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94화 (외전 완결) (94/94)

<5>

이튿날, 델시아와 에드윈은 마차를 타고 실내 극장으로 향했다. 웬만해서는 겨울에 외출하지 않는 델시아로서는 상당히 큰 결심을 한 것이었다. 길을 달리던 마차가 실내 극장 앞에 멈춰 섰다. 델시아는 도톰한 외투를 잘 여미고는 에드윈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실내 극장은 그 크기가 굉장했다. 극장 옆에 있는 다른 건물들이 작아 보일 정도였다. 델시아는 한창 인기몰이 중인 연극의 그림이 걸린 극장 외관을 감상하다가 그 안으로 향했다.

“켈리안 후작의 말로는 낭만적인 연극이래요.”

“낭만적인 연극……?”

“네. 운명으로 이어진 연인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진다는 내용이라더라고요.”

델시아는 일전에 보니타와 서로의 취향을 공유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드윈이 티켓을 구매하러 간 사이, 델시아는 연극 공연의 팸플릿을 유심히 살폈다.

‘운명적 사랑! 알라미오와 비올레타의 이야기! 「영원의 모순」’

귀족 영애와 부인들을 타깃으로 한 연극인 듯했다.

“델시아, 표 끊었어요. 팸플릿을 보고 있었어요?”

“네. 운명적 사랑이라네요.”

“그래요? 그런데 제목은 영원의 모순이라니. 어딘가 슬프게 느껴지네요.”

에드윈의 말에 델시아가 살짝 미소 지었다. 이내 공연 홀로 들어간 에드윈과 델시아는 자리에 앉아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를 몇 분. 공연이 시작하려는 낌새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공연의 막이 올랐다.

“운명……. 내게도 그런 게 찾아올까? 너무 늦지 않게 찾아온다면 좋으련만…….”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주인공 비올레타가 눈물을 흘리며 독백하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됐다.

에드윈은 연극보다도, 연극에 집중하는 델시아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 비올레타! 나의 마지막 연인, 나의 마지막 사랑! 영원히 나와 함께한다고 맹세해 주오! 영원히 나와 사랑을 속삭인다고 말해 주오!”

“나의 알라미오…….”

어느새 연극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에 따라 연극을 감상하는 델시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비올레타와 알라미오가 그간 쌓인 오해를 풀고 사랑을 확인하는 입맞춤을 나누는 순간, 델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주인공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이들답게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금세 딛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그들이 위기의 순간에 처할 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됐다.

“나의 알라미오, 나는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비올레타는 알라미오의 얼굴을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별안간 피를 토했다. 비올레타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자 관람석이 술렁거렸다.

“비올레타……. 비올레타, 당신……!”

“아아……. 미안해요, 알라미오. 정말 미안해요.”

비올레타는 손수건을 쥔 채 알라미오의 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뛰어갔다. 델시아는 멍하니 장면들을 응시했다.

“나의 알라미오…….”

“오, 비올레타. 왜 이리 몸이 상했소. 왜 이리도 야윈 거요…….”

어느덧 연극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비올레타는 꽃이 잔뜩 든 투명한 유리관에 누워 알라미오와 인사를 나눴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알라미오. 나의 알라미오.”

“이대로 당신을 보낼 수는 없어, 비올레타……. 영원히 함께하기로 맹세하지 않았소! 영원히 나와 사랑을 속삭인다고 하지 않았소!”

“아아, 나의 알라미오. 사랑에 영원이란 건 없어요. 오, 나의 알라미오, 내가 없이도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그 말을 끝으로 비올레타는 눈을 감았다. 알라미오는 눈을 부릅뜬 채 비올레타의 곁을 지키다가 그녀의 호흡이 끊기는 순간, 그녀를 따라 하나의 영혼이 되었다. 영혼으로서 만나게 된 비올레타와 알라미오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아, 죽어서야만 영원을 맹세할 수 있다니……. 너무나 얄궂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당신을 사랑하오. 영원히 사랑하오, 비올레타.”

이윽고 연극이 끝났다. 박수갈채가 홀을 가득 채웠다. 관객들을 따라 박수를 델시아는 에드윈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정말 슬프고도 처절하며 낭만적인 이야기였다. 그녀는 보니타가 이 연극에 대해서 낭만적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있었다.

“제목과 어울리는 결말이네요.”

에드윈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라미오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비올레타와 그런 그녀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 알라미오의 이야기는 어딘가 익숙했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델시아는 쉬이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 내며 에드윈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향했다.

***

예약해 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에드윈과 델시아가 마차에 올랐다. 어느새 하늘에 달이 걸렸다. 에드윈의 휴가는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에드윈은 델시아에게 제 어깨를 내주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에드윈.”

“네.”

“제가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할 수 있어요. 저는 죽어서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델시아.”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서로 잊을 수도 있는 거고요.”

델시아의 말에 에드윈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던 에드윈이 고개를 찬찬히 돌려 델시아와 눈을 맞췄다.

“델시아.”

