료 좀 보내 봐. 보조 등급으로.”

“그냥 일거릴 좀 줄여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소위가 일이 그렇게 많아?”

“사단 애들 중에서 수당을 제일 많이 받아 가고 있습니다.”

“아, 그래?”

성실한 줄은 알았지만 진짜 생각보다 더 성실했네, 데제가 감탄하는 중에 이 작전의 의뢰인이 다가왔다.

“벌써 다 끝내셨네요?”

나긋나긋한 인상의 여자는 시장 점유율을 나눠 먹는 동종업자의 생산 라인을 파괴하고 신형 스펠 디스크의 설계도를 가져다주길 원했다.

형태를 변형시켜주는 트렌스폼 디스크였는데, 개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지속 시간은 2%, 디스펠과 탐지 방해률은 1.5%나 향상된 꽤 좋은 물건이었다.

“처음 뵐게요.”

여자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개들의 보스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훨씬 미남이시네요?”

데제는 향상된 인식 장애 디스크 설계도를 가진 생산 업체는 없는지 궁금해졌다.

있으면 이런 일도 좀 줄 텐데.

“의뢰에 관한 건 저하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올이 사이로 끼어들었지만, 그녀는 올을 무시했다.

“여자가 필요해 보이시는데요?”

시선이 데제의 바지춤을 은근히 훑는다. 끈적한 시선이었다.

“아.”

성희롱이었네.

데제는 여자가 내민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기며 관자놀이에 총구를 댔다.

여자는 의뢰인을 죽이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지 은근히 웃었다.

“저한테 치유 보조계열 라이센스가 있거든요. 우주선도 이 근처에 있는데….”

그 말에 관자놀이에 갔던 총구가 방향을 돌렸다.

‘보조 슬롯 붙어있으면 그냥 죽이긴 아깝지.’

개머리판 끝부분이 여자의 윗니에 걸렸다. 여자가 핏줄이 선 눈을 부릅뜬다.

“컥-….”

그는 뽑아낸 머리를 한기가 희게 올라오는 보존 상자에 넣은 뒤, 푸들대는 남은 몸에 몇 차례 방아쇠를 당겼다.

“역시 발열이 심해.”

“연구소에 전달하겠습니다. 트랜스폼 설계도 하고 같이 전달하면 되겠네요.”

의뢰인이 없어졌으니 ‘개들’의 신뢰도를 위해서라도 깔끔하게 처리해야 했다.

“보조 슬롯 있는 애들이 왜 이렇게 드문지 모르겠어. 아니었으면 냉동고에도 좀 여유가 있었을 텐데.”

데제는 새 담배를 또 꺼내 물며 말을 덧붙였다.

“참, 연구소 다녀오는 길에 맥주 좀 사 와. 우리 소위님 입맛이 영 싸구려…. 위궤양에 좋은 건 뭐 없나? 아, 그 주사제 있지, 식스A?”

그게 위장에 좋긴 하지만 간 손상으로 판매 중지된 약물이란 올의 대답에 데제는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적응시키려면 한동안은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었다.

* * *

“그거 설마.”

저녁 7시. 데제가 한 박스나 되는 맥주와 그 외 식료품이 든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또다시 에라블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 막 주사를 놓으려던 참이었다.

“식스 A인가요?”

“예…, 위염에는 이게 효과가 좋습니다.”

그것 외에도, 늘어져 있는 다른 주사제 역시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데제는 식탁 위에 널려진 것들을 살펴보았다.

에라블이야 이 치명적인 주사제들보단 또 제집에 들어온 자신을 더 신경 쓰는 모습이었지만.

“저, 그, 그런데 사단장님께서 저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데제는 그 질문에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왜 묻지? 생체인식형이긴 해도 그래봤자 공산품이다. 그딴 걸 믿고 있진 않았을 텐데.

아, 내가 굳이 왜 비밀번호 같은 걸 알아두고 있냐 묻는 건가.

“매번 퇴근 시간 맞추긴 어려우니까.”

“…예.”

에라블은 그냥 팔에 주사나 놓기로 한 모양이었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부당함을 그냥 다 받아들이기로 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팔오금에 주삿바늘을 꽂는 모습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데제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테이블에 기댔다.

“그거 부작용 있을 텐데요?”

“텐토리움 B를 같이 놓으면 괜찮습니다.”

에라블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다른 주사제 앰플을 들어 보였다.

‘오, 그럴싸한데.’

간 환자들을 위한 주사제였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부작용이 있다. 금지 약물이 다 그렇지.

“뇌 손상은요?”

“뇌 손상엔 가바 C를 먹으면 됩니다.”

