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화 (1/132)

01.

지방 백작가의 양녀, 23세, 에라블 버밀리언.

그녀는 속으로 초를 세고 있었다.

신년축제 기간.

홀은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좋아, 잘 묻어가고 있어. 아무도 날 보지 않아.’

스스로 다독이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끈끈히 식은땀이 고인다.

‘1,286… 1,285….’

지뢰는 연회장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아름다운의 드레스와 달콤한 와인 향, 그리고 우아한 음악 소리 사이사이에.

여기가 바로 지뢰밭이다.

밟으면 죽는다. 최소 인생 박살이었다.

이미 반쯤 박살 나 있는데, 이번에는 완전 가루가 돼버릴 거라고.

그러니까 1,284초 안에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여기서 조용히 빠져나가야만 한다.

어려운 일이었다.

에라블은 저들의 감각 반경이 수백 킬로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백 킬로다. 말이 쉽지…, 백 미터만 떨어져도 시야가 가물가물한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종의 괴물들이 지금 홀 곳곳에 퍼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러워야 했다. 자연스럽게 묻어 나가야만 한다.

내 하찮은 존재 따윈 아무도 모르게, 그저 자연스럽게.

‘1,244….’

장소도 타이밍도 너무나 공교로웠다.

솔직히 악의적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1,243… 1,242….’

지뢰 하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에라블은 자연스럽게 몸을 틀며,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집어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1,221… 1,220….’

초 단위로 줄어드는 숫자가 긴장감에 매몰되지 않게 정신머리를 붙잡아 주고 있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만 해.’

에라블 버밀리언.

그녀는 현재 책에 빙의가 된 상태였다.

사실 빙의라고 하기보단 이동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 하면, 설정상 약간 변화가 있긴 했지만 이 몸은 원래 내 몸이고, 이름도 그냥 여기 살면서 얻은 내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소설 속 등장인물도 아니라는 뜻이다.

뭐, 그런 건 어쨌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원작이 영 좋지 못한 이야기란 사실이었다.

「헬하운드」

제목 그대로 개 지옥 같은 살육과 능욕, 피폐….

그렇다. 여긴 폭력적인데다 19금이기까지 한 고수위 소설 속 세계였다.

총기, 대정령, 신화에 행성 SF가 섞인. 짬뽕에 잡탕이 추가된 세계관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 소설의 유일한 장점은 미모의 남자들이 많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다.

심지어 그 하나뿐인 장점조차 미모와 사이코 지수가 비례한다.

‘생각해보니 장점이 아니네.’

사이코가 아주 득시글거린다.

‘아, 하나가 더 있지.’

바로 이 책이 BL이라는 것.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사랑과 정신병을 이음동이어쯤으로 여기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란 사실을 감안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장점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치명적인 맹점이 존재한다.

그들의 연애가 내 생명을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다시 생명 보존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기왕 떨어질 거 최소한 인권이 보장되는 곳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성년자 주제에 19금 피폐물을 읽은 죄가 크다. 다 호기심 때문이었지. 난 밝고 건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청소년이었는데.

이게 다 무분별하게 19금 파일을 뿌린 사람들이 잘못이다.

‘나는 죄가 없다고. 이렇게 빅엿을 먹을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어.’

에라블은 억울했다.

살인마들이 주요 등장인물인 이 소설 속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뿐이었고, 그래서 지난 8년 동안 철저하게 그렇게 살아왔다.

지난 8년간.

그녀는 이 황궁이 있는 제도로 오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원작 소설의 주인수는 이 제국의 13번째 황자였고, 자연히 소설의 주요 무대 중 하나는 바로 황궁이 있는 이 제도.

걸핏하면 수십 명씩 사람이 죽어대는 소설 속 세계에서 그냥 무사히 살고 싶었던 에라블은 죽자고 제도를 피했다.

양아버지 뒷목 잡게 만들며 아카데미조차 먼 외행성으로 갔었는데….

그랬는데, 지금 여기에 있지. 그것도 등장인물 모두와 함께.

그러니까 왜 하필 오늘 여기냐고.

그 사실이 못내 찝찝했다.

하필 모든 등장인물이 모이는 신년제, 또 하필 이 제도, 그것도 황궁 내부.

신에게 수시로 엿 먹는 삶을 살고 있는 에라블은 설마 설마 하면서도 그 사실이 못내 찝찝했다.

만약 주인공인 그가 부재중이지만 않았다면 그냥 포기해 버렸을 거다.