에드윈은 퍽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반드시, 반드시 당신을 기억해 낼 거예요.”

“에드윈…….”

“반드시 그렇게 할 거예요.”

에드윈의 결연한 말에 그의 허리춤에 있던 파시오가 코웃음 쳤다.

― 흥. 입만 살아서는,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 대는구나. 다음에 또 그랬다가는 내 선에서 네놈을 처리할 테다.

“…….”

파시오가 난데없이 끼어들자 에드윈은 가만히 성검을 노려봤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공작저로 들어섰다. 저택 문 앞에 멈춰 선 마차에서 에드윈이 먼저 내려 델시아를 도왔다.

그렇게 저택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에드윈을 불렀다.

“……주인님!”

테오의 목소리가 저택 안에서 들리자 에드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오는 휴가를 보내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테오와 오랜 시간 함께해서 생긴 환청인가 싶어 모른 체하려는데 테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주인님!”

이번에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테오의 모습까지 보였다. 테오는 반듯하게 차려입은 채 저택 안에서부터 에드윈을 마중 나왔다.

“……뭐지?”

“뭐기는요! 일을 안 하면 좀이 쑤셔서 휴가 반납하고 출근한 유능한 집사죠!”

“휴가를 반납해?”

“네!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부모님께서는 사고 쳐서 쫓겨난 거 아니냐고 걱정하시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저를 보고 휴가도 제대로 못 사용할 정도로 바쁜 월급쟁이는 안 될 거라고 이를 갈더라니까요?”

“…….”

에드윈은 황당한 눈으로 테오를 쳐다봤다.

“그래서 휴가를 반납하기로 하고,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온 거지요. 하, 이 결단력! 이 결단력 역시 제가 유능하다는 증거라고요.”

“……발레인.”

에드윈은 제 호위 기사인 발레인을 불렀다.

“예.”

“아무래도 테오가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것 같군. 종이 한 장 없는 빈방에 넣어 둬라.”

“예.”

에드윈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발레인이 테오의 뒷덜미를 잡고는 그대로 끌고 갔다.

“아, 아니! 주, 주인님……! 일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업무라도 보게 해 주시라고요!”

“휴가를 반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럼 우리는 휴가가 끝난 후에 집무실에서 만나도록 하지.”

“자, 잠시만요! 주, 주인님!”

테오의 외침은 이내 잦아들었다. 휴가를 반납하고 공작저로 한달음에 달려올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유능한 집사에게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니까. 에드윈은 델시아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오랜만인 데다가 날이 추울 때 한 외출이라 많이 피로한 상태일 게 분명했다.

“추웠죠?”

“괜찮아요. 두껍게 입어서 그다지 안 추웠어요.”

“감기 들면 안 되는데…….”

“그 정도로 몸이 약하지는 않아요.”

“당신을 한 번 잃을 뻔한 뒤로는, 당신의 건강을 믿지 못하겠어요. 어딘가에 제가 놓친 빈틈이 있을 것 같고, 그 빈틈이 당신을 갉아먹을 것만 같고 그래요.”

에드윈이 침실 문을 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이었다. 델시아는 지금도 가끔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고는 했으니까. 델시아의 숨이 멎는 순간을 목도했을 때보다는 덜 괴로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혹여 제가 무언가를 놓쳐 델시아를 사지로 모는 데에 일조할까 봐.

그게 아니면, 너무 뒤늦게 눈치채 회복할 기회조차 놓쳐 버리고 말까 봐. 에드윈의 과잉보호는 그런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에드윈은 침실에서 델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늘 불안해요. 그래서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네요. 미안해요, 델시아.”

“자꾸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더 노력할게요. 델시아는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지내면 돼요. 제가 다 맞출 테니까요.”

“지금도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하면서 지내는걸요. 파티에서 뵈었던 귀족 부인들처럼 우아하게 말해 보기도 하고, 온실에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기도 하고요.”

에드윈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그래요, 델시아.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은 걸 해요. 아무 걱정 없이 그렇게만 해 줘요. 다른 건 제가 신경 쓸게요.”

“어린아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래요? 지금처럼 지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너무 과해도 안 좋아요.”

델시아는 바르작거리며 에드윈의 품에서 나와 그와 눈을 맞췄다. 에드윈의 회색 눈동자는 달빛을 받을 때 가장 반짝인다. 때마침 푸르른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그 빛을 받은 에드윈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건 참 황홀한 기분이었다.

“에드윈.”

“네, 델시아.”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델시아가 까치발을 들어 에드윈의 뺨에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에도 에드윈의 귓바퀴는 쉬이 달아올랐다. 델시아는 그것을 장난기 섞인 눈으로 바라보다가 도로 그의 품에 안겼다. 그와 보낼 내일이 기대됐다.

그와 함께하는 내일 역시 오늘처럼 찬란하기를. 에드윈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순간이 제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이기를. 델시아는 바라마지않았다. 그리고 에드윈 역시 델시아의 모든 삶에 제 미약한 온기나마 머물다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만할래요, 공작님 完 > .

By.[Ym]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