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에라블 소위, 오늘 저녁 시간 있습니까?”
야근이 끝난 뒤, 소대원들이 빠져나간 창고는 어둡고 고요했다.
8시경. 생각보다 일찍 끝난 야근에 에라블은 설레하며 뒷정리를 하던 참이었다.
책상을 치우고, 창고 불을 끄고, 나가다가 깜빡한 개인용 패드를 챙기러 들어갔다 다시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문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데제를 보게 되었다.
긴 그림자가 복도의 역광을 받아 깊게 안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에라블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사단장님.”
“인사를 또 해요?”
우리 오전에 같이 있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며 데제가 옅게 웃는다.
그의 친근한 말투에도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주위에 아무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창고 불도 꺼져있고…, 딱 이런 분위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데….
“혹시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에라블은 본능적으로 원인을 찾았다.
갑자기 야근시킬 일이 생겼다거나…, 어쩌면 오전 보고서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요, 나랑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묻는 겁니다.”
그가 문가에 기대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구경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었지.’
에라블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 저녁.
사단장의 약간 흐트러진 차림새, 나른하게 풀린 눈매…, 에라블은 생각을 해보았다.
이 일이 공적인 일일 확률이 얼마나 되지…? 물론 그가 나한테 사적인 볼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즉시 안전한 길을 택했다.
“제가, 흠, 창고 업무가 아직….”
“아.”
데제는 옆쪽 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요?”
그러면서 손을 뻗어 벽의 스위치를 탁, 올린다.
컴컴했던 창고가 삽시간에 확 밝아졌다. 덕분에 하얗게 질린 에라블의 얼굴도 더 환하게 드러났다.
전등 스위치가…, 최소한 지금 그의 손엔 안 닿는 곳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야근 중이었나 봐요, 불 꺼놓고.”
그가 한번 픽 웃고는, 기대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에라블은 움찔하며 안고 있던 패드를 더 꽉 끌어안았다. 무슨 방패라도 되는 양.
물론 멍청해 보인다는 건 알지만, 쥐새끼처럼 뒷걸음질 치지 않은 게 최선이었다.
“소위, 거절할 거란 생각은 했지만, 핑계가 좀….”
띠띠-, 순간 불쑥 알림음이 울렸다.
데제는 말을 끊고는 귓불 뒤를 톡톡 두들겼다. 무슨 보고를 듣는 듯했다.
그 잠깐의 대기 상황에 긴장이 더해졌다. 서 있는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되물으며 그는 힐끗 에라블을 보았다. 숨도 못 쉬고 굳어있는 모습에 또 픽 웃는다.
“타이밍이 공교롭네요? 알았어, 지금 가지.”
통화를 끊은 그가 얼어있는 에라블에게 가볍게 말했다.
“다녀와서 다시 보죠, 에라블. 이만 퇴근 해요.”
웃으며 몸을 돌리는 일련의 동작이 우아했다. 반면 뒤에 남은 에라블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했다.
목 뒤를 쓸어보니 손바닥에 식은땀이 진득했다.
‘다녀와서 다시…, 다시. 다시…?’
에라블은 난데없이 시한부 판정을 당한 기분이었다. 지나가다 셔틀에 치여도 이보단 충격이 덜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재빨리 오늘 자신의 행적을 복기해 보았다.
성실히 일했고, 최선을 다했고…, 그리고 데제의 신경을 거슬릴만한 행동은 결코 한 적이 없다.
‘당연히 없지! 난 죽고 싶지 않으니까.’
에라블은 머리가 어질했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 * *
“남자가 저녁 먹자 그랬다고?”
“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라블은 술친구로 지내고 있는 카밀리아 중위에게 달라붙었다.
바에 기대앉은 중위가 칵테일을 쪼옥 빨며 히죽 웃었다.
“뭘 어떻게 생각해? 들이대는 거잖아.”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이야?”
카밀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에라블은 굳은 표정을 애써 수습했다.
데제가 몇몇 간부들과 함께 외부 업무를 나가고, 이틀이 지난 뒤였다.
퇴근한 에라블은 안정제를 받기 위해 의무실에 들렀다가 군의관인 카밀리아 중위와 함께 그대로 술집에 처박혔다.
안정제야 약국에서도 팔지만 의무실에서 받으면 공짜에 술친구까지 덤이다. 에라블은 당장 술친구가 매우 몹시 필요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하는 말일걸?
그런 남자가 너 같은 애한테 관심은 무슨.
사이코한테도 취향이란 게 있지 않겠니. 무슨 자신감이야.
혹시 도끼병 같은 거 있니?
에라블은 당장 이런 말들을 들어야만 했다. 진짜 너무 간절했다.
