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 세계는 흑백 논리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데제브 아브가니스가 모든 것 위에 존재한다.
“음.”
이세계의 재앙신이 고민되는 얼굴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에라블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건…, 유용하겠네요. 산책 삼아 나온 건데 재밌는 걸 주웠네. 영애, 군에 입대하겠습니까?”
* * *
“그렇게 됐어요.”
수화기 너머로 백작이 턱, 뒷덜미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새끼도 안 보낸 군대를 지금….]
에라블은 전화기를 슬쩍 귀에서 떨어트렸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백작이 곧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거기가 어떤 곳인 줄이나 알고!! 이, 정신 나간!]
슬쩍 전화기 가까이 갔던 에라블은 다시 거리를 벌렸다. 아직도 지르고 있다. 좀 더 기다리다가 살짝 음량이 작아진 틈을 타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그러다 혈압 오겠네. 진정 좀, 아니, 왜 자꾸 소리를…, 아, 알았어요. 그럼 진정하지 말, 윽!”
실패였다. 고막만 터질 뻔했다.
[제정신인 게냐!! 사흘 만에 전화를 해서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야!!]
“좀, 그렇긴 하죠.”
백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블은 다시 냉큼 수화기를 귓바퀴에서 떼어냈다.
백작이 다시 그녀의 정신 상태에 대해 몹시 큰 소리로 의문을 제기했다.
“나 제정신이에요. 그니까 제발 진정 좀, 아니, 왜긴. 그냥 그렇게 됐다니까.”
누가 들어도 기가 막혀 할 만한 단순 불명확한 설명이었지만, 진짜 더 할 말도 없었다.
뭣보다 지금 내 머리도 정리가 안 됐다.
에라블은 한숨을 삼켰다.
더는 미룰 수가 없어 전화하긴 했는데, 진짜 나도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거기서 그렇게 들킬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잘난 그들의 껍데기가 문제가 될 줄, 취향 불문하고 누구나 한두 번쯤은 쳐다보기 마련인 그들을 신년 축제 기간 내내 너무 완벽하게 피해 다닌 게 문제가 될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왜 문제가 됐지?
왜 그런 하찮은 일까지 하나하나 다 체크를 하는 거냐고, 진짜 싸이코들이다.
“처음엔 관심 끌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잖아.”
그날 뒤집어져 있는 드레스를 에라블 앞에 던져주며 비르고 하그가 낄낄 웃어댔다.
비르고 하그, 데제브 아브가니스의 지시로 1,120명을 산채로 태워 죽인 미친놈이다.
놈은 그 드레스를 정원에서 주워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1층 창문 넘으면서 자빠지는 인간은 처음 봤다고 칭찬까지 해댔다.
그러니까 애초에 연회장에서부터 뒤를 밟힌 것이다.
‘10초 만에 탈피 수준으로 옷 갈아입는 것도 다들 봤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진짜 죽고 싶어졌지만, 어쨌거나 살아남았다.
살아는 남았다.
인식표를 삽입 받게 되긴 했지만….
“진짜 괜찮다니까요.”
에라블은 섬뜩한 뒷목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는 아리에스 시더가 개발한 이 끔찍한 물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주입시 고문에 가까운 통증을 일으키는 이 끔찍한 물건은 위치 추적을 비롯한 여러 추가 기능이 붙어있는 고성능 체내형 플라즈마 폭탄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나쁘지만은 않다. 반대로 유용하다는 방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제작 단가가 비싼 만큼, 인식표를 넣어 관리하는 인간들은 개들도 잘 안 건드린다.
하루에도 몇 구씩 사망자를 내는 살인마들 사이에서 이건 정말 굉장한 기능이었다.
[괜찮기는, 대체! 군대가 어떤 곳인데! 끊임없이 포식성 괴수를 상대해야 하는 곳엘 네가 왜 간다는 게야!]
“에이, 41사단은 괴수 상대 안 하지. 거긴 주로 테라포밍만….”
[시끄럽다!!]
아, 내 달팽이관.
말하기 무섭게 또 들려오는 고성에 에라블은 다시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내며 투덜거렸다.
[집에나 가!!]
아니, 나도 가고 싶지. 그나저나 이 인식표 도청도 될 텐데.
“휴가받으면 갈게요, 집에. 그니까 백작령에요. 아니, 진짜 괴수하고 안 싸운다니까?”
백작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내가 괴수랑 왜 싸워요. 사단 전체가 분쟁 지역에 파견을 나가도 나는 안 싸우지. 누가 신체 2레벨한테 총을 쥐여줘 아깝…. 아, 아니. 소리 좀 지르지 말고. 그냥 취직한 거라니까.”
에라블은 한참을 더 괜찮다고 백작을 설득해야 했다.
백작은 당연히 설득당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이 양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아브가니스가 사단장으로 있는 부대지? 평판 좋은 젊은이라 안심은 된다만.]
“그럼 됐네.”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젊은 지휘관, 데제브 아브가니스.