‘1,018….’

에라블을 끊임없이 걸음을 뗐다.

그리고 마침내, 1,000여 초를 남기고 연회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곧장 복도를 질러갔다.

전방 십여 미터 앞 미묘하게 엉킨 그림자가 보인다.

반대쪽 복도로 조용히 걸음을 틀었다.

그 덕에 다시 80여 초가 흘렀다. 마음이 급해졌다.

‘919, 918….’

초는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성 휴게실에 들러 100여 초를 소비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716초.

여기서부턴 연회와는 상관없는 구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혹시라도 걸리면 휴게실에서 나와 길을 잃었다고 할 계획이다.

초가 줄어들수록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태연한 척 걸음을 늦추기 위해 애쓰며 에라블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요 며칠 신년 축제 기간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황궁에 출입했다. 루트를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짓거리를 한 번만 더 하면 수명이 십 년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그녀는 미리 봐두었던 사용인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과 홀 담당인 방 주인은 앞으로 최소한 몇 시간 내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잠입하여 업무 교대 시간까지 숙지했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드레스 지퍼를 내렸다.

컴컴한 남의 방에서 옷을 벗는 기분이란…, 정말이지, 끔찍했다.

‘7, 702….’

초를 세며 빠르게 드레스를 걷어찼다.

우아한 드레스 자락이 떨어지며 진녹색 중학교 체육복 바지를 입은 다리가 드러났다.

허리춤엔 체육복 윗도리와 샛노란 운동화까지 세트로 매여 있었다.

사실 이럴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에라블은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수시로 신에게 엿 먹는 삶엔 만에 하나란 결코 작은 확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오늘 여기인 것부터가….

다시 고개를 드는 찝찝함을 애써 외면하며, 그녀는 허리춤에 묶어놨던 체육복 상의 매듭을 풀었다.

운동화를 땅에 떨어트림과 동시에 체육복을 머리에 뒤집어쓰고는 다리를 털어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던졌다.

맨발을 서둘러 운동화에 찔러넣고 상의에 양팔을 찔러넣기까지 순식간이었다.

거의 몸부림치는 속도였다. 살아생전 움직여본 적이 없는 속도다.

어두컴컴한 낯선 타인의 방,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됐다.

이제 들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벗은 드레스를 집어 창밖으로 던졌다. 조금이라도 발각이 늦길 바라면서.

‘689, 688….’

에라블은 창문에 엉덩이를 걸쳤다.

아카데미를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그녀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을 크게 밑돌았다.

고작 1층 창문을 넘다가 다리를 접질릴뻔했다.

‘5, 512….’

헐떡이며 몸을 바로 하곤 화단 너머로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자 달리기 시작했다.

‘…N…, N29, E31….’

숨이 금세 목까지 차올랐다.

아드레날린이 몸을 밀어붙인다. 여기서 걸리면 죽는다.

‘그냥 목이 잘릴 거라고.’

마음이 다급했지만, 에라블은 차분하게 핸드 스크린을 통해 좌표를 재확인했다.

비공개 제한 구역인 황궁 정원.

말만 정원이지 거대한 그린벨트에 가까운 이 숲은 황족과 허가된 몇몇을 제외하곤 전부 출입금지 제한 구역이었다.

황족 소유지가 다 그렇듯이.

‘88초, 87초….’

시간이 줄어들수록 급한 마음에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에라블은 곧 흐르는 땀도, 찢어질 것 같은 옆구리도, 다 잊어버렸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N29, E31….’

에라블은 고요히 흐르는 그 거대한 강 앞에 멈춰 섰다.

‘여기다, 여기야….’

기묘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냥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라는 걸.

그래도 마지막까지 한 번 더 좌표를 재확인한 에라블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멀리 아지랑이가 일기 시작했다.

분명 전조 증상이다.

‘곧, 열린다. 곧…!’

뒤로 천천히 물러서며 도약을 준비했다.

‘7, 6, 5….’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눈은 오직 수면 위만을 노려보았다. 틈이 열리는 수면 위를.

‘3, 2…!’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 한순간!

‘……!!’

그 순간에 발이 닿는다.

발끝이…, 닿았다. 수면 위, 옅은 아지랑이 치듯 일그러진 그 공간에 발등이 잠겼다.

에라블은 벅차오르는 환희를 느꼈다. 발끝부터 점차 투명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균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돌아갈 수 있어, 집에…, 돌아간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