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분명 내가 당분간 침실과 집무실에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주, 주인님…….”
“내 말이 전달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전달됐음에도 몰래 들어온 건가.”
에드윈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안나를 쳐다봤다. 달달 떨리는 몸이 무척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액자와 영상석을 누가 지하 창고에 놓았는지 의심하던 중이어서 더 예민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
안나의 대답을 기다리던 에드윈이 액자를 벽에 기대 놓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에드윈이 다가올수록 안나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으며,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원래부터 간이 큰 편은 아니었기에, 지레 겁먹은 것이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그게, 그게…….”
안나는 불안한 듯 떨리는 동공으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늘 청소하던 시간대라 저도 모르게 그만……. 하녀장님의 말씀을 잠시 잊었어요.”
“지나치게 떨면서 말하는 게 수상하다고 느껴지는군. 정말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나.”
“사, 사실이에요. 정말, 정말 잠시 잊고 있다가 주인님께서 오신 걸 보고 기억났어요.”
안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안나의 말대로라면 분명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 텐데, 그녀의 몸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만큼이나 달달 떨리고 있었다.
저는 분명 사용인들에게 무섭게 군 적도 없을 뿐더러 테오와 하녀장을 제외하고는 직접 명령을 내린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름이 뭐지.”
“……예?”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에드윈의 물음에 안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섣불리 이름을 말했다가 불이익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주인에게 이름을 말하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던가?”
그러나 에드윈의 꾸짖음에 몸을 움츠리며 제 이름을 꺼내야만 했다.
“아, 안나입니다.”
“그래. 평소 내 침실과 집무실을 담당하여 청소하였고, 당분간은 청소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음에도 너무나 성실하여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하녀의 이름이 안나였군.”
비꼼이 섞인 말에 안나가 얼굴을 붉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앞치마 자락을 쥔 손이 바들거렸다.
“그런데 안나.”
“……네, 주인님.”
“당분간 들어오지 말라는 지침과 함께 침실과 집무실 열쇠를 반납해야 했을 텐데.”
“…….”
“반납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여분의 열쇠라도 만들어 둔 건가.
그렇게 묻는 에드윈의 눈동자가 첨예했다. 일반적인 하녀라면 여분의 열쇠를 만들어 둘 필요가 없었다. 혹여 열쇠를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보안을 위해서라도 전부 바꿔야만 하니까. 에드윈은 다소 수상한 구석이 있는 안나를 응시하며 느릿하게 되물었다.
“여분의 열쇠가 네게 필요한 일이 있나.”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여분의 열쇠가 제게 있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설사 그런 걸 찾아낸다고 해도 제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줄 리도 없었고. 하여, 안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애꿎은 치맛자락만 괴롭힐 뿐이었다.
“왜 대답이 없지.”
안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켈리안 후작이 했던 말과 그가 주었던 돈, 그리고 제 이야기를 들으면 진노할 게 분명한 제 주인의 반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대로 고해야 할지 아니면 켈리안 후작의 이야기는 빼고 전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끝까지 시치미를 떼야 할지.
안나는 갈등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말로는 좋지 않을 터였다. 당장에 시치미를 뗀다고 해도 저를 의심하기 시작한 제 주인은 자초지종을 알아보려 할 것이다. 제가 실토하여 받는 벌과 제 주인이 직접 움직여 주는 벌은 엄연히 다르다.
안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고민하던 안나가 결국,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이제야 대답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
“죄송합니다. 전부 제가 모자라고 어리석은 탓입니다.”
안나는 찬찬히 무릎을 꿇었다. 에드윈의 앞에 무릎을 꿇은 안나가 붉어진 눈시울로 말을 이었다.
“후, 후작님…… 켈리안 후작님께서 시키셨어요. 전부요.”
안나의 이야기를 듣는 에드윈의 얼굴이 서서히 식어 갔다. 그녀의 이야기가 전부 끝나자 에드윈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심한 일을 벌인 켈리안 후작과 당장 눈앞의 금전만을 바라보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안나가 우스웠다.
