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72화 (72/94)

<72>

“이건…….”

집무실로 들어온 에드윈이 책상 위에 놓인 장미 꽃다발과 서신을 보며 뒷말을 삼켰다. 얼마 전에 델시아에게 보낸 것인데 이게 왜 제 집무실에 있는가. 심지어 조금 시든 상태였다. 분명 생기를 가득 머금은 장미꽃을 보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눈을 찡그린 에드윈이 책상 옆 설렁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네, 주인님.”

“테오, 이게 뭐지.”

“아, 델시아 아가씨께서 돌려보내셨다고…….”

“돌려보냈다고?”

“네.”

테오의 조심스러운 대꾸에 에드윈이 주먹을 꼭 쥐었다가 폈다. 아무리 제게 실망했다 하더라도 좋아하던 장미꽃과 서신까지 돌려보낼 줄은 몰랐는데. 에드윈은 제게 돌아온 시든 장미꽃과 서신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면 제가 욕심을 부려서 델시아가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노력으로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천천히 차근차근 델시아에게 다가가야 했건만, 장미꽃과 서신이 조금 과했던 모양이다. 에드윈은 제 명령을 기다리며 서 있는 테오에게 장미꽃을 치우라고 지시했다. 테오가 장미꽃을 들고 집무실을 나서자 서신만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신은 봉인이 풀린 채였다. 델시아가 서신을 읽었음을 확인한 에드윈이 종이를 손에 꼭 쥐었다. 제가 늦은 것일까. 그녀의 마음을 돌릴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일까.

에드윈은 착잡함이 담긴 시선으로 서신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뱉었다. 그녀의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꿈에 자주 나와 또렷하던 얼굴은 어느새 흐려져 있었다. 에드윈은 델시아의 얼굴을 서서히 잊어 가는 제가 우스웠다. 제게 그럴 자격이 남아 있던가.

“……델시아.”

흐릿해진 얼굴을 떠올리려 에드윈은 눈을 감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뚜렷해지는 일도, 뒤늦게 떠오르는 일도 없었다. 책상에 손바닥을 짚고 서 있던 에드윈이 이내 눈을 떴다. 그녀와 제가 그려진 그림이 든 액자를 창고에서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에드윈은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와 지하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창고에서 천이 씌워진 액자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액자는 금세 에드윈의 손에 들어왔다. 에드윈은 씌워진 천을 걷어 액자를 확인했다.

델시아와 제가 그려진 그림이 눈에 들어오자 희미해진 델시아의 얼굴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됐다.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림을 감상하며 눈에 담던 에드윈이 액자를 들고 집무실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액자 옆에 놓인 상자 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멈칫거린 에드윈이 액자를 바로 아래에 내려놓고 상자를 확인했다. 잡동사니들 틈에서 반짝이는 물건을 찾으려 뒤적거리던 에드윈의 손에 익숙한 게 잡혔다.

“……영상석.”

에드윈이 그토록 찾던 영상석이었다. 사용인들에게 물어도 찾을 수 없었던 영상석을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영상석이 왜 이곳에 있는지, 누가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인지, 영상석과 마찬가지로 액자 또한 왜 이곳에 있는지.

일전에는 액자에 관한 기억이 없어 가진 적 없는 의문이었다. 그때는 이런 액자가 있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하기만 했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저는 치우라고 명령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에드윈은 찡그린 얼굴로 생각하다가 액자와 영상석을 챙겨 집무실로 올라왔다. 집무실 책상에 액자를 놓으려던 에드윈이 멈칫거렸다. 생각해 보니 액자는 본래 침실에 걸어 뒀던 게 아니던가.

그래서 제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무언가 사라진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은 것인가. 에드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액자를 챙겨 다시 침실로 갔다. 굳게 닫힌 침실 문을 열자 누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너는.”

에드윈이 가라앉은 얼굴을 한 채 제 침실에 있던 상대를 바라봤다. 제 침실과 집무실을 도맡아 청소하던 하녀, 안나였다. 에드윈과 눈이 마주친 안나는 희게 질린 낯을 하고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주, 주인님.”

갈색 동공이 좌우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 * *

“델시, 몸은 좀 어떻니? 클라우드가 치료를 해 줬을 텐데도 안색이 좋지 않구나.”

외부 일정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온 페르도 백작이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아침에도 그다지 안색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치료를 받은 오후 역시 비슷했다. 그래도 클라우드의 치료를 받으면 얼굴이 조금 편안해 보였는데 말이다.

“아니, 아니다. 불편한 곳은 없니?”

델시아의 대답을 기다리던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질문 방향을 달리하여 물어 왔다. 제 딸아이에게 몸 상태가 어떤지 묻고 그 답을 듣기에는 조금 겁이 났다. 일전과는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직감이 들어 괜히 피하고 싶어졌다.

