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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69화 (69/94)

<69>

“아가씨, 아델리오 공작님께서 오셨어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델시아에게 엘라가 다가와 말했다. 델시아는 그녀의 말에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드윈을 만날 채비를 했다.

연한 보라색의 차분한 드레스를 입은 델시아가 엘라의 도움을 받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 앞에 선 델시아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델시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고는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초조한 듯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채 앉아 있던 에드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델시아를 쳐다봤다. 델시아는 잔뜩 야윈 에드윈의 얼굴을 보고 일순 마음이 흔들렸지만, 굳게 다잡았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한 델시아가 그의 맞은편에 찬찬히 앉았다. 에드윈은 델시아의 얼굴을 응시하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에드윈은 페르도 영지로 오기 전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한 것이다. 델시아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잠들 수 없었다. 이는 마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꽤 긴 거리였음에도 에드윈은 졸음은커녕 일말의 피로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델시아를 만날 수 있다는데 그런 불필요한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델시아.”

간신히 목소리를 낸 에드윈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이야기는 그때 끝난 걸로 아는데, 아직 더 남은 이야기가 있던가요?”

델시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에 에드윈이 주먹을 꽉 쥐다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후회했습니다.”

“공작님께서 후회하실 일은 없어요.”

“당신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해 대고, 상처를 준 일은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기억을 잃으셨고, 저 또한 그러시리라 짐작하고 있었어요.”

에드윈은 체념한 듯한 델시아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는 양 무심하고 무덤덤하게 굴었다. 에드윈은 그 사실을 깨달을수록 가슴이 아팠다.

“혹여 제가 상처를 입었을까 걱정하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생각보다 무딘 편이라 금방 잊었어요.”

“델시아, 당신은…….”

말을 잇던 에드윈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도 의례적인 말들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말을 잃은 채 한참 고민하던 에드윈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미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공작님.”

“아니면 저와 마주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서 그러시는 건가요?”

“공작님.”

“델시아,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당신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요.”

그의 말에 델시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델시아의 입술은 다시 열렸다.

“공작님, 저는 신이 아니에요.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기회를 주는 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괜찮아요.”

델시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델시아.”

“공작님, 지나간 일은 잊으세요. 그러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울 테니까요.”

“델시아, 대체…….”

“제가 공작님께 내 드릴 수 있는 시간은 여기까지예요. 저를 또 찾아오신다고 해도, 저는 공작님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지금.”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한 델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찬찬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에드윈이 절박한 눈으로 저를 지켜보는 가운데, 델시아는 응접실의 문을 꽉 닫고 도망치듯 침실로 올라갔다.

“……아.”

침실로 올라온 델시아는 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켰다. 혹여 아직 아래층에 있을 에드윈에게 들릴까 입을 막은 채 울음을 참던 델시아는, 그가 돌아갔다는 엘라의 말을 들은 후에야 참았던 것을 터트렸다.

“흐…… 흐윽.”

그녀는 이불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이불에 떨어져 꽃 진 자리처럼 흔적을 남겼다. 드문드문 피어나던 눈물 자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이내 이불을 축축이 적셨다.

델시아의 쪽빛 눈동자에 어린 물기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한 추억들이 쉬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듯.

에드윈과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에, 마지막을 고하는 일은 더욱더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에드윈을 밀어내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괴로웠다. 제 심장만 괜찮았다면, 제게 시간만 많았다면.

감히 에드윈의 곁에서 행복을 바랐을 것이다. 감히 에드윈을 바랐을 것이다.

“흐, 흐윽. 흑……. 흐흐흑…….”

가슴이 미어졌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어떻게든 내쉬며 델시아는 흐느꼈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마음은 전혀 추슬러지지 않았다. 제게서 에드윈을 완전히 지워 내는 일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저만은 에드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에드윈이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준다고 해도, 저만은 그런 에드윈을 보듬어 주리라 다짐했다. 제 이기심으로 에드윈이 다시 눈을 뜬 것이니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결국 에드윈에게 상처를 주고야 말았다. 델시아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차라리 눈을 떴을 때 머나먼 미래였으면 좋겠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뜨면, 미래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로. 에드윈이 저를 잊었을 때쯤으로. 차라리 제가 상처받는 게 나았다. 저로 하여금 에드윈이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에드윈.

자꾸만 이기적으로 굴어서. 누구보다도 혼란스러울 당신에게 자꾸만 상처를 줘서.

에드윈에게는 닿지 않는 말을 중얼거린 델시아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물기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 * *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은 우울에 젖은 채였다. 에드윈은 멍한 눈동자로 허공과 창밖만을 번갈아 응시했다. 테오가 곁에서 무어라 떠들어 대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말이다.

“주인님.”

테오가 다시 에드윈을 불렀으나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마차는 한참 더 달렸다.

“……테오.”

입을 꾹 다문 채로 있던 에드윈이 드디어 입을 열자 테오가 고개를 돌려 제 주인을 쳐다봤다.

“예, 주인님.”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더군.”

“…….”

“상처를 많이 받은 탓이겠지. 해 줄 이야기가, 물을 이야기가 많은데 제대로 하고 온 게 없어.”

“…….”

에드윈이 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치겠군.”

“괜찮으세요, 주인님?”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아. 속이 답답해. 무언가에 꽉 눌린 것처럼 답답하다.”

에드윈은 저택에 도착해서도 무기력하게 행동했다. 집무실 의자에 앉은 에드윈은 몇 시간가량을 꼼짝 않고 있었다. 저녁 시간을 알리려 찾아온 테오에게 축객령을 내린 에드윈이 다이어리를 꺼내 매만졌다.

제가 델시아에게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것 하나만을 곰곰이 생각하던 에드윈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런 것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에드윈은 델시아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놀드의 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녀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그런 것을 떠올려 내는 게 더 중요했다.

델시아가 저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녀의 권리였으니까. 그리고 저는 용서받기에는 너무나 모질게 굴어 왔다. 열 손가락을 꼽는 것도 모자랄 정도로…….

“빌어먹을…… 빌어먹을.”

에드윈은 저 스스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빈 연무장으로 향했다. 검이라도 휘둘러야 답답함이 가실 것 같았다. 에드윈은 파시오 대신 일반 롱소드를 꺼내 들었다.

― 그걸로 되겠느냐. 그깟 검을 휘둘러 봤자 속이 풀리기는커녕 되레 짜증만 잔뜩 일 게다.

“……파시오.”

― 델시아노르에게 한 방 먹은 네가 안쓰러워 오늘만 봐주마. 나를 쥐어라.

“우습군. 한 방 먹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파시오에게 대꾸하면서도 성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 오랜만이구나, 이 감각도. 휘둘러 보거라.

파시오의 말에 에드윈이 찬찬히 심호흡하다가 검을 휘둘렀다. 짚으로 만들어진 연습용 나무 인형을 앞에 두고 검을 휘두르는 에드윈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 나약한 아델리오.

그의 힘이 부족해서 손이 떨리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파시오는 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에드윈은 그러한 말을 들었음에도 일언반구도 없이 검만을 휘둘렀다. 수도의 저녁은 고요하고 잔잔했다. 뒤죽박죽 뒤섞인 것은 에드윈의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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