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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88화 (88/94)

<88>

델시아는 제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는 엘라의 눈치를 보다가 운을 뗐다.

“음…….”

“아가씨?”

“이상해.”

짤막한 대답에 엘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델시아가 그런 엘라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왜 웃어?”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

“네. 예전에 공작님의 주장이나 결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괜히 이상하다고 얼버무리시던 아가씨가 생각났어요.”

델시아가 그 말에 눈을 샐쭉 치떴다. 대체 언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인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떠올렸어?”

“조금 전에 그 모습을 다시 봤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떠올렸어요.”

델시아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렸다. 엘라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어 무어라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에드윈만을 온전히 떠올리자 간질거리는 심장을 받아들이기 싫어 대뜸 이상하다고 대답한 것이 맞았으니까.

“아가씨,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마세요. 일전에 어디선가 들었는데,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거랬어요.”

“…….”

“음, 공작님이 하셨던 모진 언행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아가씨께서 이대로 공작님을 떠나보내고 또다시 괴로워하실 걸 생각하니까…… 그게 더 마음이 아프네요.”

“엘라…….”

말을 마친 엘라가 웃으며 델시아를 바라봤다. 엘라는 제가 한 말이 델시아가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기를 바랐다.

“아가씨께서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하시길 바라요. 그러면 저는 나가 볼게요. 나가지 않고 성에 계속 있을 테니까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응, 엘라. 고마워. 그런데 그 성수는 어떻게 하려고?”

“아, 이거요?”

엘라가 제 손에 든 유리병을 내려다보고는 살짝 웃었다.

“아. 알았다. 알렉스 경한테…….”

“아, 아가씨!”

“왜? 아니야?”

알렉스의 이름만 꺼내도 당황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엘라가 귀여워 자꾸만 놀리게 됐다. 이번에도 엘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알렉스에게 성수를 줄 것이라는 델시아의 예상이 적중한 듯했다.

어깨를 으쓱거린 델시아가 엘라에게 말했다.

“알았어, 그만할게. 얼른 가 봐.”

“제가 어디 가려는 줄 아시고요?”

“글쎄. 엘라, 네가 어디를 가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엘라는 능청스럽게 말하는 제 주인을 밉지 않게 바라보다가 묵례했다.

“정말 나가 볼게요. 천천히 고민하세요!”

“응. 가 봐, 엘라.”

델시아가 엘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라가 침실을 나가고 델시아는 다시금 사색에 빠졌다. 간간이 창밖을 응시하면서 고뇌하던 델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바르게 누웠다.

머릿속에는 온통 저를 보며 웃는 에드윈과 제게 모질게 굴던 에드윈뿐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결정…….”

엘라가 말했던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혀끝에 얹어 본 델시아의 쪽빛 눈동자가 다시금 고민에 잠겨 가라앉았다.

델시아가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건, 그로부터 약 서너 시간 후였다. 어느새 푸르른 하늘에는 주황빛의 노을이 드문드문 비치고 있었다. 외투를 걸친 델시아는 안뜰까지 느린 걸음으로 향했다.

다른 건물의 청소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던 사용인 몇몇이 델시아를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그들의 인사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델시아가 안뜰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다소 쌀쌀한 저녁 공기를 맞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델시아의 곁에 누군가 다가섰다.

페르도 백작이었다.

“델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게냐? 춥지는 않니?”

“아버지.”

델시아는 고개를 돌려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네, 괜찮아요. 그냥 바깥 공기를 쐬고 싶었어요. 아버지께서는 저녁 훈련이라도 하신 거예요?”

제 아버지가 연무장 쪽에서 온 듯하여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멋쩍은 낯으로 말했다.

“오, 델시. 저녁 훈련이라 할 것도 없단다.”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기분은 좀 어떻니?”

“음, 나쁘지 않아요. 바깥 공기를 쐬니까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행이구나. 목소리 역시 다시 나오게 되어서 다행이고. 아, 목소리 이야기는 아델리오 공작께 들었단다.”

“……그랬군요.”

페르도 백작은 에드윈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못난 아비 대신 일주일 넘게 네 곁을 지키셨는데…… 그토록 원망스러웠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감사하더구나.”

“……에드윈이요?”

“그래. 끼니도 거르려고 하셔서 곤란했단다.”

깨어났을 때 에드윈이 곁에 있기는 하였으나, 제가 누워 있는 내내 곁을 지키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델시아는 에드윈이 끼니까지 거르고 제 곁을 지키려 했다는 제 아버지의 말에 입술을 쫑긋거렸다.

그런 행동으로나마 제게 용서를 빌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제가 걱정되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제가 계속 밀어냈는데…….

델시아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페르도 백작이 입을 열었다.

“델시, 이 아비는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기쁜 마음으로 따를 거란다.”

