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66화 (66/94)

<66>

“테오!”

에드윈이 설렁줄을 당기는 것도 모자라 커다란 목소리로 테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네, 주인님. 무슨 일이십니까?”

“페르도 소백작에게 서신을 보내라.”

“서신을요? 혹시 이번에도 제가…….”

“그래. 최대한 빨리.”

에드윈은 그렇게 말하고는 심각한 얼굴로 책상을 내려다봤다. 어제 느꼈던 다이어리 속 감정은 하룻밤 사이 에드윈의 몸에 융화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가라앉았던 기억까지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복잡한 기억과 감정 속에서 힘겨운 오전을 보낸 에드윈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테오를 불러 아놀드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시켰다.

“……대체 왜.”

대체 왜 잊고 있었던 것일까. 이 감정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가. 여러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떻게 외면하려고만 하였는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인가.

몰려드는 죄책감에 에드윈이 머리를 싸맸다. 혼탁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듯했다. 이리저리 흩어졌던 퍼즐들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잊고 있던 게 또렷해질수록, 정리될수록 에드윈은 죄스러웠다.

“빌어먹을.”

에드윈이 주먹을 꽉 쥐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제야 파시오가 해 왔던 말들이 이해가 갔다. 당시에는 저를 비웃기 위해 지껄이는 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파시오.”

― 시끄럽다, 아델리오. 네 머릿속이나 정리하고 말을 걸어라. 뒤죽박죽 섞여서 내 속이 다 울렁거리는구나.

파시오의 말에도 에드윈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왜 알려 주지 않았지?”

― 이제는 내 탓까지 하려는 게냐?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군.

“네가 직접 알려 줬다면 더 빨랐을 텐데, 왜…….”

― 내 도움을 받아 알게 되는 건 의미가 없잖아.

그렇게 말한 파시오가 웅웅 진동하다가 잦아들었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뜻이었다.

“허, 허억. 주인님!”

“그래, 테오. 서신은 잘 전했나?”

테오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에드윈이 물었다. 테오는 그의 기대 가득한 눈빛에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일이 바쁘시다고…….”

“그렇군.”

테오는 생각 외로 금세 수긍하는 제 주인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에드윈의 행동에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에드윈은 외투를 입으며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페르도 백작저일 터였다.

“테오, 준비 안 하고 뭐 하고 있지.”

“……예. 갑니다.”

에드윈은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서며 테오를 재촉했다.

* * *

비틀거리며 버려진 숲을 빠져나가던 델시아의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얌전히 따라오라니까!”

“이거 놔라! 건방진 인간 같으니라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이가 있는 것인지 고성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델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한 델시아는 불쾌한 광경을 맞닥뜨렸다.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남성이 한 여성을 끌고 가려고 하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위험한 상황에 델시아가 당황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여성의 계속되는 반항에 남성이 짜증 났는지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괴이한 마법을 부렸다. 남성의 손끝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여성을 위협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던 델시아는 일전에 클라우드가 주었던 반지가 끼워진 손을 내려다봤다. 마법을 어떻게 발동하는지까지는 듣지 못했으나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델시아는 남성이 있는 방향에 반지의 마력석이 향하게 둔 뒤, 눈을 질끈 감고 속삭였다.

“발동.”

작은 속삭임에도 반지의 마력석은 반짝이며 반응했다. 이윽고 하늘에 먹구름이 생겼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음에 이상함을 느끼고 실눈을 뜬 델시아는 하늘에 먹구름이 낀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껌뻑였다.

소리 없이 생긴 먹구름은 이리저리 씰룩이더니 이내 커다란 벼락을 뱉어 냈다. 그 벼락은 막을 새도 없이 남성을 향해 떨어졌다.

“호, 호신용 마법이라고 했는데…….”

범상치 않은 위력을 경험한 델시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델시아는 남성이 서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끈에 묶인 여성만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곳으로 서둘러 달려간 델시아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성이 있던 자리를 먼저 살폈다.

그러나 벼락에 맞아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벼락을 맞기 전에 어디론가 이동한 것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선을 돌린 델시아가 여성의 끈을 풀어 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인간이로군.”

“네?”

델시아는 저를 ‘인간’이라고 칭하는 여성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릴리 티타니아. 요정들의 여왕이다.”

