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죄송합니다만, 대위님. 저 출근 중입니다. 오늘 사단장님께서 보고 받으시는 날인데 늦으면 언짢아하시지 않겠습니까?”
에라블은 이 미친놈과 더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출근 15분 전이다.
“…너무해, 진짜. 데제 얘기 그만하라니까! 정말 죽어버렸잖아!”
비르고는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며 울상을 했다.
“죄송합니다. 옷은 주시면 오후까지 수선해 놓겠습니다.”
“당장 여기서 벗을까?”
“예, 주십시오. 13분 남았습니다.”
“13분이면 한 번은 할 수 있는데.”
애걔, 고작 13분?
“그 표정은 뭐야, 나 기분 나쁜데.”
“이것은 기다리고 계실 사단장님을 매우 걱정하는 표정입니다.”
“…정말 너무해, 자꾸만 데제 얘기. 에라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하자, 내가 진짜 죽여줄게.”
씨X, 살인 예고 같은 거 하지 마라, 미친놈아. 유서에 뭐라고 썼는지 되새기게 된다고.
“대위님, 저 진짜 빨리 가봐야 합니다. 사단장님께서 보고서가 늦은 이유에 관해서 물어보시면 전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대위님 얘기를….”
“아, 알았으니까, 좀 그만해!!”
* * *
“고마워요, 에라블.”
데제브 아브가니스는 보고서와 커피를 받으며 다정하게 눈웃음을 쳤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에라블은 뒷짐 진 손을 꽉 부여잡아야 했다.
‘진짜 개들이 낫지….’
이 남자의 이런 웃음을 보기 위해서라면 커피가 아니라 전 재산을 내놓겠단 사람이 줄을 설 테지만.
그 사람들도 내놓아야 할 게 제 목숨이란 사실을 안다면 생각을 달리할 것이다.
측정 불가 현신 시그눔 접속자, 신체 레벨은 13.
이 세계의 최종 보스는 오늘도 미모가 굉장하셨다.
새카만 머리칼에 크림색 피부, 완벽한 콧대, 나른하게 웃는 눈매엔 붉은빛이 감돈다. 입술 또한 그렇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 얼굴을 볼 때마다 에라블은 자연히 그가 13레벨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41사단 최고 기밀이란 사실도, 연쇄적으로 들키면 살해당한다는 사실까지도 같이 떠올랐다.
들키면 수송형 대정령 몇 기 따윈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100퍼센트 살해당한다.
백작가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 깔끔하게 한 세트로 정리당하겠지, 생각하며 에라블은 성실하게 웃어 보였다.
“잘로 제 크루아상이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데제브 아브가니스는 그 제과 브랜드를 싫어한다. 밍밍하다고. 예상대로 그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음, 그보다는 2채널 게이트를 확인해 주시겠어요?”
“확인 후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에라블은 앉아 랩탑을 연 후, 바짓단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식은땀이 밴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거 잠깐 몇 마디 나눴다고…, 하. 진짜, 그럴 수 있지.’
아직 2년, 저 남자에게 익숙해지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최소 이만 년은 지나야 익숙해질 것 같았다. 그전에 죽어서 뼛가루도 안 남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에라블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굳은 손마디를 애써 이완시켰다.
저 남자가 지금 부관실에 있지 않았다면 정말 좋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28일, 매달 돌아오는 정례회의였다.
현재 부관실에 수뇌부 전체가 소집되어 있었다. 그걸 왜 하필이면 여기서 하는진 모르겠다.
아마 고급 원두와 비싼 제과 때문일 수 있다.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고.
“야, 커피.”
“나도.”
에라블은 빠르게 주문을 처리하곤, 다시 빠르게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아, 난 홍차.”
“담배 어딨냐?”
“소위야, 여기 뒀던 서류….”
그렇게 자잘한 일을 몇 번 더 하고 나서야 에라블은 마침내 제 업무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주머니가 금세 두둑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 해야 할 일이….’
에라블은 무섭게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심부름은 심부름이고. 본업엔 목숨이 달려 있었으므로 집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늘은 제국의 2워프 채널을 확인해야 했고, 비품 청구서도 처리해야 했으며, 새로 산적된 물량을 체크한 뒤, 조금이라도 창고 정리를 진척시켜야 했다.
시각을 다퉈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야근이 다가오고야 만다.
‘청구서가 23개…,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많아.’
여긴 보고되어 있지 않은 특수 부대를 수 개나 운용하고 있었다. 사단의 주 임무는 테라포밍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불법 개조된 무기 밀매와 청부살인, 용병질, 무허가 행성 개발 등등이다.
높은 비율의 군인들이 그런 계통에서 스카우트되었다. 애초에 선후 관계가 그쪽부터다.
그러니 제국에 충성심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수십 개의 군법을 어기고 있었고, 그중 몇 개는 걸리면 부대 전체가 말소될 반역죄에 해당했지만, 안타깝게도 신경 쓰는 개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거 써봤어요?”
