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86화 (86/94)

<86>

“……델시아?”

클라우드는 저를 이곳으로 소환한 게 델시아라는 것을 확신한 듯 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반지를 다섯 번 두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녀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클라우드의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델시아, 드디어 깨어났구나!”

초췌한 낯이기는 했으나 분명 델시아였다. 클라우드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델시아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에드윈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경계심을 허물고 웃던 클라우드가 이내 그를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누구야?”

“……에드윈 아델리오다.”

에드윈이 낯선 이를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구는 클라우드에게 저를 소개했다. 그러자 클라우드가 콧방귀를 뀌며 에드윈을 위아래로 훑었다. 노골적으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져 에드윈은 당혹스러웠다.

“네가 그 에드윈 아델리오였군. 델시아를 힘들게 한 장본인인 그 못난 녀석 맞지?”

“……뭐?”

“다 들었으니까 발뺌하려고 하지 마.”

클라우드는 에드윈을 노려보다가 툴툴거렸다.

“저런 못난 놈이 왜 아직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거야. 델시아가 반기지 않을 게 분명한데.”

“…….”

클라우드의 말에 에드윈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듯한 태도에 클라우드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던 클라우드는 들려오는 에드윈의 말에 팔짱을 풀 수밖에 없었다.

“……델시아에게 문제가 생겼다.”

“문제? 델시아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야?”

에드윈이 백작 성에, 그것도 델시아의 침실에 버젓이 있는 것을 보고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던 클라우드가 멈칫거렸다. 델시아에게 문제가 생겼다니.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 될 게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그녀의 몸에 흐르는 마력을 눈으로 대강 살펴봐도 그다지 이상한 점이 없었다. 클라우드는 눈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는 문제 말고 다른 문제가 생겼다고?”

“그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

“……뭐? 목소리가?”

클라우드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껌벅거리다가 델시아를 바라봤다. 에드윈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델시아는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부름에 제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델시아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니. 클라우드는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델시아에게 물었다.

“델시아, 정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야? 조금도?”

그 물음에 델시아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뱉으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내려 안간힘을 쓰는 걸 지켜보던 클라우드가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이런.”

하필이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부작용이라니. 달리 해결법도 없는 부작용이었다. 상흔을 입거나 완전히 잘못된 게 아니라 클라우드로서는 손을 쓸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목소리가 언제 다시 나올 것이라는 확신도 할 수 없었으니까 더욱 곤란했다.

클라우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야트막한 한숨을 내쉰 클라우드가 델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고 제 마력을 불어넣어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클라우드의 새하얀 마력은 델시아의 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델시아의 몸 상태를 읽은 클라우드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른 곳은 멀쩡해. 성대도 외관상으로는 멀쩡한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라는 것인가. 불문율을 어겼으니 책임지라는 거야?

그런 부작용이라면 델시아가 아니라, 하르투아의 심장을 내어 주기로 결정한 저에게 왔어야 했다. 분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던 클라우드는 델시아의 몸에 다시금 제 마력을 불어넣었다. 델시아의 몸에 들어간 마력이 이번에는 그녀의 목 부근으로 향했다.

“그건 무슨 마법이지?”

“혹시 모를 마법이 성대를 묶고 있나 싶어서 확인하는 거야.”

그러나 아무런 마법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클라우드는 제 마력을 거둬들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부작용은 신성력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빠를 텐데.”

클라우드의 중얼거림을 구시렁거림으로 착각하고 흘려들으려던 에드윈이 ‘신성력’이라는 단어에 몸을 멈칫거렸다.

“잠깐. 신성력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빠르다고?”

에드윈은 침을 꿀꺽 삼키며 클라우드에게 되물었다.

“그래. 신성력은 말 그대로 신의 힘이라 이런 부작용 정도는 금방 호전되게 해 주거든.”

“확실한 정보인가? 다른 부작용이 발생하는 일은 없고?”

클라우드는 꼬치꼬치 캐묻는 에드윈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기는 했으나, 최대한 친절하게 대꾸해 줬다.

“신의 힘으로 치료를 받았는데 부작용이 생기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야? 그런데 그런 건 왜 묻지? 주변에 아는 신관이라도 있는 건가?”

제가 관심 있는 일이 아닌 이상 바깥세상에는 관심 없는 클라우드는, 아델리오 가문이 대대로 성검을 모신다는 것과 대단한 신성력을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아델리오 가문에서도 가장 방대하고 순수한 신성력을 태어난 이가 바로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은 진지한 눈빛으로 클라우드를 응시했다.

“내가 신성력을 쓸 수 있다.”

“……뭐? 너 신관이었어?”

“신관은 아니지만, 대대로 성검을 모시는 가문에 속해 있기는 하지.”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순수한 신성력일수록 효과가 더 좋을 거야.”

