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6화 (6/132)

06.

“뭐, 내일? 후작령 오늘 간다니까 뭐 들었어.”

연결되자마자 정보가 폭발적으로 밀려 들어왔다.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정제를 먹었는데도 노이즈가 낀다. 이대로 다운이라도 되면 큰일이었다. 일이 밀리기 때문이다.

컨디션보단 스트레스 문제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오늘 꼭 로맨틱4를 봐야겠다.

스트레스 관리는 노이즈 관리만큼이나 중요했다. 노이즈는 약이라도 있지. 스트레스는 약도 없다.

쌓이면 우울증이 오고 우울증이 오면 우주가 멸망하는 것이다.

“오늘 19시까지 해주면 두 배 줄게, 400cp 어때?”

“그 두 배를 주시면 내일 09시까진 해보겠습니다.”

우주 멸망을 막기 위해 난 오늘 꼭 로맨틱4 봐야 한다고.

“안 돼, 오늘 19시.”

“열 배 주시면 콜하겠습니다.”

“됐어, 씨X. 때려치워.”

“예, 감사합니다.”

대충 자료를 정리한 에라블은 보고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여기저기 걸쳐진 살인마들의 긴 다리를 익숙하게 피하며 걸었다.

하나같이 빼어난 미남들인데 아무렇지가 않다. 요즘엔 이러다가 목석이 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걱정이 되고 있었다.

아무리 BL소설 등장인물들이지만 하나같이 8등신 미인들인데 진짜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

왜지. 생존 본능이 기어이 번식 본능을 말살시켰나.

“말씀하신 2채널 관련 보고서입니다.”

데제는 제 개들과 함께 늘어져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외모는 무슨 최고급 와인만 마실 것처럼 생겼지만. 그는 상황에 따라 태연하게 행동거지를 바꾸는 남자였다.

약간 풀어진 자세로 맥주를 마시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섹시하다. 마치 맥주 광고 보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은 없었다.

“오늘 제대로 일하는 건 소위뿐이네요.”

“예, 그렇습니다.”

에라블의 대답에 남자는 좀 웃었다. 웃자고 한 소린 아닌데.

“맥주 한 캔 하겠어요?”

그가 캔을 든 손을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이 남자가 데제브 아브가니스가 아니었다면, 이 순간 코피라도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라블은 지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의무실에서 당분간 금주를 권했습니다.”

“아, 주사 맞은 지 이틀밖에 안 됐죠?”

제 손으로 주사를 찔러놓고 남자는 아예 잊고 있었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원래 이런 남자다. 다들 속고 있을 뿐이라고.

하여간 이런 남자가 데일리지에서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로 뽑힌 건 웃지도 못할 개그였다.

아무 데도 쓸데가 없다는 뜻이지. 보는 순간 식겁해서 납량 특집인 줄 알았다.

“언제 같이 한잔해요, 소위.”

“예, 알겠습니다.”

그래, 언젠가. 한 200년쯤 후에.

이쪽 세계 개조되지 않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170~180년이니, 200년 후엔 확실히 난 사망한 뒤겠지.

설령 평생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와 마주하고 한잔하는 불상사까진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진짜, 절대로.’

* * *

“노르 콜로니 쪽으로 몇 팀 더 붙여.”

12시 00분, 에라블 버밀리언은 칼같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데제는 입에 담배를 물며, 그녀가 작성한 보고서를 읽었다. 깔끔하다. 확실히 유용하다니까.

“2황자 전력을 깎으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이미 한 번 해봤잖아. 그게 몇 회차였지?”

“한 44, 43회차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대로 세력이 무너져서 별 재미는 못 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그러니 또 할 필요는 없지. 보강해 보자고. 콜로니에 밀리면 추가 파병을 하겠지. 세 곳의 보급량이 늘었는데, 어느 쪽에서 병력을 빼나 보고 황자님 생각에 맞춰 지원 좀 해드려.”

그것도 이미 해본 것 같지만…, 개들은 데제의 말에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우리 황자님께선 잘 계시나?”

“별문젠 없는 모양입니다. 칸체르가 보직 좀 바꿔 달라고 우는 소릴 좀 합니다만.”

데제는 피식대며, 두 번째 맥주 캔을 땄다.

에라블 소위에게 권했던 맥주였다. 의무실 핑계로 빠져나가다니, 보면 쓸데없는 데서 순발력이 좋다니까. 약간 폭발물 찾는 탐지견 같기도 하고.

제 생각에 키득거리며 데제는 손목 스냅으로 캔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가끔 떠볼 때마다 에라블 버밀리언은 실망하게 하지 않고 공손히 발을 뺐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즐거움이 배였다. 이따 밥이나 먹자고 해볼까? 또 뭐라고 거절하나 보게.

“소위님은 요즘 좀 어때?”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소위가 이번 회차 특이점인 건 확실한데, 전 회차들에 비하면 상당히 조용합니다. 야근에 절어 사는 게 특이하다면 뭐 특이한 점이고요.”

“그래?”