대 아브가니스 후작가의 직계이며, 혈통만큼이나 능력 또한 출중해 향후 이백여 년 이내에 사령관 자리에 오를 유력한 젊은 후보자.
세간의 평가였다.
다 신의 농간이다. 개인적으로 입대하게 된 것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걱정 많은 양부모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선 큰 도움이 되는 평가이기도 했다.
“아랫사람한테 되게 잘해준대요. 힘든 일도 잘 안 시키고.”
백작은 한참 침묵하다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라도 자주 하거라.]
“알겠어요.”
이 단순한 대화에는 서로에게 다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두 사람은 사흘 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소집 시간 다 됐어요.”
[나 원, 별…!]
백작이 또 벌컥 화를 내기 전에 에라블은 덧붙였다.
“백작님도 그만 나가봐요. 나가서 연애라도 좀 하라고요. 일단 물 좋은 게이바에 가서, 산적같이 우람한 남자나 하나 물어와요. 내 걱정은 그만하고.”
[넌, 하여튼!]
“끊어요. 술 적당히 먹고, 또 길바닥에서 쓰러져 자지 말고요. 청결은 필수인 거 알죠. 다 늙은 양아빠 병수발 들게 하지 마시라고.”
[야!!]
에라블은 또 교양 없이 소리 지르는 백작의 전화를 툭 꺼버렸다. 더 할 말도 없었다. 얘기 길어져 봐야 걱정거리만 더 늘지.
“…으.”
그녀는 욱신대는 몸을 작게 웅크렸다.
엊그제 밤엔 치솟던 아드레날린 덕분에 다치고 아픈 줄도 몰랐었다.
창문 넘는다고 넘어지고, 야밤에 정신없이 숲길 내달린 것도 모자라 살인마들 손아귀에 잡아당겨지고 엎어지고 돌바닥을 구른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여기에 인식표까지 맞은 뒤다.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얼마나 아픈지 인식표 맞기 전후의 기억이 아예 없었다.
몇 시간 가까이 필름이 아예 나가버린 것이다.
‘…내가 진짜, 집엔 왜 가겠다고 설쳐서.’
그냥 하던 대로 시골에 조용히 처박혀 살 것을.
진통제라도 한 알 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도에 있는 백작가 사택은 거의 빈집이나 다름없어서 뭐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다.
에라블은 손가락 끝으로 아직 할부가 남은 전화기를 조심스럽게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짜로 소집 시간 다 됐다.
월급쟁이의 기본은 근무 시간 엄수겠지. 죽기 싫으면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근무 성적에 목숨이 걸려있었으니까.
“…….”
몸을 일으킨 에라블은 잠시 물끄러미, 탁자 위에 가지런히 개어 놓은 진녹색 체육복과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야, 이걸 진짜 어떻게 입었냐.”
내가 절박하긴 했구나.
이 나이에 중학생 체육복을 낑겨 입었다니. 정신적 충격은 둘째치고 일단 작다.
세상에. 진짜 어떻게 입었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아주 못 할 짓이 없구만.
이건 뭐 쫄쫄이 저리 가라인데, 이 꼴을 하고 그 남자들 앞에서 뒹굴었다 이거지?
“…….”
혹시 늘어난 건 아니겠지?
손으로 살살 더듬어 주름을 펴고, 소매와 목둘레를 확인했다. 다행히 체육복은 늘어난 곳 없이 멀쩡했다.
확인을 마친 에라블은 전부 다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어버렸다. ‘2-1 민지우’ 이름표가 붙은 체육복은 또 그렇게 상자 속에 닫혔다.
다시 꺼낼 날이 있을 거야, 뭐 언제고 돌아갈 테니까.
‘…이번에는 8년이 걸렸지.’
그럼 앞으로 다시 8년, 아니면 거기서 몇 년쯤 더. 버티며 어떻게든 살아가면 된다.
그러면 돌아갈 기회가 다시 와줄지도 모른다.
‘잘하면 돼…, 잘.’
에라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세계 8년.
신원 불명의 무국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현실을 배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세계의 흐름은커녕 벌어 먹고살 변변한 직업 하나 구하기도 쉽지 않은 신세였다.
에라블은 지난 8년간 말도 안 통하는 이계에서 무국적자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 주제 파악은 기본이었다.
주제넘게 원작의 흐름은 무슨. 이 유혈 낭자한 세계에서 자살 시도나 다름없는 짓이다.
심지어 백작가에 입적까지 돼 있는 몸이니 집단 자살쯤 되겠지.
헬하운드, 이 이야기는 제목과 달리 개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 주인에 관한 이야기다.
데제브 아브가니스.
헬하운드에서 헬을 맡은 그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단위가 달랐다. 피해자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선 행정기관의 자료가 필요할 거다.
수틀리면 행성 한두 개쯤 식전에 가뿐히 말아먹는 괴물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원작에 로맨스는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온갖 공을 들여 세심하게 망가트린 피해자이니, 주인수가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 하나 믿고 설쳐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