그가 묻기가 무섭게 에라블은 또 다른 약제를 들어 보인다.

‘약 장사시켜도 되겠네.’

데제는 지그시 보며 팔짱을 꼈다. 계속 말해보란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에라블이 주절주절 말을 잇는다.

“그리고 근육 이완제를 놓고, 마지막으로 안정제까지 먹으면 완벽합니다. 그럼 이젠 다 괜찮….”

그렇게 말하면서 에라블은 자연스럽게 맥주 캔으로 손을 뻗었다.

주사를 맞자마자 한잔할 생각이었던 모양인지, 맥주 캔이 주사제 사이에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데제는 맥주를 집으려는 에라블의 이마를 손끝으로 지그시 밀었다.

굳어서 저를 올려다보는 동그랗고 옅은 갈색 눈을 보며 그는 다정하게 웃었다.

“안 괜찮아요, 소위. 놀랄 정도로 완벽한 약물 남용이네요. 그러다 죽어요.”

“컨디션에 맞춰서 주의하고 있습니다.”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무시하며 데제는 맥주 캔을 멀찍이 치웠다.

그러자 에라블의 시선이 아련하게 따라붙었다.

“위염에 위궤양에 식습관은 개판이면서 주의는 꿈속에서 하고 있나 봐요?”

멀어진 맥주 캔을 아련히 쳐다보는 모습에, 데제는 어쩐지 장난기가 돌아 치운 맥주를 도로 들고 소리 나게 딴 다음 제 입에 가져다 댔다.

에라블의 입꼬리가 아래로 처진다. 그만큼 입꼬리를 올리며 데제는 픽 웃었다. 그나저나 이 여자, 주사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이거 다 금지 품목일 텐데, 어디서 났어요?”

감사에선 걸린 게 없다고 알고 있는데. 뒤로 빼돌린 게 있는지 좀 궁금해졌다.

시원하게 맥주를 넘기며 묻는 말에 에라블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무실에서 샀습니다.”

부대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PX에서 과자 팔 듯이 이 사단 의무실에선 금지 약물을 팔고 있었다. 물론 부대 내 상가 약국에서도 팔지만, 의무실 쪽이 더 고품질에 간단한 혈액 검사 등도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나름 복지라면 복지다.

“그래요? 이 두 개는 여기서 못 구할 텐데?”

데제는 어지러이 섞여 있는 주사제 중 앰플 두 개를 골라 나란히 세웠다. 특정 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약물이었다.

“예, 이건 59에서 구매했습니다.”

데제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거기 개인 판매 안 되지 않아요?”

그 질문에 에라블 버밀리언이 웃는다. 자주 보던 업무용 미소였다. 데제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에라블의 앞자리에 앉았다.

“좀 듣고 싶은데.”

“그…, 그게 진짜 별건 아닙니다.”

에라블은 살짝 몸을 빼 그와 거리를 떨어트렸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굴고 있는데, 슬슬 서운하네.

“별 건 아닌데?”

데제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여자의 작은 몸이 움찔했다. 에라블이 감 좋은 건 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위험 신호를 기가 막히게 잘 잡아냈다. 항상 지뢰를 밟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튼다.

하지만 당장 지뢰를 안 밟는다고 그 방향이 꼭 안전한 방향인 건 아니지. 그게 에라블이 가진 딜레마였다.

때때로 진짜 안전해지기 위해선 약간의 데미지를 감수하고 지뢰를 밟을 필요가 있는데, 이 감 좋은 여잔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이해했더라면 친해지고 싶다는 어제저녁 그의 개소리에 어떻게든 발을 뺐겠지. 자기도 친해지고 싶다고 맞장구쳐주는 대신.

“세금 계산을 좀 도와줬습니다.”

지금도 보라지, 곧바로 답을 한다. 데제는 손에 머리를 괴고 빙글거렸다.

“세금?”

“예, 홧김에 세무사를 다치게 한 바람에…. 제가 도와주는 대가로 약품 몇 가지를 받기로 했습니다.”

“이것들?”

데제는 좀 전에 골라낸 엠플 두 개를 손끝으로 빙빙 굴렸다.

“예, 기껏해야 개인 비상용에 소량이라 그쪽에서도 좋게 승낙을 해줬습니다.”

에라블은 기분 좋게 말했지만 전혀 좋게 들리지 않는다.

용돈벌이로 사이드 잡을 뛰는 거야 안 하는 놈들이 없지만, 꽤 중증의 안전주의자로 보였던 에라블이 그런 일에 손을 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런 사소한 보고까지 받고 있진 않아서 에라블의 말은 데제에게 꽤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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