클라우드는 에드윈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신성력이 있다면 델시아의 부작용이 금방 나을 터였다. 페르도 영지 주변에는 신전이 없어 신관을 찾으려 한참 헤맬 각오를 한 클라우드로서는 정말 기적적인 상황이었다.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델시아의 손목을 잡고 신성력을 불어넣어. 조절 잘해야 하는 거 잊지 말고. 한 번에 많이 넣었다가는 마력과 충돌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적당량을 일정한 속도로 불어넣으면 되는 건가?”

“그래. 정 어려울 것 같으면 성검을 사용하는 건 어때? 평범한 인간보다는 오래 산 성검이 더 잘하지 않겠어?”

클라우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물음에 에드윈의 허리춤에 걸린 파시오가 자르르 진동하며 제 존재를 알렸다. 파시오는 델시아와 관련된 일에는 유독 적극적으로 나섰다. 평소에는 귀찮다고 대답조차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에드윈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춤에 걸린 파시오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검집에서 조심스럽게 파시오를 빼냈다.

― 오오, 델시아노르!

파시오는 침대에 누워 있는 델시아를 향해 붕붕 진동했다. 오랜만에 델시아를 본 것에 더하여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 멍청한 아델리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델시아의 곁으로 나를 데려가라.

“파시오, 네가 하려고?”

― 네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잖느냐.

파시오가 간단하다는 양 대꾸하고는 에드윈을 채근했다. 수다스러운 성검을 가지고 델시아의 앞까지 걸어간 에드윈이 진지한 낯으로 심호흡했다. 파시오는 그새 델시아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어 줄 준비를 마쳤는지 몸을 잘게 떨었다. 성검 주변으로 불투명한 황금빛이 일렁거렸다.

에드윈은 성검의 손잡이 부분을 델시아의 손바닥에 얹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손잡이를 그러쥘 수 있도록 그녀의 손을 감쌌다. 익숙하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닿는 온기에 델시아가 움찔거리며 에드윈을 힐끗거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델시아는 그런 에드윈과 파시오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찬찬히 눈을 감고 에드윈의 손이 주는 온기에 집중했다. 이내 불투명한 황금빛이 넘실거리며 델시아의 손목을 타고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몸 전체가 온기로 차올랐다. 온기는 쉬이 식지 않고 델시아의 몸을 토닥이듯 머물렀다. 처음 경험하는 신성력의 힘에 델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신성력은 보통 이런 황금빛을 띠나?”

클라우드는 마력과는 다른 색감과 움직임을 가진 신성력을 유심히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신성력은 마력보다 움직임이 유연하고, 불투명한 빛을 띠는 듯했다. 그리고 기운 자체도 따뜻했고.

― 특이한 기운을 가진 인간이구나.

델시아에게 신성력을 전해 주던 파시오가 중얼거리자 에드윈이 되물었다.

“클라우드를 이야기하는 건가?”

― 저 인간의 이름이 클라우드인가. 델시아에게 꽤 중요한 사람인 것 같군.

제게로 흘러들어 오는 델시아의 잔류 기억을 확인한 파시오는 그 뒤로도 종종 추임새를 넣으며 델시아의 기억에 공감했다.

― 얼추 다 된 것 같군. 이 이상 넣으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슬슬 신성력을 갈무리해라.

파시오의 말에 에드윈이 제 신성력을 갈무리했다. 부작용 치료가 안정적으로 끝나자 클라우드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곁으로 다가왔다.

“델시아, 말해 봐.”

클라우드는 델시아를 보며 목소리를 내 보라고 말했다. 클라우드의 요청에 침을 꿀꺽 삼킨 델시아가 입을 열었다. 에드윈과 파시오가 힘을 써 줬는데, 부작용이 치료되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어서 조금 긴장됐다. 델시아는 긴장 어린 낯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아.”

“그런 소리로는 잘 몰라. 확실하게 문장으로 말해 봐, 델시아.”

“음……. 정말 고마워?”

델시아는 제 목소리가 멀쩡하게 나오자 언제 긴장했냐는 듯 밝아진 얼굴로 한껏 미소 지었다. 그때 누군가 델시아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데보라였다.

“들어와, 데보라.”

“이제 목소리가 나오시는군요. 다행이에요!”

“으응. 무슨 일이야?”

“아, 켈리안 후작가에서 아가씨 앞으로 서신을 보내서요.”

데보라가 델시아에게 서신을 건네며 말했다. 켈리안 후작가에서 왜 제게 서신을 보낸 것이지? 델시아는 후작 부인과의 좋지 않던 만남을 떠올리며 가라앉은 눈을 했다. 서신을 확인하려는 델시아의 손길이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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