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아놀드에게 서신을 보낸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오전을 보냈다. 작은 뒤척임조차도 없는 델시아에게서 시선도 떼지 않았다. 페르도 백작의 얼굴은 반나절 새에 수척해졌다. 지켜보던 엘라가 휴식을 권하였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혹여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델시아가 깨어나거나 잘못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한사코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델시아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델시아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벅찬 숨을 뱉었다. 그에 따라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페르도 백작의 입술이 절박하게 달싹였다.
“데, 델시. 눈을 떠 보렴. 응? 델시, 아직은 아니란다. 이대로는 안 돼.”
울음 섞인 음성에도 델시아의 눈이 뜨이는 일은 없었다. 델시아는 찡그린 채 한참 밭은 숨을 내쉬다가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일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경험한 페르도 백작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간절히 되뇌었다. 제 딸이 버텨 주기를, 조금만 더 버텨 주기를.
“아비를 두고 이러면…… 어떡하니, 델시. 아비는 어떡하라고…….”
저를 두고 먼저 가지 않기를. 그래 주기만을 바라게 됐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일지라도 말이다.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에게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델시, 아비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응? 아비가 대체 무얼 해야 하는 거니…….”
페르도 백작이 신음하며 눈가를 훔칠 때였다. 데보라가 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련님과 아델리오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데보라의 말에 고개를 돌려 엘라와 눈을 마주친 페르도 백작이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델리오 공작?”
아델리오 공작이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그에게는 알리지도 않았거늘. 심각한 얼굴을 하는 페르도 백작의 눈치를 살피던 엘라가 문을 열어 데보라에게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도련님과 같이 오신 것 같습니다.”
“아놀드와 같이 왔다고…….”
그렇다면 편지를 받을 당시 아놀드가 아델리오 공작과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페르도 백작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델시아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으나 아델리오 공작이 왔다니 움직여야만 했다. 페르도 백작은 침실 문을 열고 응접실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와 곧장 응접실의 문을 연 페르도 백작은 지친 눈으로 아놀드와 아델리오 공작을 바라봤다.
“아버지, 델시아는…….”
“아놀드,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구나. 델시아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네게 서신을 보냈단다.”
말을 마친 페르도 백작이 아놀드의 곁에 선 아델리오 공작을 바라봤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 있는 공작을 감흥 없는 눈으로 응시한 페르도 백작이 느릿하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델리오 공작님.”
“어떠한 언질도 없이 불쑥 찾아와 미안합니다. 하지만…… 오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
그의 말에 페르도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어떻게 그를 막을 수 있을까. 아델리오 공작은 정말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기억을 되찾았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을 허투루 보내고 나서야 기억을 되찾았다. 더는 그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 또한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을 터이니.
“델시아는…….”
“델시아는 위층 침실에 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페르도 백작이 에드윈과 아놀드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그가 힐끗 본 에드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뒤에서 따라오는 아놀드 역시 잔뜩 굳은 낯이었다. 계단을 오른 페르도 백작이 찬찬히 문을 열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아놀드가 가장 먼저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델시아!”
에드윈은 쉬이 침실에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심호흡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두려움이 가득한 걸음으로 침대 옆에 선 에드윈의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델시아, 이게 무슨…….”
창백하게 질린 델시아의 얼굴을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에드윈의 몸이 휘청거렸다.
“델시아…….”
눈을 감은 제 모습을 목격한 델시아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녀가 아직 숨을 쉬고 있음에도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에드윈은 제 입을 틀어막으며 델시아를 멍청하게 응시했다.
“아버지, 상태가 갑자기 악화한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아놀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에 가까운 음성으로 물었다.
“델시아의 친구라는 마법사가 힘을 썼는데도 별다른 차도가 없더구나. 아마도…… 그동안 힘겹게 버텨 오던 심장이 힘을 다한 것이겠지.”
“그, 그럼 마법사는…….”
“볼일이 있어 숲을 비웠다더구나. 그의 도움이 너무나 간절하지만, 자리를 비워서 어쩔 수 없단다.”
