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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0화 (10/132)

10.

사실 무서운 건 질색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은 겁에 질려 벌벌 떨어도 자연스러운 유일한 장르라는 게 중요했다.

‘…헉!’

하필이면 후속편이 제일 긴 공포 영화를 골라 튼 에라블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악령의 등장에 이를 악다물었다.

하마터면 남자 옆에서 비명을 지를뻔했다.

보스몹 옆에서 어그로 끌다가 장렬히 산화하고 싶진 않았다. 이를 좀 더 꽉 깨물고 화면을 노려보았다.

악령은 부지런하게 사람들의 목을 쑤시고 다니고 있었다. 터지듯 많은 피가 화면으로 튄다.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데제와 눈이 마주치곤 화들짝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마비 걸릴 뻔했다. 이 남자를 옆에 앉혀두고 공포물을 보니 수명이 실시간으로 깎이는 기분이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에라블은 말없이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TV가 덜 무섭다. 등장인물들 멱 따고 돌아다니는 악령이 그나마 덜…, 무서워! 이것도 무섭다고!

궁지에 몰린 에라블은 맥주 캔을 동아줄처럼 쥐고 벌벌 떨었다.

악령도 무서웠고, 남자는 더 무서웠고, 둘이 합쳐지자 시너지가 백배였다.

그렇게 공포에 덜덜 떠는데 왜인지 그는 낮게 웃어댔다. 내 모습이 기가 차신 모양이다.

에라블을 꼴불견이길 간절히 빌었다. 그래야 못 볼 꼴이라고 빨리 가버리실 테니까!

하지만 간절한 소망과는 다르게 그는 셔츠 윗단추를 풀며 소파에 기대 늘어졌다.

아주 본격적으로 늘어지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에라블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주 느긋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옆에만 있어도 무서워 죽겠는데, 바라보고 있기까지 하니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의식 소실이 간절해져서, 연신 벌컥벌컥 맥주만 들이켰다.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맨정신으로 견디는 대신, 그냥 왕창 취하기로 작정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 * *

“이제 일어났어요?”

내 머리…, 에라블은 무거운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숙취로 아픈 머리가 찡-, 하고 울린다. 입에선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아침인가…. 시계가 어디 갔지….

‘으….’

어젯밤, 공포 영화를 몇 편이나 연달아 보곤 소파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술…, 술을 좀 많이 마셨다. 먹고 널브러져 놓은 맥주 캔이 테이블 위에 몇 개나 쌓여있다.

그렇지 않아도 낮은 컨디션에 맥주와 공포 영화에 푹푹 절여지던 에라블은 새벽 3시경, 마침내 끊어지는 의식을 반겼다.

사단장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떨어트린 게 마지막 남은 이성이었다.

수면 부족에 숙취와 공포의 잔재가 겹쳐 머리가 아주 흐렸다.

“소위, 술이 약한 모양이에요. 어제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어요.”

“아….”

“아?”

데제가 젖은 머리를 손끝으로 털며 상큼하게 눈을 맞춰왔다.

꿈인가…, 에라블은 지끈대는 이마를 감쌌다.

“아침 커피…, 준비하겠습니다. 잘로 제 쿠키가 남았는데, 드릴까요?”

나 언제 출근했지?

“소위, 그게 집에도 있어요?”

데제가 정말 끔찍하단 얼굴로 되물었다.

“집…,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씀이시지.

에라블은 낮게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에 그제야 찬물을 뒤집어쓴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아….’

에라블은 소파에 엉거주춤 엎드려선 그를 마주 보았다.

정신이 들기 무섭게 몸이 굳었다. 꼭 뱀을 맞닥뜨린 개구리처럼. 반면 소파께에 앉아 시선을 맞추고 있는 남자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나 먼저 씻었어요. 아침은 소위도 씻고 같이 먹도록 하죠?”

“예, 알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며, 에라블은 재빨리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다리를 움직여 욕실로 직행해 문을 닫은 다음 그대로 주저앉았다.

간신히 덜덜 떨며 네발로 기어가 샤워기 물을 틀었다. 물소리로 위부와 차단된 뒤에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흐.’

에라블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팔 틈으로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멀쩡해.’

다행히 목도 아직 붙어있고, 사지 육신도 아직 다 멀쩡하다. 그녀는 작게 호흡을 골랐다.

오래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출근해야 하니까. 그래, 출근….

‘…몇 시지.’

에라블은 욕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벌써 7시 15분이었다.

놀란 그녀는 재빨리 씻고 나와 출근 준비를 마쳤다. 자신의 식탁에 앉아있는 그에게 커피도 내드렸다.

사실 평소보다 좀 빠르게 출근했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아침 준비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금방 식당에 다녀오겠습니다.”

“벌써 출근한 얼굴이네요, 에라블.”

