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델시아, 그 말은…….”
“에드윈.”
“네, 델시아.”
델시아는 제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에드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거리를 둬서야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나.
“가까이 와서 들어요.”
“하지만…….”
“어서요.”
델시아의 채근에 에드윈이 그녀의 옆으로 찬찬히 다가왔다.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틈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복잡미묘하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양 싹 가셨다.
“저는 에드윈을 다시 믿고 싶어요. 음…… 제가 당신을 다시 믿어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에드윈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제가 델시아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또다시 생기지는 않을지 숙고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방금 한 결정을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델시아.”
무너졌던 둑은 조금씩 다시 쌓아 올리면 된다. 쌓아 올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외려 전보다 더 견고하게 쌓아 올릴 기회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델시아는 벤치를 쥔 에드윈의 손등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언젠가 이 커다란 손이 저를 구했었다. 에드윈은 한없이 외로웠던 어린 저를 끌어 올렸다. 가문을 위해 힘쓰느라 바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따라 짐을 짊어진 아놀드만으로 가득하던 델시아의 세상은 에드윈을 만남으로써 성장했다.
가족들을 향한 서운함과 속상함을 숨기느라 새까맣게 물든 속을 한 델시아를 이 손이 잡았었다.
‘안녕하세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손을 내밀던 어린 시절의 에드윈을 떠올리며 델시아는 작게 웃었다. 지금은 굳은살이 가득한 그의 손을 매만지자 꼭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델시아, 날이 쌀쌀해요.”
에드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델시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에드윈을 바라봤다. 살짝 팬 뺨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델시아는 일주일 동안 제 곁을 지켜 줬다는 에드윈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 지었다.
“들어가서 같이 저녁 먹어요, 에드윈.”
에드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제 손등을 감싸는 델시아의 손을 꼭 쥐고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허리춤에 달린 파시오가 잘게 진동했다.
― 멍청한 아델리오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장난기가 가득한 투덜거림에 델시아가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그들은 손을 맞잡은 채 성내 식당으로 향했다. 델시아와 에드윈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아놀드가 탄성을 내질렀다.
“……어!”
“아놀드.”
놀란 눈으로 무어라 말하려던 아놀드를 점잖게 부른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에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신호를 보냈다. 잘 풀려서 다행이라는 듯한 의미가 담긴 신호에 델시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됐다. 에드윈은 델시아의 옆에 앉아 식사하는 내내 눈짓으로 그녀를 살폈다. 페르도 백작은 연애 초반으로 돌아간 듯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리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공작님께서는 언제쯤 수도로 올라가실 계획입니까?”
페르도 백작이 고기를 잘게 썰며 묻자 델시아에게 머무르던 에드윈의 시선이 옮겨졌다. 에드윈은 식기를 든 채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조만간 돌아갈까 합니다. 수도 저택을 꽤 오랫동안 비웠으니 곧 테오가 채근하는 서신을 보낼 겁니다.”
그 말에 페르도 백작이 테오를 떠올리며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재개되는 듯했던 식사는 누군가 식당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다시 멈췄다.
“무슨 일이지?”
페르도 백작이 묻자 사용인이 식당 밖에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 아델리오 공작님 앞으로 서신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들어와라.”
페르도 백작의 허락에 떨어지자 사용인이 식당으로 들어와 에드윈에게 서신을 건넸다. 새하얀 봉투에 쓰인 서신을 건네받은 에드윈이 봉랍에 찍힌 문양을 확인했다.
“…….”
테오로부터 보내진 서신이었다. 에드윈은 페르도 백작을 힐끗거리고는 서신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흰 종이 위에는 에드윈이 당장 수도 저택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이유를 찬찬히 읽던 에드윈이 서신을 덮어 봉투 안에 도로 넣었다.
“공작님?”
“……별거 아닙니다.”
“예?”