“뭐, D9? 괜찮던데? 포탄 에너지도 좀 덜 먹고. 4레벨 이하는 잘 잡더라고. 근데 과부하가 좀 있어.”
입에서 필터를 뺀 개들이 부관실 여기저기에 방만하게 늘어져 있었다.
저러고 떠드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인생 망했다는 자각이 십분 든다.
“어차피 시제품이니까요.”
“어디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
“노버 연방에요. 연구소 애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죠.”
“그래도 확인은 해 봐. 네가 한 번 가보면 되겠네.”
에라블은 위장약을 입속에 밀어 넣으며 빠르게 서류를 처리해나갔다.
“내가 왜요? 난 이따가 게일 후작령에 가야 해요.”
“갑자기?”
“예, 아티팩트 나올 시기잖아요.”
“니 거냐?”
“내가 들고 오면 내 거지. 뭔데, 준법 시민인 척이세요.”
언제라도 들고 튈 수 있게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냐면 저러고 서로 시비를 걸다가 곧 머리통을 깨며 드잡이질을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아, 좀 들렀다 가! 지난번엔 내가 갔잖아! 콜리시오에서 법령 위반이라고 또 컨테이너째로 다 압수해버렸단 말이야! 정식 루트 아니면 안 돌려주겠다는데, 씨X, 누가 봐도 지들을 처먹고 꿀꺽하려는 거지.”
“내 알바에요? 손댄 사람이 마저 처리하세요.”
“아. 귀찮다고!”
“어쩌라고.”
데제는 개들이 싸우면 재밌어하며 구경하기 때문에 상황이 전혀 통제되질 않는다.
에라블은 서류를 잘 챙김과 동시에 머리가 찡하도록 단 커피를 뱃속에 들이부으며, 반 소환한 정령의 코드를 열고 랩탑과 연결했다.
계약자의 몸을 중심 단자로 사용하며 통칭 미로, ST-20의 정보가 빠른 속도로 랩탑으로 넘어간다. 그녀는 귓바퀴 뒤쪽에 코드를 꽂고, 뻐근한 뒷목을 꽉꽉 주물렀다.
살짝 이명이 들린다.
인식표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상태 안 좋은데.’
컨디션이 떨어지면서 노이즈가 심해지고 있었다. 에라블은 서랍을 열어 약통에서 위장약에 이어 안정제도 한 알 꺼내 먹었다.
또 커피를 들이마시며 스크린 위로 떠 오른 자료들을 읽었다.
사실 조금 마음이 급했다. 왜냐면 오늘은 로맨틱 4가 개봉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려면 어떻게든 심야 전까지만이라도 퇴근을 해야 했다.
“지랄 말고 알아서 하세요. 야, 에라블. 이따 점심시간에 담배 좀 사 와.”
“예, 24cp입니다.”
에라블은 랩탑을 쳐다보며 자동응답기처럼 대꾸했다.
“뭐야? 무슨 가격이야?”
“제가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이거 횡포 아니야? 뭔 통보도 없이 툭하면 가격이 올라?”
“독과점이 다 그렇습니다.”
덤덤한 그녀의 대답에 누군가 풋, 하고 뭘 내뱉는 소릴 내며 웃었다. 자기 바지에 내뱉은 거면 좋겠다. 그냥 희망 사항이다.
“놀고 있네.”
일하고 있다.
“씨X, 야, 올 때 보관소도 좀 다녀와. 빈 박스 20짜리로 하나 가져와.”
“보안 등급에 걸려있어서 전 보관소 못 들어갑니다.”
“새삼?”
“규정상 그렇습니다.”
“그래서 못한다고?”
목소리가 낮아진다. 수틀리면 항상 저딴 식이지. 이 공장식 붕어빵 같은 살인마들.
에라블은 랩탑에 몇 개의 검색 키워드를 추가 입력하며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위험수당까지 200cp에 모시겠습니다.”
“날강도야? 지인 D.C는? 없어?”
“예, 죄송합니다.”
지인은 개뿔. 타인도 싫고, 아주 그냥 동시대 사람인 게 싫다.
어디 보자, 어떻게 잘하면 야근을 안 해도 될 것도 같은데. 아, 품목이 늘었잖아? 이건 마약류인데. 취미로 마약을 시작한 인간이 있나 보다. 뭐, 평범한 취미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부하 직원에게 시비 트는 것보다 훨씬 권장할만한 취미기도 했다.
이 부대에서 약 좀 한다고 신체 이상이 생길만한 나약한 인간은 에라블 본인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나약한 인간은 오늘 심야 전에 꼭 퇴근하고 싶다.
“장사 진짜 뭣 같이 하네. 200cp 콜.”
“내일 13시까지 신속하게 모시겠습니다.”
에라블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코드를 차례로 귓바퀴 뒤에 꽂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