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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1화 (11/132)

11.

“몸이 좀 안 좋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런 쓸데없는 얘길 왜…, 에라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어제 술을 좀 많이 하던데, 말릴 걸 그랬나 봐요?”

“괜찮습니다.”

에라블은 최대한 공손해 보일 자세로 오트밀 죽을 떠먹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 사단장님. 혹시 시킬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에라블은 더욱 공손함을 어필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다. 괜찮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엎드려서 여쭤보면 안 되겠지.

너무 긴장해서 뒷목에 담이 오고 있었다. 내일은 근육 경련에 좋은 약이라도 처방받아야겠다. 그때까지 만약 내가 또 살아 있다면.

“또 그 소리네.”

그는 웃고는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위, 내가 있는 게 불편해요?”

너무 당연해서 진짜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을…, 한 손으로 삐딱하게 식탁을 짚은 채 그가 묻고 있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말도 못 하게 불편했다.

몸은 점점 작아지고, 위는 꽉 조여들어서 에라블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안…, 불편합니다.”

“난 소위랑 친해지고 싶은데, 소위는 내가 불편하기만 한가 봐요?”

“아닙니다, 진짜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싫으면 나 갈까요? 집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아닙니다, 진짜 절대로 불편하지 않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뭔가 약간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뭐, 느꼈다고 멈출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단장님께서 저희 집에 계신 게 정말 너무 좋습니다. 저도 예전부터 사단장님과 정말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그제야 데제가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에라블은 안도하며 따라 웃다가 멈칫했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정말 기쁘네요. 나 불편해하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그래요, 앞으로 우리 친해져 봐요.”

“예….”

이게 아닌데….

“어제 보던 영화, 4편도 있던데. 마저 볼래요?”

“예…, 좋습니다….”

데제는 긴 다리로 여유롭게 거실을 가로질러 가서는 공포 영화 4편을 틀었다…. 집이 좁아서 그의 다리로 걸으니 두어 걸음이면 충분했다.

어제 한 번 왔었다고 리모컨을 찾아 쥐곤 채널을 돌리는 모습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게 공포 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역시 난 이대로 죽는 걸까….’

에라블은 멍하니 TV를 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무슨 생체 병기 같다.

위압감 때문인지, 부관실에서보다 그가 더 크게 느껴졌다. 곧은 뼈대에 군살이라곤 전혀 없는 188cm 남자의 몸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움츠러들게 했다.

일단 체격 차이부터 압도적이다.

그는 늘씬하지만 큰 신장에 걸맞은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위축된다.

160cm의 체구로는 도주도 불가능하겠지. 이건 신체 레벨 이전에 다리 길이의 문제였다.

그가 한 대만 툭 쳐도 나 같은 건 아주 간단하게 으깨져 버릴 것이다. 다시 살인, 사망, 사지 박살 등으로 어제와 똑같이 머리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는 순간조차 그는 매우 아름다웠지만, 실은 그게 더 무서웠다….

“맘에 들어요?”

그의 뒤태를 초점 없이 쳐다보던 에라블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냉동고에 신선하게 있을 유서를 떠올렸다.

추가하거나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있다면 오늘 죽기 전에 해놔야 하니까.

“다 먹었으면 물이랑 약도 챙겨 먹고, 와서 편하게 봐요.”

소파에 기대앉은 그가 말했다. 여기서 제일 편해 보이셨다.

에라블은 그의 지시대로 물과 위염약을 먹고 오트밀 그릇을 치운 후, 데제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어제 이 영화 3편 후반부터 자던데, 3편부터 다시 볼까요?”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괜찮습니다.”

“음, 아니면 그냥 다른 걸 볼래요? 이것저것 많던데. 웃긴 것도 있고. 웃긴 건 별로 안 좋아해요?”

착각인가. 약간 좀 신난 것 같으신데…, 에라블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왜지?’

다리를 꼬고, 마치 자기 집처럼 팔걸이에 느긋이 기대앉아 있는 데제는 어쨌든 보기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상인 연합 주가라도 오른 걸까.

“공포물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는 그대로 4편을 틀었다.

TV 화면 위로 영화사 로고가 지나간다. 생각해보니 그의 말대로 3편 결말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단장이 어제 몇 시쯤 어디서 잤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설마 내 침대에서 주무신 건 아니겠지, 설마 안 주무셨나? 그럼 난 깨어있는 사단장 옆에서 혼자 술에 취해 고꾸라졌단 뜻인가?

잘했다. 어차피 죽을 거면 자면서 죽는 게 최선이지.

그런 의미에서 에라블은 다시 의식 소실이 간절해졌다.

“저, 맥주….”

“안 돼요. 위염이잖아요.”

“예….”