에드윈은 진실을 고했음에도 여전히 불안한 듯 보이는 안나에게 물었다.
“다른 것은.”
“예, 예?”
“다른 것에는 손대지 않았나.”
“……네. 다른 건 손대지 않았어요. 아, 아무것도요.”
안나가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했다. 에드윈은 안나의 대답에 의미 모를 표정을 짓다가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가 불안한 듯 우물쭈물하자 에드윈이 덧붙였다.
“왜 그러고 있지. 처분이 두려워 그러는 건가.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보다 자비로운 처사일 테니.
안나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다가 찬찬히 침실을 나섰다. 안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에드윈은 벽에 기대 두었던 액자를 가져와 본래 자리에 걸었다. 그제야 제 침실 같았다.
그간 잊었던 액자가 제자리에 걸리자 안정감이 들었다. 에드윈은 제가 기억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게 분명한 액자와 영상석을 숨기도록 지시한 켈리안 후작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전에 광산을 핑계로 찾아왔던 건 안나에게서 보고받을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인가.
“……아닐 테지.”
그 정도로 안나를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을 리 없다. 에드윈은 액자를 한 번 더 응시하고는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아, 주인님.”
“무슨 일이지, 테오.”
“이런 서신이 와서요.”
집무실에 들어서자 테오가 서신 하나를 건네며 덧붙였다.
“페르도 소백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렇군.”
에드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놀드가 보내 온 서신을 응시하며 고민했다. 아놀드가 제게 왜 서신을 보낸 것인지, 혹여 이 안에 델시아와 관련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인지. 잠시 고민한 에드윈이 찬찬히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을 찬찬히 읽은 에드윈이 서신을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고는 그 안에 든 서류를 꺼냈다. 켈리안 후작에 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힌 서류였다.
에드윈은 무심한 눈동자로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테오에게 손짓했다.
“예, 주인님.”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들은 테오가 찬찬히 곁으로 다가오자 에드윈이 들고 있던 서류를 테오에게 내밀었다.
“……이건.”
서류의 내용과 수신인이 누군지 확인한 테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켈리안 후작의 만행이 적힌 서류를 왜……. 그간 알고도 침묵하던 제 주인이 아니던가. 에드윈은 제 대답을 기다리듯 시선을 맞춰 오는 테오에게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보면 알잖아. 어디로 보내야 할지.”
“……예.”
테오가 다소 떨떠름한 음성으로 대답하고는 에드윈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윈이 집무실을 나간 테오의 뒤에 대고 말했다.
“내일 페르도 영지에 방문할 생각이니, 그곳에도 서신을 보내도록.”
“예, 예?”
복도를 걷던 테오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지만, 에드윈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델시아.”
“클라우드, 고마워.”
델시아는 제게 무어라 말하려는 클라우드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제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덤덤한 척 웃는 델시아의 손이 조금 떨렸다.
“델시아, 너 코피 나.”
“……어?”
“너 코피 난다고.”
클라우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손수건을 델시아에게 건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는 기침하다 피를 보이고 오늘은 치료를 마치자마자 코피를 쏟았다. 징조가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주일도 채 못 버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미안한데,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줘.”
피를 모두 닦아 낸 델시아가 코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나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클라우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못 들은 듯 보이는 클라우드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 델시아가 한 번 더 이야기했다.
“클라우드,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줘. 부탁이야.”
“……델시아.”
“으응.”
“내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네 아버지는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몰랐다고 해도 금방 알게 되겠지.”
네 상태가 이렇게나 심각한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잖아.
낮은 목소리로 말한 클라우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섰다. 오늘도 델시아의 인사는 듣지 않았다. 그렇게 텔레포트하여 버려진 숲으로 돌아온 클라우드가 제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았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게 무언가를 할 기회가 주어지기는 할까.
클라우드는 찡그린 얼굴로 고민했다. 시간이 없다. 델시아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다. 클라우드는 그 안에 델시아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야만 했다.
“……하.”
한숨을 내쉰 클라우드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델시아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더 벌 수 있는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해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클라우드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오후를 보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