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차갑게 식어 가던 델시아의 몸에 다시금 온기가 돌았다. 에드윈은 델시아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어 온기를 느끼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델시아가 제대로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한 비안나는 숲으로 돌아가겠다고 알렸다.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는 저녁 식사 자리라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비안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어우, 됐어. 인간들 틈바구니에 껴서 식사하는 건 딱 질색이야. 델시아한테 문제가 생기면 연락 줘, 클라우드. 아니, 그것보다 너 여기 남아 있을 거야? 숲에 안 돌아가?”
비안나는 제 몫을 다한 인공 마력 심장을 챙기는 것으로 돌아갈 채비를 끝낸 다음, 클라우드에게 물었다. 그는 델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가려고요. 오늘 깨어난다면, 깨어나는 것까지는…….”
“음, 드래곤의 심장이 들어갔으니까 적어도 일주일은 지나야 깨어날 것 같은데.”
“…….”
“일주일간 여기 있을 셈이야?”
비안나가 되묻자 클라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갈게요. 너무 늦지 않게요.”
“그래. 무리하지 마, 클라우드. 마법사라고 만능인 건 아니니까. 너도 인간인 건 마찬가지잖아.”
“알아요.”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몸이 금방 무너지고 말 거야. 하르투아도 델시아도 그건 원치 않겠지.”
“…….”
클라우드가 나지막이 대답하고는 시선을 돌려 비안나를 응시했다. 비안나는 숲으로 돌아가서 쉬라는 무언의 눈짓을 보내 왔다. 물론 스스로도 평소보다 무리하였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했다. 그래서 더 있으려던 것이었는데.
비안나의 눈짓을 보니 더 있겠다고 못 박았다가는 억지로 끌고 가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클라우드는 델시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비안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침실의 문을 열기 전, 비안나와 클라우드는 자신들을 응시하는 몇 쌍의 시선을 마주했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동공들을 마주하자 클라우드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델시아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인간들과 꽤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말이다.
“고맙습니다, 클라우드.”
그때 에드윈이 나지막이 인사했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를 보니 괜한 긴장감이 몸에 덧씌워졌다. 그것을 모르는 에드윈은 한 번 더 말했다.
“당신에게도 귀한 것이었을 텐데……,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것 없어. 델시아를 위해서 한 일이니까. 그리고 나를 위해서 한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
인상을 구긴 채 말한 클라우드는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느릿하게 쓸다가 침실을 휙 나갔다. 침실의 문을 연 채로 서 있던 비안나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이내 방을 나섰다.
“델시…….”
비안나와 클라우드가 사라지자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델시아가 숨을 쉰다. 제 딸아이가 이제는 시한부가 아니다. 제 딸아이는 이제 건강하다. 페르도 백작은 한때 당연하게만 여겨 왔던 것들이 선물처럼 다시 찾아오자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아직은 창백한 안색이지만, 곧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며 웃어 주리라. 페르도 백작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델시아를 내려다보다가 아놀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놀드.”
“아버지, 그럼 이제 델시아는…….”
“그래. 이제 델시아가 언제 쓰러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더는 시한부가 아니니까.”
아놀드는 제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제 동생이 곁을 떠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녀의 미래에 환한 햇살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찬찬히 깨달은 아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공작님.”
퉁퉁 부어오른 눈을 비비적거린 아놀드가 조심스럽게 에드윈을 불렀다. 델시아에게 집중하느라 그에게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괜찮으십니까……?”
제 감정을 추스르느라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을 뒤늦게나마 한 아놀드가 살짝 미소 지었다. 에드윈의 차분한 눈동자가 아놀드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백작과 소백작은 괜찮으십니까? 많이 놀라셨을 테고 또 잠시뿐이었지만, 많이 슬프셨을 텐데…….”
“괜찮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언제 수도로 올라가실 생각이신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델시아가 일어날 때까지 곁에 있고 싶습니다.”