자신을 요정들의 여왕이라고 소개한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숨겨 둔 날개를 펼쳐 보였다. 팔랑거릴 때마다 반짝이는 빛 가루가 떨어지는 날개를 델시아에게 보여 준 릴리가 이내 날개를 접었다.

“요정들의 여왕이라고요?”

“버려진 숲에 드나드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운이 좋았군.”

릴리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래. 나보다는 인간 네가 더 버거워 보이는군.”

“네?”

릴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델시아를 훑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델시아가 얼굴을 붉혔다.

“어찌 되었든 그대는 내 목숨을 구하였다.”

“저, 저는…….”

릴리는 델시아의 손을 맞잡고 힘주어 말했다.

“그대가 나를 도왔듯 나 또한 그대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니. 요정의 약속은 절대적이며, 어떠한 것이라도 들어주겠다.”

그렇게 말한 릴리가 검지로 델시아의 빗장뼈를 찬찬히 쓸었다. 그러자 기묘한 문양이 그녀의 빗장뼈 위에 피어올랐다. 이를 확인한 델시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이미 릴리는 사라진 뒤였다.

릴리가 서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델시아는 걸음을 옮겨 작은 숲으로 향했다.

“아가씨! 왜 거기서 나오세요?”

“으응, 오늘은 조금 걷고 싶었어.”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요?”

“괜찮아, 엘라. 그 정도로 안 좋지는 않아.”

델시아는 걱정 가득한 엘라의 물음에 다정하게 대답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델시아는 어두웠던 클라우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클라우드의 말도 이해가 갔다.

하기는. 저처럼 바보 같은 존재를 처음 봤기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델시아는 씁쓸하게 미소 짓다가 엘라를 바라봤다.

“알렉스 경과는 어때?”

“아가씨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게 궁금하세요?”

“알렉스 경과 네 사이는 언제나 궁금했는걸.”

엘라는 델시아가 일부러 질문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가 우울하게 있자 델시아 나름대로 농담을 한 것인데, 그 농담조차도 기운이 없었다.

엘라는 피곤한 낯의 제 주인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뱉었다.

“아가씨,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오늘 주치의인 덱스가 성에 오기로 했어요. 앞으로는 쭉 계실 거래요. 그러니까…… 검사 잘 받고 푹 쉬세요. 아시겠죠?”

“정말 괜찮대도.”

델시아의 대답에도 엘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백작님께서 부르신 거예요. 그리고 저도 동의하고요. 존 아저씨와 데보라도 동의하실 거예요.”

존과 데보라의 이름이 들리자 델시아의 낯빛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들에게만큼은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하기는 제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그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제 아버지에게 물어서라도 이유를 알아내려고 할 이들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델시아는 느릿하게 걸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데보라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와 델시아를 부축했다.

“부축할 정도는 아니야, 데보라. 나 아직 괜찮아.”

“제가, 제가 안 괜찮아요. 이렇게라도 해서 아가씨한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요.”

“데보라…….”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싶으니까요.”

말을 마친 데보라가 입을 꾹 다문 채 델시아를 침실까지 데려갔다.

“이제부터는 꼼짝 말고 쉬세요. 무리하시면 안 되니까 식사도 여기서 하시고요.”

“데보라, 그 정도는 아니야.”

“그래도 걱정이 되는걸요. 제가 없는 사이 아가씨께서 쓰러지시기라도 할까 봐…….”

말을 삼킨 데보라가 우울한 얼굴로 침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곁에 선 엘라가 의연한 태로 데보라를 다독였다.

“괜찮을 거예요. 아가씨께서는 강하시니까요.”

강하다는 말의 기준을 모르는 데보라였지만, 어쩐지 안심되는 말에 고개를 주억였다. 데보라가 침실을 나가고 엘라는 델시아의 환복을 도왔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델시아가 침대에 앉아 엘라를 올려다봤다.

“가서 쉬어, 엘라.”

“아픈 아가씨를 두고 어떻게 쉬어요.”

“나 아직 환자 아니야. 잘 걷고 잘 먹잖아.”

“아가씨…….”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에 엘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쉬세요, 아가씨.”

다른 말은 삼켜 낸 엘라가 그 말을 남기고는 침실을 나갔다. 모두가 나가고 고요해진 침실에서 델시아는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고요한 오후였다. 그리고 그만큼 씁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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