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델시아는 눈꺼풀을 찬찬히 들어 올렸다. 사방이 까맸다. 짙은 어둠이 깔린 공간에서 델시아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달리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무얼 해야겠는지, 무얼 해야만 하는지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델시아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보냈다. 몇 시간이 아니, 며칠이 지났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델시아는 무감각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편안했다. 하는 일 없이, 생각 없이 시간을 죽이고 앉아 있는 건 마음 편한 일이었다. 고민도 하나 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곳에서 영영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델시아.”
누군가 델시아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델시아가 다시 제 무릎을 끌어안은 채 턱을 괴었다.
“……델시아!”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 역시 익숙했다. 델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제 무릎 사이를 파고들었다. 대답하고 싶지도,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헤매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있는 게 좋았다. 이대로 있는 게 편했다. 이대로 있는 게 행복했다.
“델시아, 나처럼 길을 헤매는 거예요?”
델시아는 헤매는 게 아니었다.
“델시아, 아비는 여기 있단다. 여기로 오렴.”
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편한데, 굳이 움직여야만 하는가. 저를 찾는 게 누구든, 제가 누구였든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제가 이대로 편히 있게 놔두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직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가 편하고 좋았다.
***
식사가 끝나고, 에드윈은 침실로 올라와 델시아의 곁에 앉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녀 옆에서 시간을 죽였다. 지루함 같은 건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한 시간 가까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던 에드윈이 고개를 돌려 습관처럼 델시아의 안색을 확인했다.
괜히 델시아의 뺨 부근에 손등을 대어 온기가 흐르는지 확인하기도 하고, 그녀의 손을 조심히 쥐고 부드럽게 주무르기도 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본 적이 있던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에드윈은 오로지 델시아를 위해서만 움직였다.
지금에야 델시아를 보살피게 되었다는 데에 자책과 탄식을 하기는 했으나, 속에 담아 두는 것으로 그쳤다. 델시아가 눈을 뜨고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일을 바라는 게 우선이었으니.
“비안나가 일주일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으니……, 적어도 엿새는 더 기다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델시아의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했던 침실 안에 페르도 백작의 음성이 울렸다. 에드윈은 고개를 돌려 문을 막 닫으며 들어오는 페르도 백작을 쳐다보며 말했다.
“……엿새. 지옥 같은 엿새가 되겠네요.”
에드윈의 말에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작 반나절밖에 안 지났건만, 열흘은 지난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러니 남은 엿새는 오죽하겠는가. 엿새가 일 년처럼 느껴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페르도 백작은 서글픈 현실에 한숨을 내쉬며 침대맡에 섰다. 에드윈과는 마주 보는 위치였다. 그는 에드윈과 눈을 맞추다가 고개를 내려 델시아를 봤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제 딸의 기다란 속눈썹은 미동조차 없었다. 매끈한 콧잔등도, 다물린 입술도 움직임이 없었다. 흉부만이 오르내리며 제대로 호흡하고 있음을 알릴 뿐이었다.
그래도 제 곁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며 위안 삼고는 있지만, 못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창문을 투과하여 내리쬐는 햇볕으로부터 묵묵히 델시아를 지켜 내던 백작이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려 에드윈을 봤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누구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 부탁한 적도, 명령한 적도 없는데 아델리오 공작은 고생을 자처했다. 그 사실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었든 어쨌거나 델시아를 힘들게 한 이는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페르도 백작은 야트막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취소할 수 없는 외부 일정이 있어, 부득이하게 성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델시아의 곁에는 제가 있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페르도 백작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 역시 델시아의 곁을 쭉 지키고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침실을 등지고 선 페르도 백작은 아쉬움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안을 힐끗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페르도 백작이 침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놀드가 찾아왔다. 그는 핼쑥한 낯을 한 채 비칠비칠 걸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태로웠던지, 한참 작은 체구의 데보라가 안절부절못하며 아놀드의 곁을 맴돌 정도였다.
“데보라, 나 괜찮아.”
