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64화 (64/94)

<64>

“와, 아가씨!”

엘라가 시장 중앙에서 곡예를 선보이는 곡예사들을 가리키며 감탄했다. 곡예사를 자주 보지 못한 델시아 역시 처음 보는 묘기들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저 곡예사 좀 봐.”

델시아의 말에 아놀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놀드는 델시아가 말한 곡예사들을 바라보며 손뼉을 쳤다. 델시아와 함께 곡예를 감상하던 아놀드가 고개를 돌려 델시아를 바라봤다. 델시아가 활짝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즐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덩달아 아놀드의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아놀드는 생각했다.

“델시아, 어서 와.”

클라우드는 환한 얼굴로 델시아를 맞았다.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델시아가 테이블 앞에 앉아 바구니를 열었다. 그 안에 든 디저트를 하나씩 꺼내는 델시아의 낯은 평소보다 어두웠다.

“델시아,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가라앉은 목소리에 클라우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델시아를 쳐다봤다. 그러나 델시아는 클라우드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무어라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차를 따르던 클라우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응. 클라우드도 잘 들어갔지?”

“나야 금방 돌아왔지.”

클라우드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하는 대답에도 델시아는 희미한 미소를 입에 걸기만 했다.

“델시아, 혹시 어디 안 좋아?”

“……아까 곡예를 감상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계속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서 그런가?”

“뭐?”

그녀의 대답에 클라우드가 놀란 눈을 했다. 어제 미처 델시아의 몸을 살피지 못하였는데, 그래서 그런 것일까. 클라우드가 서둘러 델시아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불안정한 델시아의 마력이 느껴졌다.

사람들 틈에 있어서 몸이 안 좋아진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몸 상태가 며칠 사이 급격하게 악화한 것이다. 클라우드는 얼굴을 찡그리고는 눈을 감고 델시아의 몸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한참을 흘려보내자 불안정하던 델시아의 마력이 점차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안심한 클라우드가 델시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고마워, 클라우드.”

“델시아, 정말 괜찮은 거 맞지?”

“…….”

클라우드의 물음에 델시아가 입을 다물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델시아.”

살짝 웃은 델시아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시도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클라우드에게 모든 것을 말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클라우드, 세상에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가 있는 거 알아?”

“응.”

“아무런 대가도 없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를 솔직히 믿지 않았거든. 그냥 떠도는 풍문인 줄로만 알았어.”

“그랬는데?”

“그랬는데 내가 마녀를 만나 보니까 알겠더라고.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처음 비안나를 찾으려 숲을 헤맬 때는 막막했었다. 절박한 심정 뒤로 두려움과 불안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랬던 마음이 비안나를 만남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안정됐다. 마녀를 만났으니 에드윈이 살 수 있고, 저는 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델시아는 행복해질 수 없었다. 행복을 감히 꿈꿀 수도 없게 되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델시아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마녀를 만나서 무슨 소원을 빌었어?”

델시아는 클라우드의 물음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닫았다. 말해 줄 수 없었다. 자신이 빈 소원을. 델시아가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 줄게.”

그렇게 얼버무린 델시아가 찻잔을 들었다. 찻잔을 든 손이 조금 떨렸다. 클라우드의 도움을 받아 몸속에 흐르는 마력을 안정시켰다고 해도 일시적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심장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델시아에게는 어떠한 차도도, 가망도 없었다.

“델시아, 너무 무리하지 마.”

“응. 나 무리 안 해, 클라우드.”

“델시아 너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주의해야 해. 네 몸은 너무 약해져 있어. 마력을 안정시키고도 안심할 수 없을 정도로.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클라우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가족들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심장을 손보지 않는 이상은…….”

“모두 알고 있어.”

“그런데?”

“그래서…… 다들 노력 중이야.”

델시아는 애매하게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클라우드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으나, 델시아는 차를 마시며 못 본 체했다.

* * *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었던 에드윈은 휴식을 취할 겸 다이어리를 꺼냈다.

― 쯧. 본다고 해도 변하는 게 없거늘. 들여다보기만 한다고 무어가 달라지겠느냐.

“닥쳐, 파시오.”

― 명분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데. 때로는 명분보다도 진심, 그러니까 속마음이 더 중요한 법이다.

“내가 언제 명분을 찾았다고 그러지.”

