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67화 (67/94)

<67>

“공작님께서 무슨 이유로 저를 또 찾아오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서신을 받아 보셨을 텐데요.”

아놀드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에드윈은 물러서거나 돌아가지 않고 아놀드를 똑바로 쳐다봤다. 델시아와 꼭 닮은 쪽빛 눈동자를 보자 그녀가 더 그리워졌다.

“찾지 못한 기억이 있습니다.”

“…….”

“모든 기억을 되찾았는데도 그 부분에만 구멍이 있더군요.”

아놀드는 에드윈의 말에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아버지가 우려하던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아델리오 공작이 기억을 거의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미처 채우지 못한 마지막 기억까지 손에 쥐려고 하고 있었다.

“일단 응접실로 오십시오. 그래도 찾아오셨으니…….”

“고맙습니다, 소백작.”

에드윈은 아놀드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저번에 왔을 때와는 조금 다른 감상이었다. 그때는 아직 답답함이 잔재한 상태로 방문했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상태였다.

에드윈은 아놀드를 어떻게 설득하여 진실을 들어야 할지 내내 고민했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에드윈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번지르르한 말을 내뱉는 능력이 없었다.

응접실로 들어와 마주 앉은 두 남성의 시선이 차분히 교차했다.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쪽은 아놀드였다.

“말씀하십시오.”

“구멍 난 기억을 되찾으려면 소백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여 제게 도와달라고 하셔도 저는 공작님을 도울 수 없습니다.”

“소백작, 제 기억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데면데면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저를 떠보는 듯한 말에 아놀드가 시선을 회피했다. 에드윈의 말대로 아놀드와 에드윈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서부 변경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시간을 보냈으니 퍽 친밀한 사이라고 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억이 오롯한 에드윈에 한해서 적용되는 관계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고민하던 아놀드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잦은 만남을 가질 정도로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잦은 만남이라니 서운합니다. 딱 두 번 만났을 뿐인걸요.”

“공작님께서 무엇을 바라고 오셨는지 압니다만, 저는 해결책이 되어 드릴 수 없습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소백작.”

아놀드와 에드윈은 잔잔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 갔다.

“제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소백작 또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글쎄요.”

“사실은 확신합니다. 페르도 백작과 소백작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알고 있고요.”

잠시 말을 멈춘 에드윈이 테이블에 놓은 찻잔을 집었다. 따뜻한 차를 가만히 내려다본 에드윈이 차를 머금어 목을 축였다.

“제 기억에는 구멍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네. 그러셨습니다.”

“어디에 구멍이 나 있을 것 같습니까?”

“제게 물으셔도 저는…….”

아놀드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내젓자 에드윈이 입매를 올려 웃었다.

“단언하건대 소백작이 속으로 짐작하는 그 기억은 아닐 겁니다.”

“무슨…….”

“전장에서의 기억 말입니다.”

쐐기를 박듯 덧붙여진 말에 아놀드가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반응에 에드윈이 고개를 찬찬히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단언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에드윈은 여유롭게 말하고 있었으나, 사실 지레짐작한 것뿐이었다. 마지막 기억이 서부 변경이었으니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리라 유추하여 뱉어 낸 한 가지 가능성. 다행스럽게도 그 추측이 들어맞았다. 에드윈은 아놀드의 반응을 잠자코 기다렸다.

“기억하신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대체 왜 인제 와서 이러시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소백작.”

한숨을 삼킨 아놀드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서부 변경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날, 흑마법사의 기습 공격이 있었습니다. 흑마법사의 마법은 제게 향했고 곁에 계시던 공작님께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정확히는 제 동생을 지켜 내신 거겠지요.”

“…….”

“공작님께서는 눈을 감으시면서까지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제 동생을…… 그러니까 델시아를 잘 부탁한다고요.”

아놀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경하여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공작님은 관에 놓이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공작님을…….”

아놀드가 말을 멈추고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 동생이 살려 냈습니다. 마녀를 찾아가서 소원을 비는 것으로요.”

아놀드의 말을 잠자코 듣던 에드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에드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입을 틀어막았다.

“델시아가 공작님을 위해 희생했다고 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차갑게 식은 공작님의 몸에 온기를 불어넣은 건 제 동생의 심장이니까요.”

덤덤하게 말을 마친 아놀드와는 달리 에드윈의 얼굴은 처참했다. 아놀드는 그런 에드윈을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공작님의 몸에서는 델시아의 심장이 뛰고 있고, 델시아의 몸에서는 인공 마력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

“곧…… 그것마저도 멈추겠지만요.”

“그게 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에드윈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심장이 멈추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에드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자 아놀드가 말을 덧붙였다.

“마녀는 델시아에게 일 년을 사는 것만으로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델시아는 지난 반년간 공작님의 별채에서 시간을 허비했고……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없습니다.”

아놀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드윈의 무릎이 꺾였다. 에드윈은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카펫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황망하게 앞을 응시했다.

이제야 모든 걸 되찾았는데.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왜…….

“왜…….”

왜 제게 기회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인가. 대체 왜.

* * *

“아, 아가씨!”

“응, 엘라. 무슨 일이야?”

“어…… 수도에서 서신이 도착했는데요.”

“서신?”

델시아는 엘라의 말을 듣고는 당연히 아놀드에게서 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엘라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델리오 공작가에서 온 서신인데요……?”

“아델리오 공작가에서 서신이 왔다고?”

델시아가 그렇게 묻자 엘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건네 왔다. 서신을 조심스럽게 연 델시아가 내용을 확인했다.

“……아버지께서도 아셔?”

“아니요, 도착하자마자 바로 가져왔어요.”

서신 안에는 곧 찾아오겠다는 에드윈의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델시아는 은연중에 바라오던 상황이 실현됨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보내신 거예요? 공작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오겠대.”

“네?”

“여기로 오겠대.”

“어, 언제요?”

“곧.”

짤막한 단어에 엘라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도 모르겠어, 엘라. 왜 지금에서야…….”

왜 지금에서야 저를 찾아온다고 하는 것인지. 저를 찾아온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그가 뭘 할 수 있다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후회하는 일뿐일 텐데……. 그래서 에드윈이 기억을 되찾지 않기를 바랐었다. 그가 자책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신은 마지막 바람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에드윈을 멋대로 되살린 일에 비하면 너무나 과한 처사였다.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왜.”

델시아가 가라앉은 얼굴로 서신을 협탁에 올려 두었다.

“아가씨…… 오지 말라고 답신이라도 보낼까요? 그렇게 하면 마음이라도 편하시겠어요?”

엘라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에드윈이 온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녀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찾아온 에드윈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둘 생각이었다.

모든 게 끝이 났다는 것을 힘주어 말해 줄 계획이었다.

“엘라, 일단은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말아 줘.”

“하지만 백작님께서는 금방 알아차리실 텐데요?”

“괜찮아. 내가 말씀드릴게.”

그녀의 말에 엘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히 침실을 나섰다.

“……에드윈.”

한동안 꿈에 찾아오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직접 오기 위해 꿈에서 사라진 것이었을까. 델시아가 흐릿하게 웃었다.

“……왜 그랬어요.”

꿈에서만 만나면 못된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모진 말로 당신을 밀어내지 않아도 되는데.

델시아는 영지에 온 에드윈에게 모진 말을 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괴로웠다. 분명 말을 잇는 내내 눈물을 흘릴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해야 하겠지.

조용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할수록 우울하던 델시아의 마음은 정리되었다. 에드윈에게 해야 할 말 또한 점점 정리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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