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델시아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를 지켜보려고 하는 것인지, 대체 왜 저를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인지.
에드윈이 저를 잊은 것은 저 역시 각오했던 일이었다. 그랬기에 상처받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고, 어느 정도 마음을 굳게 먹기도 했다. 영지로 오기 전, 에드윈을 밀어냈던 일은 아직도 생생했다.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저를 보는 에드윈을 외면하고 마차에 올라탔을 때는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애초에 제가 반년간 그의 별채에 머문다고 고집만 안 부렸어도 에드윈과 사이가 그렇게 틀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델시아…….”
델시아는 제 긍정적인 대답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에드윈을 바라봤다. 모든 고리를 끊었고, 그 고리를 다시 잇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건만, 눈앞에서 저를 보며 애원하는 에드윈을 보자 그 결심이 흔들렸다.
길어야 일 년이라던 제한이 사라지자 그 흔들림은 더욱더 강해졌다. 갓 뿌리를 잡기 시작한 체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흔들리면 안 된다. 아직은 모든 게 겁이 나니까. 아직은 이 모든 게 두려우니까. 제가 다시 눈을 뜬 게 일시적인 일일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델시아, 시간이 필요한가요? 당장 결정을 내리는 일이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필요하다면 말해 줘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에드윈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델시아는 잔뜩 가라앉은 목을 매만지다가 찬찬히 고개를 내저었다.
“……델시아.”
“…….”
고개를 내저은 이유를 말하려던 델시아는 이내 포기했다. 델시아는 에드윈을 보며 한 번 더 고개를 내저었다. 목소리가 나왔다면 침실에서 나가달라고 말했을 텐데. 그녀는 저를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에드윈에게 문을 가리켜 보였다.
“나가라는 뜻인가요? 하지만 델시아……!”
“무슨 일입니까?”
페르도 백작이 피로한 목소리로 물으며 문을 열었다. 늘 조용하던 제 딸의 침실에서 별안간 소란이 느껴지기에 와본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에드윈을 바라보던 페르도 백작의 동공이 돌연 확장됐다.
“데, 델시?”
페르도 백작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며 델시아에게로 달려왔다. 델시아는 제 손을 덥석 잡아 오는 아버지를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제가 깊은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인지 무엇인지.
페르도 백작이 그런 델시아를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오, 델시……. 아비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느냐. 응? 아비는 정말…….”
델시아는 그런 아버지의 흐느낌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렇게 침실이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아놀드까지 찾아왔다. 의아한 얼굴로 침실에 발을 들인 아놀드는 델시아와 제 아버지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뛰어들었다.
아놀드는 제 아버지와 델시아를 끌어안으며 정말 다행이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페르도 백작은 제 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였으나, 델시아는 쉬이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아놀드가 조심스럽게 델시아에게 물었다.
“델시아, 왜 그래? 말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래, 델시. 아까부터 말이 없구나.”
델시아가 그 물음에 찬찬히 고개를 내저으며 제 목소리가 안 나옴을 몸짓으로 표현했다. 이를 용케 알아들은 아놀드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오, 델시…….”
“기, 기다려 봐. 그럼 내가 종이랑 펜을 가져올게. 그러면 됐지?”
아놀드는 델시아의 책상으로 달려가 깃펜과 종이를 꺼내와 그녀에게 건넸다. 그것들을 건네받은 델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종이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망설이는지 펜이 자주 멈칫거렸다.
이내 글씨를 전부 쓴 델시아가 아놀드에게 종이를 건넸다.
“어, 그러니까…… ‘공작님께서는 나가 계시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델시아.”
글자를 읽은 아놀드가 에드윈의 눈치를 봤다. 에드윈은 놀란 듯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저와 함께 있는 것조차 싫다는 것인가. 정말 저를 완전히……. 에드윈의 눈동자가 점점 물기에 젖어 들었다.
“공작님, 죄송합니다. 델시아가 원치 않으니…… 일단은 나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페르도 백작은 충격받은 듯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에드윈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드윈이 비틀거리며 델시아의 침실을 나섰다. 제 바람은 역시나 오만한 것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 델시. 이제 됐단다. 더 필요한 게 있니?”
제 아버지의 물음에 델시아가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거렸다. 이번 종이는 페르도 백작이 건네받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또 기절했었던 건가요?’
