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델시아, 켈리안 후작 부인이 보낸 건가요?”
서신을 읽던 델시아가 에드윈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델시아는 서신에 적힌 내용을 전부 읽고는 조심스럽게 접어서 무릎 위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안 하자 불안해진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켈리안 후작 부인이 아니라면…….”
“켈리안 영애께서 보내셨어요.”
보니타가 보내 온 서신에는 일전에 후작 부인이 저지른 결례에 관한 사과가 길게 적혀 있었다. 더불어 보니타는 언젠가 만나 가볍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델시아는 보니타에게 보낼 답신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클라우드와 에드윈을 바라봤다.
서신에 정신이 팔려 클라우드와 에드윈에게 미처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음을 떠올린 델시아가 뒤늦게 말했다.
“클라우드, 고마워.”
“별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나보다는 에드윈 아델리오랑 성검이 고생했지.”
“……에드윈, 파시오. 고마워요.”
델시아는 조그맣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고맙기는요.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 그래, 델시아노르. 고마워할 것 없다. 나와 에드윈 녀석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까.
파시오가 에드윈의 허리춤에서 점잖은 목소리를 냈다. 델시아는 성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 위에 내려놓은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어색한 느낌이었다. 또 에드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 잡았기에, 이 상황이 불편하기도 했다.
“아가씨, 지금 답신을 보내시겠어요?”
눈치 빠른 데보라의 권유에 델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응. 종이와 펜 좀 가져다줄래?”
“그럼요.”
데보라가 눈을 찡긋거리고는 책상에서 적절한 종이와 펜 그리고 종이를 받칠 판을 챙겨 와 델시아에게 건넸다. 델시아가 한창 답신을 쓰고 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윈이 클라우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성검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마법이라도 쓴 건가?”
“어떻게 알았기는. 그냥 척 보기에도 성검처럼 생겼는데. 내가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데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성검을 몰라볼 정도는 아니야. 뭐, 네가 신성력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장식용 검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클라우드는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검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한 것을 묻고 그러냐는 투에 에드윈이 ‘그렇군’이라고 대답하며 입을 다물었다. 깃펜을 움직이던 델시아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데보라에게 물었다.
“데보라, 엘라가 아침부터 안 보이네. 엘라는 어디 있어?”
“아침 일찍부터 외출했어요.”
“그러면 알렉스 경은?”
“열심히 훈련하고 계시던데…… 알렉스 경은 왜요?”
“그래? 아니, 그냥…….”
데보라의 물음에 얼버무린 델시아가 답신을 마저 적고는 그것을 반으로 접었다. 델시아는 곁에서 기다리던 데보라에게 답신을 건넸다.
“향을 묻혀서 전해 드려.”
“네, 그렇게 할게요.”
서신을 받아 든 데보라가 묵례하고는 델시아의 침실을 나섰다. 다시금 어색한 상황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 델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럴 게 아니라 비안나한테 가 봐야겠네.”
잠자코 있던 클라우드가 당장이라도 떠날 듯 준비를 하며 말하자 델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안나한테?”
“델시아 네 상태도 전하면서 겸사겸사 이야기도 나누려고.”
“지금 가려는 거야?”
“응. 왜?”
클라우드는 거리끼는 것 하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델시아는 아니었다. 클라우드마저 간다면 침실에 에드윈과 단둘이 남게 된다. 물론 에드윈에게 나가 달라고 요구하면 되겠지만, 그의 간절한 얼굴을 보면 그런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다.
결국, 델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클라우드를 보냈다.
“……델시아.”
클라우드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윈이 착잡함이 담긴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불편한 건가요?”
“…….”
망설임 가득한 물음에 델시아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대역 죄인이라도 된 양 제게 연신 사과하던 오늘 아침의 에드윈을 떠올렸다. 마지막 순간에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에드윈을 말이다.
델시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에드윈의 회색 눈동자에 물기가 스몄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델시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게도 시간이 필요해요. 생각할 시간이요.”
“……그래요, 델시아.”