페르도 백작의 설명에 아놀드가 침대 기둥을 잡고 주저앉았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죄책감이 다시금 대가리를 들었다. 다 버린 줄만 알았던 죄책감이 아놀드의 몸을 장악하려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놀드는 허망한 눈동자로 입을 뗐다.
“이대로, 이대로 델시아를…….”
“아놀드,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아직은 델시가 잘 버텨 주고 있잖니. 델시도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게다.”
페르도 백작은 우직하게 말했으나 그의 얼굴은 이미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텨 줄지 모르겠어요. 이런 모습으로 얼마나 더…….”
아놀드가 흐느끼듯 말했다. 힘겨운 모습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제 동생이 대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간신히 버틴다고 과연 사는 것일까. 숨이 붙어 있다고 그게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끝없는 의문과 죄책감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자신이 조금 더 유능한 기사였다면, 자신이 조금 더 날쌨다면. 그랬다면 델시아는 지금 에드윈과 행복하게 지냈을 텐데. 아니, 차라리 자신이 죽었다면…….
아놀드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닦을 생각도 않고 주저앉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델시아.”
델시아를 응시하며 눈을 끔벅거리기만 하던 에드윈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델시아의 뺨에 닿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델시아의 온기에 에드윈의 손이 움찔거렸다.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그녀의 뺨을 쥐고 입을 맞추며 안식을 느꼈는데.
제게 눈을 맞춰 오던 쪽빛 눈동자가, 남색보다는 보라색이 도드라졌던 쪽빛 눈동자가, 보석을 박아 넣은 듯 생기로 반짝였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에드윈이 그녀의 속눈썹을 알알이 셀 듯 바라봐도 델시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가…….”
많이 늦었노라고. 늘 곁에 있던 당신을 바보같이 잊고 말았노라고. 에드윈이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의 델시아, 사랑하는 델시아.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에드윈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켜 내느라 핏대를 세워야만 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델시아의 뺨을 쥔 에드윈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델시아의 온기에 안도감이 느껴지기는커녕 불안했다. 이 온기가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아 무서웠다. 한날한시에 저와 함께 눈을 감을 것으로 생각했던 델시아가, 저를 두고 떠날 듯하여 두려웠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을 먼저 저버린 제가 감히 바라건대, 저를 위해 희생한 그녀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신이 있다면 델시아가 아닌 저를 데려가야 한다.
울음을 참는 에드윈의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미약한 온기가, 실낱같은 숨소리가 어떻게든 이어지기를. 멈추지 않기를.
그러나 간절한 바람은 늘 이뤄지지 않는다. 언제나 보란 듯이, 비웃는 듯이 정확히 반대로 이뤄진다.
곁에서 델시아의 상태를 주시하던 덱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백작님!”
협탁에 놓은 마력석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델시아의 몸에 흐르는 마력의 움직임이 격렬해지자 반응한 것이다. 덱스가 긴장한 낯으로 마력석을 지켜봤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쉴 새 없이 깜빡거리던 마력석이 이내 꺼멓게 죽었다.
“……아, 아가씨!”
덱스가 허둥지둥 델시아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고, 그녀의 심장께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한 행위를 몇 번이고 반복하던 덱스가 당혹감이 깃든 눈으로 페르도 백작을 바라봤다.
“배, 백작님.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숨을…….”
말을 잇지 못하는 덱스의 모습에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의 손을 잡고 외쳤다.
“데, 델시. 숨을 쉬렴. 응? 델시!”
다급한 목소리에 주저앉아 있던 아놀드가 벌떡 일어나 델시아를 쳐다봤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과 다른 게 하나 없는 얼굴인데, 숨을 쉬지 않는다니. 제 동생이 숨을 쉬지 않는다니.
“거, 거짓말……. 장난치지 마, 델시아. 이런 장난 재미없는 거 알잖아.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아놀드가 절규에 가까운 음성을 내지르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