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74화 (74/94)

<74>

“어머, 어머.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이른 아침부터 활기차게 행동하던 엘라가 어디선가 가십지를 들고 와 부산스럽게 굴었다.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며 연방 고개를 내젓던 엘라가 델시아에게 가십지를 건넸다.

델시아는 엘라의 유난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십지를 펼쳤다.

<켈리안 후작가, 위법 행위 다수 저질러>.

자극적인 제목 아래에는 더욱 자극적인 내용이 가득 적혀 있었다. 길고 자극적인 기사의 요지는 이러했다. 켈리안 후작이 불법적으로 노예 거래를 하였으며, 탈세는 물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증거가 다수 있다고. 또한, 주변 귀족들에게 사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는 내용까지 신랄하게 쓰여 있었다.

기사를 확인한 델시아가 다소 놀란 낯으로 중얼거렸다.

“켈리안 후작가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델시아는 제게 미묘한 적의를 보이던 켈리안 후작 부인을 떠올렸다. 아무리 평소 행실과 소문이 좋지 않다고 해도 이 정도로 끔찍한 짓까지 저질렀을 줄은 몰랐다. 엘라는 그녀의 반응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맞장구쳤다.

“그렇죠? 믿기지 않죠? 늘 다른 귀족들에게 못살게 굴던 켈리안 후작가가 이런 식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줄은 신께서도 모르셨을 거예요.”

“그래도 켈리안 영애는 친절하셨어.”

보니타 켈리안의 이지와 친절은 사교계에서 유명했으니 말이다. 엘라 역시 보니타 켈리안만큼은 인정했다.

“그렇죠. 켈리안 영애께서는 참 좋으신 분이죠. 또 유일한 후계이시니…… 아마 가문을 잇지 않으실까요?”

어깨를 으쓱인 엘라는 델시아에게서 가십지를 건네받아 정리했다.

“아가씨,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오늘은 가져다드릴까요?”

근래 델시아는 몸이 힘들어도 식당에서 제 아버지와 식사를 함께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이 나지 않았다. 델시아는 민망한 얼굴로 부탁했다.

“응. 그렇게 해 줄래?”

“그럼요. 금방 다녀올게요. 잠시만 계세요.”

엘라가 그렇게 말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엘라가 침실을 나가고 델시아는 가십지의 내용을 곱씹다가 다시금 에드윈의 서신을 떠올리고 말았다. 제게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할 때마다 점점 체념하게 됐다.

그러나 에드윈에 관한 일은 쉬이 체념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남아 있었는지도 몰랐던 체념이 지치지도 않고 대가리를 들어 오는 것이다. 제 죽음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던 델시아는 에드윈의 소식을 듣고 저도 모르게 그와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흔들렸다.

미련이 생겼다. 가져서는 안 될 미련이 생기면, 삶에도 미련이 생기고, 제 선택을 후회하게 되고 그러다……. 델시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에드윈이 더는 저를 흔들지 않기를 바라야만 했다.

“아가씨, 음식 가지고 왔어요. 존 아저씨가 아가씨를 걱정하셔서 안심시켜 드리고 오느라 조금 늦었어요.”

엘라가 델시아의 침실에 들어서며 너스레를 떨고는 델시아의 식사를 돕기 시작했다. 침실에서의 식사는 간소했다. 존은 다양한 음식을 올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엘라가 거절했다. 델시아가 먹는 음식은 한정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엘라는 찬찬히 식사하는 델시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클라우드 님의 치료를 받으면 좋아지는 게 느껴지세요? 힘이 불끈거리며 솟아오른다거나 안뜰 열 바퀴 정도는 가볍게 뛸 수 있을 정도로 활기가 생기신다거나요!”

“……음.”

터무니없는 예시들이었지만, 델시아는 고민하는 척 대답을 아꼈다. 일전에는 클라우드의 치료를 받으며 몸이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엊그제와 어제는 피를 보기까지 했다. 하여 델시아는 제게 정말 끝이 다가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으응. 조금은.”

“그래요? 다행이네요! 클라우드 님께서 아가씨 곁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죠?”

“으응.”

느릿하게 대꾸한 델시아가 스푼을 내려놓고는 식사를 마쳤다.

“벌써 다 드셨어요? 얼마 안 드신 것 같은데…….”

테이블을 확인한 엘라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으나 델시아는 웃으며 납작한 배를 통통 두드렸다.

“배불러.”

“그럴 리가요…….”