서신의 내용을 말한다면, 저를 돌려보내려 할 것이 분명했기에 에드윈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러나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 그리고 델시아의 집요한 시선에 한숨을 내쉬며 결국 입을 열게 됐다.
“테오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그렇다면…… 귀환을 촉구하는 내용이겠군요.”
페르도 백작의 말에 에드윈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은 해가 떨어져서 위험하니 말입니다.”
에드윈은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삼켜 내고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곁에 앉은 델시아는 그에게 괜찮다는 뜻을 내비치려 살짝 웃어 줬다. 그녀의 웃음에 에드윈은 더욱 수도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다음 날, 에드윈은 새벽같이 백작 성을 떠나 수도로 향했다. 간밤에 델시아의 배웅을 받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가 기억을 잃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려 부단히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이 중요한 순간에 그녀를 떠나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에드윈은 금방 다시 만나자는 델시아의 말을 상기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의 말대로 금방 다시 만나려면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짓고 페르도 영지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에드윈이 밀린 업무를 처리하며 서신과 선물을 보내 오는 사이, 델시아는 페르도 영지를 찾아온 보니타와 티타임을 가졌다.
“어머나, 공작님께 그런 면모가 있었군요. 다정하신 분이네요.”
“그런가요? 소후작님께서는…….”
“레이디 델시아노르,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편하게 보니타라고 불러 주세요.”
“그럼 보니타도 델시아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델시아와 보니타는 일치하는 관심사가 많았다. 자연을 좋아하는 것도, 다양한 차를 음미하길 즐기는 것도, 공상에 잠겨 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비슷했다. 오죽하면, 엘라가 꼭 닮은 자매를 보는 것 같다고 그랬겠는가.
그러는 엘라 역시 알렉스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성수를 전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고 한다. 퍽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그 이후부터 엘라는 델시아의 배려로 꽤 많은 시간을 알렉스와 보내게 됐다.
“수도에는 언제쯤 올라오신다고요?”
“조만간이요.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수도로 올라갈 생각이에요.”
“아, 이 성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죠? 정말 좋네요. 나고 자란 곳에서 올리는 결혼식이라니…….”
에드윈은 서신과 선물을 보내 오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것들과 함께 델시아를 찾아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피터와 함께 와 델시아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어느샌가 결혼 계획이 잡혔다.
일전에는 미처 올리지 못했던 결혼식을 다시금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보니타도 초대할게요. 편하게 와요.”
“정말요?”
보니타는 델시아의 권유에 진심으로 기쁜 듯 눈을 반짝였다. 또래 귀족 영애와 아버지의 압박이 아닌 마음이 닿아 친해진 것도 처음인데, 결혼식에까지 초대받게 되니 무척이나 설렜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보니타는 수도로 돌아갔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델시아는 매일 밤을 바쁘게 마무리했다. 에드윈이 보내 온 향유로 몸을 씻고 엘라의 마사지를 받으며 잠드는 일과는 꽤 좋았다. 가끔은 다이어리를 쓸 새도 없이 잠들어 곤란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가씨께서 결혼하신다니……. 믿기지 않아요.”
“그렇지? 나도 아직은 실감이 안 나.”
“정말 기적 같이 이뤄지는 거잖아요.”
엘라는 델시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웃었다.
“마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어머니께서…….”
델시아는 초상화로만 볼 수 있었던 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언젠가 제 어머니가 꿈에라도 찾아와 저를 축하해 줬으면, 저와 손을 마주 잡고 기뻐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 * *
결혼식 날 당일, 델시아는 떨리는 낯으로 제 앞을 바라봤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쥐고 심호흡한 델시아는 제 가족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죽는 날까지 서로만을 사랑하겠다는 상투적인 맹세였음에도 델시아의 눈은 글썽거렸다. 저를 바라보는 가족들을 보자 자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의 결혼식을 보러 찾아온 보니타와 클라우드, 비안나 역시 델시아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는 페르도 백작과 그의 옆에 놓인 빈 의자를 보며 델시아가 살짝 웃었다. 제 어머니가 그 자리에 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드윈과 결혼까지 당도하려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델시아는 고개를 돌려 에드윈을 바라봤다. 그의 뺨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델시아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붉어진 에드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델시아의 입맞춤에 놀란 에드윈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델시아는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생각해 왔다.