위염인데 왜 안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에라블은 그냥 입을 다물고 조용히 TV나 쳐다보았다.

4편째보다 보니 이제는 약간 내적 친밀감마저 생길 듯한 악령에 덜덜 떨며, 어제에 이어 또 옆통수에 부딪히는 그의 시선을 강하게 느꼈다.

그렇다고 눈을 돌려 그의 시선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무섭다…. 무섭다 못해 옆통수가 뚫어질 것 같다. 긴장으로 점차 숨이 가빠졌다.

그의 시선이 한시도 옆통수에서 떨어지질 않으니 머릿속이 또 새하얗게 비어져 갔다.

알콜이 없어 어제보다 사태가 더 심각했다.

이젠 화면도 눈에 안 들어온다.

손바닥만큼 작은 집 안에 단둘…, 사건이 벌어지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머리가 움켜쥐어 소파 팔걸이 같은 곳에 내리 찍히면 난 그대로…. 분명 죽이는 것보다 청소하는데 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아니, 치우기 번거롭게 그럴 것도 없이 간단히 목을 돌려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아주 깔끔하게 시체만 달랑 들어 처리하는데 고작 십여 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건 물론 다 운이 좋았을 경우의 얘기였다.

만일 그가 갖고 놀기로 결정한다면 사태는 더욱 끔찍해진다.

죽어가며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유서 대신 가족에게 안부 편지 따위를 쓰게 될 수도 있었다.

다 목격담이었다.

지난 2년간 본 게 많았다.

에라블은 다시 속이 메슥거렸다. 미리 약을 먹어두지 않았다면 벌써 변기를 붙들고 토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등허리는 굳고 이마엔 식은땀이 뱄다.

그녀의 안색이 점차 희게 질려가자, 데제가 픽 웃고는 시선을 돌려주었다. 한번 봐줬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너무 고마워서 찔끔 눈물이 났다.

고개를 돌린 그는 영화를 좀 보는가 싶더니, 얼마 못 가 집중력을 잃었는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제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옆자리가 비자 에라블은 마침내 약간의 여유를 되찾았다. 숨을 훅, 삼켰다가 조심스럽게 뱉어냈다.

데제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집안을 돌아다녔다. 집이 좁아서 시야각에 얼핏얼핏 다 걸렸다.

영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멋대로 남의 집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열어 안을 살폈다.

얼마 못 가 러닝 타임이 끝나자, 에라블은 어쩔 수 없이 데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복 차림의 데제브 아브가니스는 매우 편안해 보이셨다.

연회색 트레이닝 팬츠에 흰 티셔츠, 심지어 눈썹과 귓가를 덮는 머리카락은 아직도 살짝 젖어있었다. 정말 너무 편해 보여서 그가 이 집 주인 같았다.

씻고 옷을 갈아입으셨다는 건 오늘 밤에도 여기 있겠다는 그런 뜻인 걸까.

그래도 내 집인데. 내 의견은…, 아까 물으셨지. ‘나 갈까요?’ 하고. 그리고 난 아니라고 대답했고….

‘…….’

그럴 수 있지. 저 남자를 상대로 용기 내봐야 개죽음뿐이다. 장수는 못 해도 곱게는 죽고 싶었다. 자연사. 좋다, 안 되면 안락사라도…!

진짜 모르겠다. 친해지고 싶다니? 너무 뜬금없어서 믿는 척도 못 하겠다. 입대 3년 차에 이 무슨 새삼스러운 친분 도모야.

‘…한 달, 한 달 보름.’

에라블은 순간 떠오른 개들의 내기 기간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사이 그는 식탁 위에 랩탑까지 꺼내 놨다. 뭔가…, 참 많이도 가져오셨다.

여벌 옷에, 오트밀에, 랩탑까지. 웃긴 건 이걸 지금 알았단 사실이다.

이거 다 들고 걸어가는 데제브 아브가니스라니, 진짜 상상도 안 되는 모습인데. 들고 온 모습이 기억이 안 난다.

뭔가를 잔뜩 가져온 9등신의 저 늘씬한 미인은 지금 자연스럽게 내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이건 내가 내일 다시 사다 놓을게요?”

열린 냉장고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치니,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뚜껑 딴 맥주 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예….”

그건 내일 또 오시겠다는, 그런 말씀이신 걸까.

“그런데 소위,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예요?”

“…예?”

“냉장고 상태가 심각한데, 먹을 게 인스턴트 하고 맥주밖에 없어요.”

데제가 활짝 연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유도 있고 과일 통조림도 몇 개 있을 겁니다.”

에라블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제 냉장고를 변호했다.

그러자 그가 냉장고 문을 닫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좀 웃고 있었는데, 왜 웃으시는 건지 모르겠다.

“다 유통기한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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