델시아의 마른 입술은 느리고도 무력하게 달싹거렸다.

“아직은요.”

애매하면서도 불안한 대꾸에 페르도 백작이 그녀 몰래 주먹을 꼭 쥐었다. 듣고자 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듣고 싶었던 대답도 아니었다. 피하고 싶었던 대답 중 하나였다. 제 딸아이가 아픈 얼굴로 웃으면서도 늘 말해 오던 괜찮다는 대답이 변했다.

“델시…….”

페르도 백작은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냐고 묻지 못했다. 오늘따라 참으로 이상했다.

“아버지, 안 피곤하세요? 매일 바쁘시잖아요.”

델시아가 지친 낯으로 묻자 페르도 백작이 불안감을 꾹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쁘단다. 그래도 델시 너와 이야기할 기력은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

“무리하지 마세요.”

다정한 걱정에도 페르도 백작은 쉬이 웃어 보일 수 없었다.

“그건 아비가 하고 싶은 말이다. 델시, 너야말로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하려무나. 알겠니?”

델시아는 제 아버지의 말에 살짝 웃으며 주억거렸다. 델시아가 쉬도록 침실에서 나온 페르도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아래층과 가까워질수록 소란스러웠다.

“……정말?”

“그래. 그렇다니까. 아델리오 공작님한테서 이따만 한 꽃다발과 서신이 왔는데 아가씨께서 돌려보내셨어!”

“세상에나. 아가씨께서 그러셨다니……. 다투신 건 아니겠지?”

“이게 무슨 소란이냐.”

델시아의 이야기가 들려오자 페르도 백작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계단 옆에 옹기종기 모여 떠들던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그게…….”

“꽃다발과 서신이라니. 무슨 말이지?”

“그게…….”

아델리오 공작이 델시아의 앞으로 꽃다발과 서신을 보내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페르도 백작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일그러진 낯으로 가만히 서 있던 페르도 백작은 사용인들이 제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오늘따라 델시아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아델리오 공작이 자꾸만 델시아를 흔들어서 제 딸이 곤혹스러워하는 것일까. 집무실로 돌아온 페르도 백작은 책상 앞에 앉아 중얼거렸다.

“이러다 또다시 델시를 찾아오기라도 하면…….”

잠시 고민하던 페르도 백작이 책상 옆에 둔 영상구를 두드렸다. 불투명한 영상구는 일렁거리며 투명하게 변하더니 이내 아놀드의 얼굴이 나왔다.

“아놀드.”

― 아버지, 좋은 오후예요.

“그래, 아놀드. 좋은 오후란다.”

― 표정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아놀드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묻자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아니란다. 아비는 괜찮아. 다만, 델시가 걱정되어 연락했단다.”

― 네? 델시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니면 상태가 악화한 거예요?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쉴 새 없이 물어 오는 아놀드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어 보인 페르도 백작이 입을 열었다.

“델시아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단다. 그런 것보다도…… 아델리오 공작이 신경 쓰이는구나.”

― 아델리오 공작님이요?

아놀드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델시에게 꽃다발과 서신을 보내 왔다던데, 이러다가 이곳까지 찾아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단다.”

― 아델리오 공작님이 꽃다발과 서신을……. 그러면 델시아는요? 델시아는 어떻대요?

“공작가로 돌려보냈다고 하더구나.”

페르도 백작의 대답에 아놀드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델시아와 그녀를 걱정하는 제 아버지 그리고 델시아에게 꽃과 서신을 보낸 아델리오 공작의 심정이 모두 이해가 갔다. 아놀드는 가라앉은 기색의 제 아버지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부분이 뭔지 알아요. 그런데 이 문제는…… 저나 아버지가 막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아요.

제 아들의 말에 페르도 백작이 입꼬리를 올려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아놀드. 맞는 말이란다. 그래서 더 애석할 노릇이지.”

― 델시아가 먼저 이야기 꺼낼 때까지는 모른 척하고 계시는 건 어떠세요? 분명 델시아도 아버지께서 걱정하실까 봐 말 안 했을 거예요.

입을 다문 페르도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겠구나.”

제가 델시아를 걱정하듯 제 딸도 저를 걱정할 것이다. 그러니 아놀드의 말처럼 델시아가 해결하도록 가만히 두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고맙단다, 아놀드. 들어가 보려무나.”

― 아니에요. 조만간 영지로 내려갈게요.

“그래. 좋은 오후 보내거라.”

― 아버지도요.

이내 영상구가 툭, 끊어졌다. 페르도 백작은 영상구의 연결이 끊어진 뒤에도 한참 동안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