배부르도록 음식을 드신 적도 없으면서. 작게 중얼거린 엘라가 체념하고는 테이블을 치웠다. 엘라가 얼마 비워지지 않은 접시를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델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해가 뜬 하늘과 푸른 숲,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건물. 날이 지날수록 더 간절하게 눈에 담게 됐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델시아는 미련이 묻어나는 눈동자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어젯밤에 쓰다 만 다이어리를 마저 적었다.

“아가씨, 클라우드 님께서 오셨어요!”

“벌써?”

“네. 오늘은 유독 바빠 보이시더라고요. 옷차림도 평소와 좀 다르시고요. 오늘 아가씨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이곳으로 클라우드 님을 모실까요?”

“으응. 오늘만 그렇게 해 줄래?”

델시아는 다이어리를 베개 아래에 숨기고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클라우드, 좋은 아침이야. 침실까지 오게 만들어서 미안해.”

“괜찮아. 오늘은 내가 일이 급해서 빨리 온 거니까.”

엘라가 끌어다 놓은 의자에 앉은 클라우드가 후드를 벗었다. 엘라의 말대로 오늘 클라우드의 차림은 평소보다 활동적인 듯하면서도 꽁꽁 싸맨 느낌이었다. 델시아는 클라우드에게 손을 내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라우드, 오늘 약속이라도 있어?”

“음, 아니. 갈 곳이 있어서.”

“그래? 일이 급한 거라면 안 와도 됐는데…….”

“네 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어.”

클라우드의 말에 델시아가 살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저라도 왔을 것이다. 제 친구의 상태가 이렇다면 정말 망설임 없이 달려왔을 것이다. 델시아는 침실을 나가지 못한 채 문 근처를 서성이는 엘라에게 말했다.

“엘라, 알렉스 경과 차라도 한잔해.”

“아, 아가씨!”

“나 괜찮으니까 어서 가 봐. 알렉스 경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델시아의 말에 엘라가 얼굴을 붉히며 뺨을 긁적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침실을 나섰다.

“오늘은 어때?”

“뭐가?”

“내 몸 상태. 어제보다 안 좋아졌어?”

델시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클라우드는 그런 질문을 해 오는 델시아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 좋아지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 델시아 네 바람대로 어제보다 안 좋아졌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늘 어제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고 말하잖아.”

뒤늦은 수습에 클라우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델시아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은 못 와. 며칠간은 네 몸 상태가 악화하는지 호전하는지 알 수 없어.”

“괜찮아. 그동안 열심히 치료해준 것도 있고……. 별일 없을 텐데, 뭐. 볼일 잘 보고 와.”

“네 말처럼 정말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 델시아.”

클라우드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클라우드의 심장은 조금 불안하게 뛰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꼭 델시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 예감.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델시아를 살리려면, 며칠간 델시아의 상태를 살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가야만 했다.

* * *

“이, 이런 빌어먹을!”

집무실을 뚫고 나온 고성이 켈리안 후작저를 뒤흔들었다. 켈리안 후작은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조리 바닥으로 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황실에서 나온 조사단은 그런 켈리안 후작을 지켜보다가 움직였다.

조사단원 두 명이 씨근덕거리는 켈리안 후작의 양팔을 잡았다. 방금까지 난동을 부리던 켈리안 후작이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이거 놔라! 네놈들이 감히 내게 손을 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와서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게야!”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입니다.”

조사단원 하나가 딱딱하게 말하고는 켈리안 후작을 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이, 이거 놓으라 하였다!”

켈리안 후작은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조사단 마차에 올라타야만 했다. 수도에서도 다소 후미진 곳이 있는 후작저는 다시 잠잠해졌다. 보니타는 조금 착잡한 눈으로 제 아버지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상황을 수습할 생각에 머리가 아파 왔다.

제 아버지가 제 말에 귀 기울여 광산 매입을 다른 귀족들에게 종용하는 행위만 멈췄어도 조금은 상황이 나아졌을 텐데. 보니타는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을 나왔다.

한편, 페르도 영지로 내려갈 채비를 마친 에드윈은 조금 들뜬 상태였다. 이토록 들뜬 제 주인이라니. 테오는 고개를 좌우로 내젓다가 에드윈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안 좋을 일이 없잖아.”

“서신은 물론 꽃다발까지 거절하신 델시아 아가씨께서 주인님을 반기실 리 없잖아요.”

“닥쳐.”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사실을 말할 뿐이고…….”

말을 늘어놓던 테오는 에드윈의 사나운 표정에 입을 꾹 다물고는 어색하게 움직였다.

“다녀오지.”

“조심히 다녀오세요, 주인님. 괜히 울지 마시고요.”

“닥쳐.”

차갑게 쏘아 댄 에드윈이 페르도 영지를 향해 달려갈 마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는 에드윈의 표정은 설레는 듯 걱정하는 듯 오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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