정말 운이 따른다면, 기적이 제게 주어진다면. 에드윈과 영원을 맹세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렴풋하던 생각은 어느새 현실로 변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적 역시 소리 없이 다가왔다. 늘 비껴갈 것으로 생각했던 희망이, 제 손을 놓치지 않고 꼭 잡아 준 것이다.
델시아는 멀리 돌아왔음에도 행복했다. 제가 바라던, 제가 꿈꾸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었다는 게 무척 행복했다. 델시아는 에드윈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에드윈.”
잠시 놀란 듯 눈만 동그랗게 뜨던 에드윈이 이내 델시아의 허리를 받쳤다.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해요, 델시아.”
영원히 불타오를 것처럼 열렬한 사랑이 아니어도, 소설처럼 절절하고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 서로가 원할 때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주고받는 것. 그 자체가 델시아가 바라던 사랑이었다.
델시아는 제 심장을 품은 에드윈의 가슴께를 바라봤다. 제가 심장에 눌러 담은 추억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에드윈에게 전해져 다시금 제게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심장에는 차츰차츰 더 생경한 추억과 기억들이 쌓여 가리라.
델시아는 제게 있는 심장이, 그리고 에드윈에게 있는 심장이 둘만의 추억으로 가득 차오를 때까지 그와 함께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이 바람이 그저 욕심에 그치지 않기를 델시아는 바랐다.
유달리 따뜻한 날이었다.
꼭 제 어머니 셀레나가 껴안아 주는 것처럼.
이토록 따뜻한 날, 델시아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을 맹세할 수 있었다. 너무나 기적적으로.
* * *
Epilogue.
“델시아, 이 액자는 놔두는 게…….”
“치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보기 부끄럽다고요!”
결혼식을 마치고 아델리오 공작저로 들어온 델시아는, 별채 침실에 커다랗게 걸린 액자부터 어떻게 하기로 했다. 에드윈은 당황한 얼굴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라는 단어 따위를 반복해서 말하며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그런 건 우리 둘만 알면 돼요.”
에드윈은 델시아의 말에 시무룩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장정 세 명이 커다란 액자를 떼었다. 액자가 별채 침실에서 떠나는 것을 보며 에드윈이 상심하자 델시아가 그의 등줄기를 토닥거렸다.
“오랜만에 쿠키 만들어 줄게요.”
“정말요?”
“네. 존한테 새로운 레시피를 물어봤어요.”
결혼식을 무사히 끝마친 후, 델시아는 존에게 다양한 디저트의 레시피를 물었다. 존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레시피를 손수 적어 델시아에게 건넸다. 그 눈물 젖은 레시피를 몇 번이고 눈에 담은 델시아는 에드윈을 데리고 별채 주방으로 향했다.
언제 슬픈 일이 있었냐는 듯 환한 웃음을 머금고 델시아의 곁에 서는 에드윈을 보며 테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일이 너무 많아서 델시아를 볼 수가 없다던 제 주인의 투덜거림은 당분간 듣지 않아도 될 듯했다.
테오는 안주인이 된 델시아의 취향에 맞춰 공작저 안팎이 탈바꿈하는 게 좋았다. 단조롭고 조용하던 공작저에 따스한 햇볕이 들이닥친 것만 같았다. 이 따스한 햇볕이 아주 오랫동안 공작저에 머물기를 바라며 테오는 몸을 돌렸다.
바쁜 집사는 할 일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그만할래요, 공작님 본편 (完)]
외전. Affettuoso ma non troppo (아페투오소 마 논 트로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