― 그럼 왜 다이어리를 들춰 보는 거지? 너 자신이 납득할 만한 명분을 어떻게든 찾으려 아등바등 애를 쓰는 것이 아니냐. 허울뿐인 명분이 무엇이 중요하다고. 쯧. 어리석기는.

에드윈은 이어지는 파시오의 말에 눈을 찡그리다가 다이어리에 적힌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액자에 넣을 그림을 그리기 위해 델시아와 후원에 앉았다. 일전에 심은 보라색 장미가 만개하여 그녀가 무척 기뻐했다. 보라색 장미에 둘러싸인 델시아는 꼭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테오에게 델시아의 모습을 영상석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하자, 어디론가 달려가 영상구를 가져왔다. 아무래도 내가 말하기만을 기다린 듯했다. 테오는 델시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영상을 찍었다.

나와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까지 영상석으로 남겨졌을 게 분명했다. 테오에게는 상자에 넣어 침실 책상 서랍에 보관하라고 말해 두었다. 그녀를 보지 못할 때면 영상석으로라도 봐야겠다.」

“영상석…….”

제가 영상석으로까지 남겨 두었다니. 에드윈은 파시오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 앞에 선 에드윈이 잠시 심호흡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있는 건가.”

에드윈은 다이어리에 적힌 대로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영상석이 든 상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다이어리에 거짓된 이야기를 적어 놨을 리도 없을 텐데. 에드윈이 눈을 찡그린 채 파시오에게 물었다.

“파시오, 영상석을 본 적이 있나?”

― 아, 영상석. 세상에는 참 신기한 물건이 많아.

“나와 델시아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찍은 영상석 말이다.”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보관한 건 내가 아니라 테오인지 뭔지 하는 녀석인데. 엉뚱한 곳에 묻기는.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에드윈이 고개를 내젓고는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사용인들을 감독하며 예산을 정리하고 있던 테오가 헐레벌떡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테오.”

“예, 주인님.”

“일전에…… 영상석을 보관한 일이 있었지. 기억하나?”

“영상석이라 하시면…….”

테오가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손뼉을 쳤다.

“아! 델시아 아가씨와 함께 계시는 모습을 찍어서 남긴 그 영상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라면 여기 서랍에 제가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두고두고 보실 거라고 하시기에……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자신 있게 말하던 테오의 목소리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잦아든 목소리가 종국에는 의문문으로 변했다.

“……어? 왜 없지? 주인님께서 서부로 가셨을 때도 분명 있는 걸 확인했는데.”

테오의 말에 에드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테오 너도 모른다는 말인가?”

“……예. 아니, 이게 왜 사라졌지?”

테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같은 말만 반복하자 에드윈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누군가 정리한답시고 치워 뒀거나 혹은 멋대로 건든 것일 테지.”

“그렇다면…… 사용인들을 불러 모아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비장한 표정을 한 테오가 침실을 나가자 에드윈이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천장을 응시했다. 사실 영상석을 본다고 무언가 달라질까, 싶기는 했다. 다이어리를 읽으면서도 무언가를 크게 깨달은 듯한 감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극적인 깨달음을 기대했던 에드윈으로서는 조금 부진한 소득으로 여겨졌다.

― 아델리오여.

“그래, 파시오.”

― 시간이 지체될수록 더욱 후회하게 될 터.

“이미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짧게 응수한 에드윈이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로 돌아온 에드윈은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영상석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파시오의 말에 틀린 구석이 하나 없다는 게 짜증이 나서 그런 것인지.

집중도 되지 않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에드윈은 손에 든 다이어리를 힐끗거리다가 책상 서랍에 넣었다. 다이어리를 계속 보고 있다가는 끝없는 수렁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래. 더 보아서는 안 된다. 그대로 서랍을 닫으려던 에드윈의 손이 멈칫거렸다.

“…….”

서랍에서 다이어리를 도로 꺼낸 에드윈이 눈을 감고 차분하게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신성력에 반응하여 글씨가 드러났듯 무언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다지 중요한 단서는 아니겠지만.

한참 신성력을 불어넣던 에드윈의 손끝을 타고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건.”

에드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렸을 적부터 에드윈은 신성력을 참 특별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까지도 힘에 담아 저장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 에드윈은 그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아델리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잠시 잊고 있던 지금, 에드윈의 손끝에서 다이어리를 적었을 당시의 감정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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