에라블은 미소를 회복했다. 여기가 자신의 집이고, 이 남자가 앉아있는 자리가 매일 자기가 밥 먹는 자리란 사실은 의식 아래로 깊게 파묻어버렸다.

“아침은 괜찮아요. 소위는 식사하죠?”

“예, 알겠습니다.”

에라블은 냉장고에서 제 아침거리를 꺼내 렌지에 돌렸다. 소화가 될 것 같진 않지만, 먹으라니 먹어야지. 그녀는 해동된 인스턴트 박스를 들고 싱크대에 기대어 섰다.

다행히 옆에 와서 앉아 먹으라는 소린 안 하신다. 더 했다간 진짜 위장 장애를 일으킬 판이라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이 모든 원흉이 그라는 사실도 애써 의식 밑으로 파묻었다.

“아침부터 인스턴트에요?”

데제는 그녀가 먹는 것을 보며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가끔 먹고 있습니다.”

진짜 가끔, 일주일에 4~5번 정도만 먹고 있다.

에라블은 어쨌든 적절한 태도를 회복했다. 출근했다고 생각하니 아주 적절한 태도로 상급자를 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흔한 직장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 * *

오전 근무를 마친 에라블은 점심 식사 후 창고로 넘어갔다. 갑작스럽게 잡힌 개들의 외근으로 잠시 미뤄졌던 아티팩트 박스 대여도 해결한 뒤였다.

사실 보관소 해킹 정도의 작은 군법 위반이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뭐, 결국 약간의 스트레스성 위염이 와서 잠시 의무실에 들러 약을 타오긴 했지만.

그래도 어제 그 혼돈의 카오스를 겪은 것 치곤 멀쩡했다.

에라블은 제집에 있던 사단장에 대해선 다 잊기로 했다.

다 파묻어 버리고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어젯밤의 일들이 일종의 꿈처럼 느껴졌다.

대체 그가 왜 왔던 건지, 심지어 왜 우리 집에서 하룻밤 지내기까지 했던 건지, 그게 정말 다 있었던 일이 맞는 건지.

평소처럼 간부들의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쌓여있는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니, 어젯밤 일이 공포 영화와 알콜이 뒤섞여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래, 다 꿈이었을 거다.

일종의 특이한 악몽이었던 거지.

“에라블, 한 달 보름간 잘 부탁해. 오늘이 2일째다?”

창고로 가는 길, 뜬금없는 개소리로 비르고 하그가 시비를 걸어왔다. 같이 있던 아리에스 시더는 그렇게 오래 고생할 것 없이 딱 한 달만 버티라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한 달, 한 달 보름….

에라블은 듣자마자 바로 상황 파악을 했다.

‘…내기를 걸었네?’

저 악마 새끼들. 나를 가지고….

‘내기를 걸었어….’

분쟁 지역, 실험실, 아니면 또 뭐가 있지…? 에라블은 개들이 자신에게 걸만한 내기 목록을 떠올리며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물론 너무 바빠서 오래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거대 무력 집단에 필요한 군수품은 막대했다. 그건 그녀가 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 같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매우 바쁜 노예였다.

심지어 매사 유용함을 어필해야 해서 더 바빴다. 뭔가를 오래 걱정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무엇보다 저 악마들을 상대로 일일이 불안해하고 안심해 해봐야 완전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였다.

그들이 자신을 상대로 내기를 걸었다고 해도…, 뭐, 내 할 일이나 하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보단 당장 속 쓰린 게 더 급했다. 보관소 다녀오느라 점심을 대충 급하게 먹은 게 사태를 더 악화시킨 듯했다.

에라블은 주머니를 뒤져 위장약을 한 알 더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저녁엔 느긋하게 맥주에 피자나 한 판 먹어야지.’

위장약을 삼키면서도, 그녀는 그런 팔자 좋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인생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신에게 수시로 엿을 먹는 인생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 * *

“저….”

갈린 오트밀은 부드러워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갈렸으니까. 뭔가 신생아 이유식 같기도 하고.

에라블은 멀건 오트밀 죽에서 눈을 떼고, 데제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왜….”

“저녁 먹어야죠. 앉아서 먹어요.”

에라블은 스푼을 들었다.

거의 척수 반사였다. 머릿속은 소돔과 고모라였지만, 최소한 겉으로 티가 나진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또 사단장님께서 우리 집에…, 모르겠다. 에라블은 갈린 오트밀을 무의식적으로 떠서 입안으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해봐야 달라질 것도 없는데 위장병만 더 악화할 것이다.

이 오트밀 죽이 만들어져 여기까지 오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들고 온 사람이 데제 본인이란 사실에 대해선 더더욱.

복통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대신 그녀는 알콜에 대해 생각했다. 그냥 아무 술이라도 좋으니까, 진탕 마시고 이 현실에서 아웃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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