델시아의 물음에 페르도 백작이 아놀드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가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중 결국 페르도 백작이 입을 열었다.
“델시, 놀라지 말고 들으렴. 너는…… 그러니까, 죽……었었단다.”
“…….”
델시아가 입을 쫑긋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죽었었다고? 믿기지 않았다.
“아델리오 공작처럼 너 역시 되살아난 거란다, 델시.”
이어지는 설명에 델시아가 입을 벌렸다. 제가 죽었었던 것도 모자라 되살아났단다. 제가 살아났다니, 숨이 멈췄던 제가 다시 숨을 쉴 수 있다니. 제게 다시 삶이 허락되었다니. 이렇게나 이기적인 제게 다시 생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제가 살아난 것이지?
델시아는 빠른 속도로 글자를 적고는 페르도 백작에게 보여줬다.
‘그렇지만 어떻게요?’
그 물음에 페르도 백작은 클라우드와 비안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의 요지는 클라우드가 델시아를 위해 드래곤의 심장을 내놓은 것도 모자라 비안나까지 데려와, 그녀를 돕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제 아버지에게서 믿기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델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 심장이 클라우드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서, 그가 저를 구하기 위해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그래서 눈시울을 붉혔다.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는 훌쩍거리는 델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더 자렴, 델시.”
“그래. 아직 새벽이니까 더 자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델시아는 제 가족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의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제 딸이 잠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쉬이 잠들지 못할 것으로 보였던 델시아는 생각보다 빠르게 잠들었다.
지독한 수마에 다시금 발목을 잡힌 것이다.
***
델시아는 꿈을 꿨다. 에드윈과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달콤한 꿈을. 언젠가 경험했던 것 같기도 한 꿈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앳된 티가 나는 에드윈이 뺨을 붉히며 물어 왔다.
“델시아, 이게 뭐예요?”
델시아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가리킨 말이었다. 바구니 안에는 델시아가 직접 구운 쿠키와 머핀이 들어 있었다. 델시아는 기대 가득한 에드윈의 시선을 즐기며 쿠키와 머핀을 꺼내 돗자리 위에 찬찬히 늘어놓았다.
“맛있어 보이는데, 혹시…… 델시아가 직접 구운 건가요?”
에드윈은 디저트와 델시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의 눈동자가 기대감에 젖어 어찌나 빛나던지 델시아는 그만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돌연 웃음을 터트리자 의아해하는 것은 에드윈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어질 델시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앉아요, 에드윈.”
“아, 이런. 앉는 것도 잊고 있었네요.”
멋쩍게 웃어 보인 에드윈이 그녀의 곁에 조심히 앉아 몸을 기댔다. 단단한 몸이 기대 오자 델시아는 장난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무거워요, 에드윈.”
“무겁다고요? 그럴 리가요.”
에드윈이 능청을 떨며 더욱 몸을 기대 왔다. 그러자 델시아의 몸이 점점 돗자리 바닥으로 기울었다.
“어, 어!”
델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균형을 잡으려 몸을 바둥거렸다. 그러자 에드윈이 그녀의 허리를 받치며 작게 사과했다.
“장난쳐서 미안해요. 델시아와 있으면 이상하게도 장난기가 느네요.”
“괜찮아요, 에드윈. 그런데 하마터면 쿠키와 머핀이 뭉개질 뻔했어요.”
델시아가 그들의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디저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내 에드윈의 품에서 빠져나와 허리를 바로 세운 그녀가 에드윈에게 쿠키를 건넸다.
“안에 잼이 든 쿠키예요. 어릴 적에 존한테서 배웠던 건데, 에드윈도 몇 번 먹어 봤을걸요?”
그녀의 설명에 에드윈이 감탄하며 쿠키를 베어 물었다. 달큼한 맛과 폭신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에드윈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델시아.”
온갖 미사여구가 붙은 칭찬보다도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에드윈의 칭찬이 좋아서. 그래서 델시아는 매일 쿠키와 머핀을 굽기도 하고, 수놓기를 하기도 했다. 에드윈의 칭찬에는 묘한 마성이 있었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마성.
델시아는 에드윈이 제게 지어 보이는 다정한 미소가, 저를 칭찬하는 진심 어린 말씨가 좋았다. 꿈속의 에드윈은 그런 델시아의 바람을 전부 들어주었다. 꼭 진짜처럼 생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