에드윈은 페르도 백작의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페르도 백작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델시아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간호하고, 그녀가 깨어났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게 모든 걸 바쳤던 그녀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에드윈은 진지한 눈으로 페르도 백작을 응시했다. 페르도 백작은 야트막한 숨을 내쉬며 델시아를 보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델시아가 일어날 때까지 계시는 건 말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깨어난 델시아가 공작님을 거부한다면 그때는 떠나 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가 저를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그녀가 기억을 잃었더라도 말이다. 제게 많은 상처를 받은 델시아가 저를 밀어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에드윈은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제가 그러했듯 그녀가 저를 매몰차게 내치고 싸늘한 눈으로 바라본다고 해도 에드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델시아 역시 겪었을 고통이니까. 그녀 또한 느꼈을 비참함이니까.
“곁에서 델시아를 지켜볼 수만 있게 해 주십시오.”
“…….”
페르도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그의 허락에 에드윈은 조금은 밝아진 얼굴을 할 수 있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델시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녀는 느릿하게 숨을 쉬며 어떠한 뒤척임도 없이 누워 있었다. 에드윈은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아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언젠가 제가 맞닥뜨렸던 어둠을 헤매고 있을 델시아를, 에드윈은 가만히 바라봤다.
애정과 죄책감이 가득 담긴 눈동자였다. 델시아의 창백한 얼굴을 매만지며 에드윈이 중얼거렸다.
“델시아, 나처럼 너무 헤매지는 마요.”
다소 우울한 낯으로 델시아의 손을 잡은 에드윈이 그것을 제 뺨에 가져다 대며 덧붙였다.
“당신은 길눈이 밝아 많이 헤맬 일은 없겠지만요.”
온기가 느껴지는 손을 뺨에 가져다 대자 안정감이 들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더 안정감을 줬다.
“델시아…….”
에드윈은 델시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한참 동안 델시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이내 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공작님.”
“…….”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식사는…….”
“거르지 마시지요, 공작님.”
식사는 되었다고 말하려던 에드윈의 귓가에 페르도 백작의 목소리가 닿았다. 에드윈이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보자 페르도 백작이 서 있었다. 에드윈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백작, 먼저 식사하십시오.”
“공작님,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떡합니까? 이리 오셔서 식사하십시오.”
“…….”
“페르도 백작 성에서 끼니를 거르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외는 두지 않으니, 백작 성에 오신 이상 공작님께서도 끼니를 거르시면 안 됩니다.”
페르도 백작이 단호하게 말하자 에드윈이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페르도 백작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벽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페르도 백작 일가가 화목하게 그려진 초상화를 곁눈질로 본 에드윈이 말했다.
“언제 봐도 참 따뜻한 그림입니다.”
“……셀레나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림에서도 그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식당의 문이 열리고 에드윈과 페르도 백작이 찬찬히 자리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그리고 공작님.”
먼저 내려온 아놀드가 자리에 앉아 인사했다. 페르도 백작은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에드윈은 좋은 아침이라며 짧게 대답했다.
“델시아는 좀 어떤가요? 깨어날 기미가 보이나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너무 깊은 어둠에서 헤매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에드윈의 대답에 아놀드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저 또한 헤맸습니다. 깊은 어둠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서요.”
“음……, 저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델시아는 길눈이 밝으니 금방 찾아낼 겁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아놀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식사를 시작했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찬찬히 음식을 씹던 페르도 백작이 느릿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켈리안 후작이 조사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드윈은 고기를 잘게 썰어 입에 넣었다. 그가 찬찬히 음식물을 씹어 삼키자 페르도 백작이 돌연 질문해 왔다.
“공작님께서 그러신 겁니까?”
접시 위에 놓인 구운 채소를 썰던 에드윈의 손이 페르도 백작의 물음에 멈칫했다.
“공작님께서는 늘 조용히 해결하시던 분이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일을 부러 크게 키우신 것 같기에 여쭙는 겁니다.”
에드윈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포크로 채소를 찍은 에드윈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글쎄요.”
“네?”
“일을 일부러 키운 적은 없습니다. 언젠가 알려질 일을 미리 알린 것뿐입니다.”
그 대꾸에 눈을 끔벅거리던 페르도 백작이 살짝 웃었다. 더 물어 봤자 에드윈은 대답해 주지 않을 듯했다. 켈리안 후작가의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낸 이유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