데제와 개들은 특이점에 대해 딱히 유별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야 매번 한둘씩은 나타나는 것이었고, 그런 걸 수십 번쯤 겪고 나면 다 색다른 이벤트에 불과해지게 된다. 지루한 회귀에 더해진 약간의 보너스 정도로.

“아, 버밀리언 소위 노이즈 스펙트럼이 어떻게 되지?”

“NS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마 147 정도 나왔을 겁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올은 의아해했다.

“147이면, 나랑 적합이 뜰 수도 있겠네?”

그 말에 약간 묘한 침묵이 흘렀다.

“풉!”

비르고가 마시고 있던 맥주를 뱉어내며 야단스레 소파 팔걸이를 마구 쳐댔다.

“데제 하고 적합까지 뜨면 걘 진짜 반성 좀 해야 해요, 전생에 행성이라도 몇 개 말아먹은 거라니까?”

낄낄거리다가 아리에스의 군홧발에 차였는데도 웃음을 그치질 못하는 그를 보며 쯧쯧, 올이 혀를 차댔다.

“예, 뭐. 147이면 적합 나올 가능성이 크긴 합니다. 채혈이라도 준비할까요?”

“아니.”

데제는 웃느라 영 힘들어 보이는 비르고의 입에 다 마신 맥주 캔을 쑤셔 넣어 대신 그치게 해준 다음, 씩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내가 할 건데.”

“데제, 혹시 소위가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올의 물음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왜, 감사에서 뭐 걸린 거라도 있어? 조용히 잘 지낸다며?”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대화가 살짝 겉돈다.

“혹시 소위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럴걸?”

올은 에라블이 참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르고의 말대로 전생에 행성을 몇 개 말아먹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여자랑 안 하면 보통 뭐하고 시간을 보내지?”

데제는 문득 물었다.

“왜 안 해요?”

“다짜고짜 눕힐 순 없잖아. 기절할 텐데.”

설명을 해줘 봤지만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 얼굴들이다. 그중 아리에스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제께서 기절하시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

“됐으니까. 안 하면 뭐하냐고.”

다들 말없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긴 이것들이 알 리가 있나.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더니, 뜬금없이 아리에스가 손을 든다.

“버밀리언이 언제까지 살아있나 내기할 사람? 난 한 달에 1,000cp.”

“적합 뜰지도 모르니까 죽이진 않으실걸?”

“그럼 언제까지 살아만 있나로 변경, 한 달 1,000cp.”

“난 1,200, 한 달 보름.”

내깃거리가 생긴 것에 신난 개들이 순식간에 들러붙었다. 내기 금액은 순식간에 5천cp까지 올라갔다.

데제는 그 병X 같은 꼴을 보다가 일주일에 1만cp를 걸었고, 수뇌부 모두가 야유했다.

“마음에 드신다면서요.”

“맞습니다, 데제. 걔가 여태 일한 게 있는데. 인간적으로 한 달 보름은 주셔야죠.”

“새끼가, 또 개수작이네. 데제,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쓰시죠? 딱 한 달! 일주일은 애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들은 한참을 시시덕대고 떠들며 웃어댔다.

아무도 에라블 버밀리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그저 한때의 즐거움, 그게 전부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떤 변화를 기대하기에 그들은 지나치게 오래되어 케케묵은 존재들이었다.

* * *

에라블은 그날 오후, 개들의 심부름을 차례로 해결하고 약간의 추가 수입을 올린 뒤 창고로 향했다.

재고 파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추가 수입으로 영화 티켓과 팝콘 세트, 핫도그까지 구매하고도 돈이 남았으니까.

“안녕하십니까, 버밀리언 소위님.”

“예, 중사님. 점심은 드셨어요?”

에라블은 반짝 웃었다.

군 생활 2년 만에 위장용 미소는 이제 습관이 되었다.

그래도 버밀리언이라고 성으로 불리니 문명 세계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물론 착각이지만.

어차피 이 인간들도 다 똑같은 ‘개들’에 불과했다.

그녀는 대기 중인 소대원들에게 업무 목표를 브리핑했다.

“현 시간부로 재고 파악에 들어갑니다. 앞으로 3주 내에 장부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그다지 여유롭지 않습니다.”

“3주 말이십니까….”

“예. 각 분대별로 지정된 항목의 최소 1섹터 이상을 일일 목표로 잡고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쓸모가 없어지면 처분될 입장이라 에라블은 업무 스케줄에 조금 예민했다.

“업무 목표 미달성 시 야근입니다. 보고서가 미흡해도 야근입니다.”

소대원들의 표정이 아주 썩었다. 에라블은 동료 직원들에게 격려를 보낼 필요성을 느꼈다.

“꼼꼼히 차분하게 제시간에 제출하고 정시에 퇴근합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잘하면 될지도 모릅니다!”

“왜 맨날 똑같은 소리세요….”

인생이 다 그렇다. 그래서 오늘 영화도 심야 타임을 예매해 놨다.

에라블은 우는소릴 하는 소대원들과 함께 창고 업무에 들어갔다.

당연히 나도 야근은 싫다. 좋아하면 변태지, 그게.

정말이지… 퇴근 전까지만 해도 에라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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