“……아버지.”

“네가 살아 준 것만으로, 다시 목소리를 내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을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달리 바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아비는 그저 네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니 델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그 말을 듣자 어쩐지 꽉 막힌 속이 풀린 듯했다.

‘아가씨께서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하시길 바라요.’

‘델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엘라와 제 아버지의 말에 델시아는, 비로소 방황하던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에드윈은 어디 있어요?”

평생 할 것만 같았던 고민이 지금 끝났다. 델시아는 따스하게 빛나는 제 아버지의 눈을 보며 한결 가벼워진 낯을 했다.

* * *

‘연무장에 계신단다.’

에드윈이 연무장에 있다는 제 아버지의 말에 델시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성내 연무장에서는 에드윈과 아놀드가 대련을 벌이고 있었다.

“손잡이를 더 꽉 쥐고 버티십시오.”

“이, 이렇게 하면 됩니까? 자세가 조금 불편한데…….”

“너무 비틀어 쥐어서 불편한 겁니다.”

검을 맞댄 두 사내는 델시아가 온 줄도 모르고 서로를 상대하는 데에 열중했다. 에드윈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왔던 델시아는, 그를 부르는 대신 연무장 안에 있는 벤치에 앉아 그들을 지켜봤다.

떨어졌다가 다시 맞붙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에드윈과 아놀드가 마침내 검을 검집에 넣고 서로에게 예를 갖췄다. 그렇게 대련이 끝났다. 에드윈은 연무장 한쪽에 내려놓았던 외투를 챙기려 걸음을 옮기다 저를 바라보는 델시아를 발견했다.

“……델시아.”

에드윈이 멍청한 얼굴로 델시아를 불렀다. 뒷정리를 마치고 연무장을 나가려던 아놀드 역시 뒤늦게 델시아를 발견하고는 델시아의 앞으로 달려왔다.

“델시아, 이제 괜찮아? 목소리가 다시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도 걱정이 돼서…….”

“으응. 괜찮아.”

“아, 다행이다. 정말로 목소리가 다시 나오는구나……. 그런데 연무장까지는 무슨 일이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아놀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델시아가 에드윈을 힐끗 쳐다봤다.

“에드윈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아버지께서 여기 있다고 하시길래.”

“그래? 그러면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편하게 이야기 나눠.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둘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아놀드가 에드윈에게 예를 갖추고는 서둘러 성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에드윈과 델시아 둘만이 남게 됐다. 델시아는 저와 눈도 못 마주치고 시선을 내리까는 에드윈의 모습에 작게 헛기침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꼭 에드윈과 다툰 다음 날에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입술을 떼기가 어려웠다.

“앉……아요.”

델시아의 조심스러운 말에 에드윈이 머뭇거리다가 벤치 끄트머리에 앉았다. 델시아는 저와 에드윈 사이에 누군가 편히 앉아도 될 만큼의 공간이 생긴 것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편하게 앉아요.”

“네.”

에드윈은 짤막하게 대답하면서도 자세만 고쳐 앉을 뿐 델시아 쪽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제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분명할 텐데,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델시아.”

“네?”

“당신이 고민하는 동안 저 역시 고민해 봤습니다. 당신의 곁에 서려는 게 순전히 욕심 때문인 건 아닌지. 혹은 어딘가에서 저를 좀먹고 있을 죄책감 때문인 건지를요.”

“…….”

“그리고 당신의 곁에 다시 설 자격이 제게 있나,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에드윈이 연무장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이어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가 해 온 사과와 기회를 달라는 말들조차 당신에게는 부담으로 다가갔을 것 같더군요. 당신이 안정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겠죠.”

델시아는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이기적인 저와 이야기를 나누려 연무장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델시아.”

“……에드윈.”

에드윈은 고개를 돌려 델시아를 바라봤다. 늘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회색 눈동자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덤덤한 투로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긴장한 탓이었다. 그러면서도 에드윈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뜻이 어떻든 존중할게요.”

델시아가 내릴 결정이 두렵기는 했으나, 그게 어떤 결정이든 에드윈은 따를 것이었다.

“에드윈, 저는…….”

마침내 델시아의 입술이 열렸다. 외투 끄트머리를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기억을 잃은 당신이 했던 모진 말에 마음이 아팠던 적도, 그런 저를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죄송했던 적도 분명 있었어요.”

“…….”

“모든 걸 각오하겠다고 마음먹은 것과는 다르더라고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에드윈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델시아의 말을 들었다.

“당신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에는, 거절할 생각이었어요. 가족들에게 미안해서라도요.”

“……그랬군요.”

“그런데 엘라도, 아버지도 같은 말을 해 주더라고요.”

델시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 보려고요.”

그녀의 말에 에드윈이 멍한 낯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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