사건 당일엔 완전히 패닉 상태였다. 하루가 더 지나서야 겨우 누군가에게 자문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이게 자문해서 해결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정신머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절대 아니니까요. 다른 방향으로. 다른 방향으로 이게 어떻게 보이십니까? 예?”
절박한 에라블의 얼굴을 보며 카밀은 다리를 까닥거렸다.
“다른 방향으로?”
41단에 정식으로 부임한 지 5년 차인 카밀리아 중위는 퍽 평판이 좋았지만, 역시 일반적이진 않았다.
그녀는 마약이나 극독 따위의 금지 약물에 더 일가견이 있었다. 뒷세계 약재상에서 마피아 따위를 상대하던 그녀는 몇 다리를 걸쳐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을 구했고, 그게 바로 여기였다.
41사단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흔한 사례 중 하나다. 너무 흔해 이젠 일일이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정작 카밀 본인도 ‘그런 일이 있었지, 너무 오래전 일이라.’ 하며 신경 쓰지 않을 정도였다. 수년이 아니라 마치 수십 년은 더 지난 얘기처럼 반응해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남자가 술 마시고 저녁 먹자고 했는데, 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고?”
카밀이 칵테일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히죽 웃었다.
분명 재밌어 하는 게 틀림없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재밌으니 다행이었다.
보통 이런 종류의 상담은 한 사람은 절박하고 한 사람은 짜증이 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오늘 술값은 에라블의 몫이었다.
“아니요, 맥주 마시자는 건 그 타이밍에서 권했던 게 아니라.”
“어쨌든.”
카밀은 에라블의 말을 잘랐다.
“결론은 술 마시자고 했고, 저녁 먹자고 했다는 거잖아. 근데 왜 그런 뜻이 아니야? 그 남자 어디 문제 있니? 혹시 허리 아래쪽에?”
“아, 중위님-.”
“있어? 없어?”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에라블은 카밀의 낚시질에 걸려들지 않았다. 있다 하든 없다 하든 ‘어떻게 아냐’고 물을 게 뻔했다.
그런 다음엔 분명 ‘했냐’고 묻겠지. 안 했다고 하면 그럼 다시 ‘어떻게 아냐’로 돌아갈 게 틀림없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라는 무한 루트다.
“칫, 눈치는 빨라선.”
카밀의 불평을 귓등으로 흘리며, 에라블은 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속이 탄다. 적당히 낚시질은 피했지만, 덕분에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에라블은 그 남자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남자가 13레벨의 시그눔 괴물이며, 이 카스트 제도 버금가는 계급주의 세계관의 답도 없는 포식자이고, 그리고 또 허리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까지.
이 부분은 그냥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잘 알고 있기까지 하다. 남자의 허리 건강에 대해 많은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원작은 하드코어 고수위 19금이었다.
별짓 다 했지. 솔직히 그냥 쓰레기통이었다.
신체 레벨이 높으니 어지간한 고통엔 쇼크도 오지 않고…, 온다 해도 생체 앰풀 한두 개면 완전 회복. 상대가 이러니 뭐-….
에라블은 미식거리는 속을 다시 알콜로 달랬다.
이래서 관람 연령은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 어릴 때 본 바람에 충격이 커서 잊히지도 않는다.
“자기야, 있지. 모르면 한 번 알아봐.”
그니까 안다고.
“남자는 거기만 건강하면 되는 거야. 일단 거기만 건강하면 된다고.”
그니까 엄청 건강하다고.
내뱉지 못할 말들을 속으로 해대다가, 문득 그가 원작에서 상대의 목을 조르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 내 목이 졸리는 기분이라 그랬다.
그 남자는 관계를 한 게 아니다. 그냥 상대를 도구 삼은 것이지.
그런데도 상대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가 준 고통조차 쾌락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BL이 아니라 그냥 호러였네.
“표정 봐라, 그렇게 별로야? 그렇게 못생겼어?”
‘아니요, 생기긴 완전 잘생겼습니다. 완전 무섭게 잘생겼죠. 무려 13레벨짜리 외모라…, 이게 또 이 부대 최고 기밀입니다.’
만에 하나 알고 있단 사실을 들키면 백작가까지 진짜 아주 깔끔하게-…, 에라블은 서늘한 뒷목을 문질렀다.
이게 웬 코미디냐고.
역시 모르는 편이 나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나았다고!
“아니, 지금 생긴 게 문젭니까.”
“사실 문젠 아니지. 잘 생겼으면 땡큐고, 아니면 그냥 불 끄고 하면 되니까. 그래, 그냥 불 끄고 해.”
“예, 좋은 조언 감사드립니다….”
“다 생활의 지혜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