에드윈이 힘겹게 대꾸하며 델시아의 침대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듯한 모습에 델시아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델시아. 제가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했어요.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요.”
에드윈은 희미한 미소가 걸린 얼굴로 덧붙였다.
“기다릴게요. 천천히 생각해요.”
에드윈은 그렇게 말하며 델시아의 침실에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속이 울렁거려 델시아는 시선을 내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을 풀어내야 할지조차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델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기대었다.
“아가씨, 엘라예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고민하던 델시아의 귓가에 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일찍 외출했다는 엘라가 성으로 돌아온 듯했다.
“들어갈게요.”
침실의 문이 열리고 엘라가 찬찬히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반쯤 든 유리병을 유심히 지켜보던 델시아가 엘라에게 물었다.
“엘라, 그게 뭐야?”
“신성력이 대단하다는 대신관의 손길이 닿았다는 성수인데요, 이게 부작용이나 큰 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아, 아가씨?”
“응?”
“목소리가 다시 나오시는 거예요?”
엘라가 놀란 얼굴로 물으며 델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델시아는 그런 엘라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에드윈 덕분에. 그런데 그 성수를 사려고 아침 일찍 나갔던 거야?”
“……네. 금방 팔린다고 하길래 새벽같이 나갔다 왔어요.”
“세상에나.”
“줄이 너무 길길래 못 살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제 순서까지 왔어요.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뎌서 이제야 왔는데, 그사이 다 나으셨다니…….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너무 잘됐어요.”
엘라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엘라…….”
“아델리오 공작님께서 계신다는 것도 잊고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했네요. 그냥…… 아가씨 곁에 있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엘라.”
델시아가 엘라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유리병을 꼭 쥔 엘라의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얼마나 소중하게 들고 온 것인지 손가락 틈새로 드문드문 닿는 유리병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델시아는 엘라가 얼마나 저를 생각하는지 다시금 느끼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 새벽같이 나서느라 힘들었지? 대신관의 손길이 닿은 성수라면 사려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정말 고마워.”
“그렇지만 바보같이 공작님의 존재를 잊은 탓에 아가씨 곁을 지키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아니, 아니야. 네게는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야, 엘라. 정말로.”
델시아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엘라를 끌어안았다. 저를 위해 애써 주는 사람이 주변에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쁘면서도 죄스러운지. 델시아는 고민하던 것도 잊은 채 엘라의 등줄기를 토닥거렸다.
“그런데 엘라.”
델시아가 엘라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장난기가 가득한 눈으로 엘라를 바라봤다.
“알렉스 경과는 어때?”
“아, 아가씨!”
델시아의 토닥거림에 감동하고 있던 엘라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알렉스 경과 사이가 좋았잖아. 지금도 잘 지내는 거지?”
“모, 몰라요!”
엘라는 토라진 양 고개를 홱 돌리며 대답했지만, 활기차던 예전의 제 주인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었다.
“그, 그것보다도 공작님과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엘라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델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아가씨?”
“……혼란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
그러나 그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델시아 자신도 몰랐다. 에드윈을 떠올릴 때마다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 탓에 머리도, 마음도 답답했고.
“시간이 필요하다고는 말했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말이네.”
“음……. 저, 아가씨.”
“응.”
“저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 같아요.”
엘라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아니잖아요. 이런저런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정하는 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니까요.”
델시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정하는 것 역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던가. 엘라가 무슨 뜻을 전하려는 것인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델시아는 잠자코 듣기로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작님만 생각해 보세요.”
“에드윈만?”
“네. 아가씨를 고민하게 만드는 복잡한 것들을 전부 내려놓고 공작님만요.”
사뭇 진지한 모습에 델시아가 잠시 고민하다가 에드윈을 떠올렸다. 엘라의 말대로 저를 고민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아주 찬찬히 생각해 봤다.
“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공작님만 생각하면 어떠세요?”
저를 보며 활짝 웃는 에드윈의 모습을 상상하자 이상하게도 심장이 움칠거렸다. 아니, 간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