“하지만 도련님…….”
아놀드가 멋쩍게 웃으며 저를 부축하려는 데보라를 만류하고 굽은 척추를 바짝 세웠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한발 물러선 데보라가 아놀드의 뒤를 따라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델시아는…….”
“오셨습니까. 델시아는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입니다.”
델시아의 상태를 묻는 아놀드에게 에드윈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달라진 것 없다는 대답에 아놀드가 우울한 낯빛을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움직임이 있었다거나 약간이나마 잠꼬대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기대했건만.
하기는, 심장이 바뀌었는데 금방 회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아놀드는 페르도 백작이 서 있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제 아버지가 그러했듯 델시아에게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섰다.
이를 아는 에드윈은 아놀드를 힐끗거리고는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아델리오 공작님?”
에드윈이 돌연 웃음기를 띠자 아놀드가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물음에 서둘러 웃음을 지워 낸 에드윈이 헛기침하고는 설명했다.
“페르도 백작 역시 소백작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요?”
“네.”
아델리오 공작이 웃은 이유가 겨우 그런 거였다니. 아놀드는 에드윈 몰래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델시아를 쳐다봤다. 찡그림 한번 없이 평온한 얼굴을 내내 유지하는 제 동생이 걱정스러웠다.
“아침에 델시아가 너무 깊은 어둠을 헤매지 않기만을 바라신다고 하셨죠?”
“네.”
“공작님께서는 얼마나 깊은 어둠을 헤매셨습니까? 제 동생을 잊으실 만큼이나 깊은 어둠이었습니까?”
“…….”
아놀드의 물음에 에드윈은 침묵하고 싶었으나 허리춤에 찬 파시오가 잘게 진동하며 대답하라고 채근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습니다. 편안하기도…… 따뜻하기도 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립지 않았습니다.”
“어둠에 계시는 내내 무감각하셨던 겁니까?”
“무감각……. 네. 무감각하게 있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하겠네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앉아서 시간만 보냈습니다. 그러다 빛이 보였고,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놀드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무시하고 있자니 울음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아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걸었고, 걷다 보니 눈이 뜨였습니다.”
“그렇다면 델시아 역시…….”
“네. 델시아 역시 제가 그랬던 것처럼 어둠에서 계속 머무르려 할 수도 있습니다.”
에드윈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덧붙였다.
“저는 그게 걱정됩니다.”
심장이 뛴다고, 숨을 쉰다고 온전히 살아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에드윈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던 아놀드가 덧붙여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숨을 쉰다고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놀드는 델시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델시아, 우리를 잊으면 안 돼. 꼭 깨어나야 해. 응?”
그는 제 목소리가 델시아에게 잘 닿았기를 바랐다.
“아가씨…….”
데보라는 델시아를 보며 눈물을 닦았다. 어릴 적부터 봐 왔던 아가씨가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르는 시한부였다가 이제 겨우 새 심장으로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델시아는 도저히 새 삶을 살게 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데보라, 차 좀 내오겠어?”
아놀드가 에드윈의 맞은편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으며 말했다. 앞치마로 눈물을 훔친 데보라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침실을 나갔다.
“……공작님께서는 이곳에 언제까지 머무실 겁니까?”
“델시아가 눈을 뜰 때까지 머물 생각입니다.”
“공작님을 찾는 가신들과 다른 귀족들이 많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테오에게 말해뒀으니, 대부분의 일정이 미뤄졌을 겁니다. 문제가 생겼다면 이쪽으로 테오의 서신이 올 테고요.”
에드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델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처리하실 업무는…….”
“웬만한 일들은 다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공작님 걱정은 안 합니다. 그냥…… 서류 더미 속에서 홀로 싸우고 있을 테오가 걱정돼서요.”
“저 못지 않은 일 중독자가 테오이니 괜찮습니다.”
에드윈의 말에 아놀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에드윈이 큼큼, 헛기침하며 뺨을 긁적였다. 아마 테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눈에 불을 켠 채 따지고 들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