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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62화 (62/94)

<62>

페르도 영지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영지의 명물이라는 호수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로 백작 성이 위치한 도시, 에르도아는 정신없었다.

“페르도 호수가 그렇게 아름답다지?”

“오죽 아름다우면 물의 정령이 축복을 내린 호수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있겠어?”

관광객들이 떠드는 소리에 델시아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은 채 엘라의 도움을 받아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곧장 호수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엘라의 물음에도 델시아는 시장 구경을 고집했다.

“델시아, 어렸을 적에는 자주 왔었잖아.”

오늘 아침에 수도에서 내려온 아놀드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거의 집이나 숲에만 갔었어.”

“그랬나? 아무튼…… 시장이든 호수든 델시아 네가 간다니까 기쁘네. 몸도 많이 좋아진 것 같고.”

“그래? 오빠는 조금 야윈 것 같은데. 일이 많아서 그런 거야?”

델시아는 날렵해진 아놀드의 턱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이토록 마른 체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수도에서 많은 양의 업무를 도맡아 하느라 아무래도 무리를 한 듯싶었다.

“끼니를 거르는 건 아니지?”

“그럼. 델시아 너야말로 끼니 거르면 안 돼. 전보다는 살이 붙은 것 같지만…….”

“존이 매일 맛있는 음식을 해 줘서 잘 먹고 있어.”

남매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안에 쌓아 둔 이야기를 조금씩 꺼냈다. 두리번거리며 걷던 델시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

“저기!”

아놀드와 엘라가 혹여 델시아를 놓칠까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델시아는 몇 걸음 거리의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가게 가판대에는 초록색 액체가 든 병이 주르륵 정렬되어 있었다.

낯선 생김새의 액체를 본 아놀드가 델시아의 곁에 서며 물었다.

“이, 이게 뭐야?”

“존이 만든 주스.”

“……존이 만든 주스?”

“응.”

아놀드가 황당한 눈으로 가판대에 놓인 병과 그 뒤에 서서 웃고 있는 존을 쳐다봤다.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아놀드는 그간의 안부보다도 초록색 액체의 정체가 궁금했다.

“존, 대체 무슨 주스야?”

“소화에도 좋고 피부에도 좋은 주스예요! 완판 예정이니 더 늦기 전에 드셔 보시겠어요?”

“……완판 예정이라고? 꼭 완판하기를 바랄게, 존. 그리고 시음은 괜찮아. 주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놀드가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웃으면서 존과 아놀드의 대화를 듣던 델시아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팔았어, 존?”

“…….”

델시아의 물음에 늘 수다스럽게 굴던 존이 입을 꾹 다문 채 눈동자만 굴렸다. 그가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따 다시 올게, 존. 호수도 구경하고 싶어서.”

“그렇죠, 호수! 오랜만에 호수 구경하시는 것도 좋죠. 제가 같이 가 드리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주스 파느라 바빠서……. 하하!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존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호쾌하게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한 병도 안 팔릴 것 같지?”

“글쎄. 존이라면 어떻게든 팔아치우지 않을까?”

아놀드가 작은 소리로 묻자 델시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호수로 향하는 길은 꽤 멀었다. 걸어가는 것도 나름의 묘미였지만, 델시아의 체력이 그 정도로 튼튼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차에 오르기로 했다. 복작거리는 시장에서 빠져나온 델시아는 호수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뒤따라 올라탄 아놀드가 중얼거렸다.

“이 마차도 오랜만이네.”

“수도에서는 어때?”

“힘들지만, 괜찮아. 이러려고 그동안 아버지를 도왔던 거니까. 오히려 기뻐. 아버지를 도울 수 있고, 우리 가문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그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는 어떠셔? 영지에 내려오셔서 더 바쁘시려나?”

“응. 여전히 일을 좋아하셔.”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있었지.”

“늘 일만 하셔서?”

“응. 항상 바쁘시니까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았잖아.”

작게 웃은 델시아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 아놀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영지에 돌아오니까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보고 싶네.”

“……오빠도 그랬어?”

“응. 아버지께서도 그러셨겠지?”

“나는 그림으로만 어머니를 봤는데도 그리운 마음이 들었어.”

호수로 향하는 길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델시아는 오랜만에 나누는 아놀드와의 진지한 대화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이런 기회가 적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제게 허락된 시간은 점차 줄어드는데, 처음 경험하는 것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흐려져 가는 미래를 이토록 잡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델시아, 저택 후원에 유칼립투스가 있더라. 알고 있었어?”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놀드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돌려 놀란 눈을 했다.

“알면 안 되는 거였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저택 내에서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그쪽까지는 정원사도 가지 않으니까.”

“아델리오 공작께서 발견하셨어.”

“……뭐?”

“저택에 오신 날, 후원에 가고 싶다고 하시더니 거기서 발견하셨어.”

델시아의 동공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에드윈의 기억이 정말 돌아오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럴 리 없을 텐데. 부작용을 이겨 낼 수 있을 리 없을 텐데. 설사 이겨 낸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가라앉은 눈동자로 제 허벅지를 내려다보던 델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에드윈이 가져왔던 거야.”

“아델리오 공작이?”

“응.”

델시아의 대답에 아놀드가 뺨을 긁적였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겠지?”

“……모르겠어.”

돌아오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건만. 저를 기억해 주기를 바랐던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델시아.”

“오빠도 알잖아.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어.”

“……좋아지고 있잖아.”

“일시적인 거야. 클라우드가 도와줘서 간신히 유지하고 있어.”

낯선 이름에 아놀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클라우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야. 버려진 숲에 사는 마법사인데, 이번에 다시 교류하게 됐어.”

“마법사라고…….”

“클라우드가 마력으로 도와줘서 그래도 어느 정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거야. 만약 내성이 생긴다면…….”

그때부터는 시간문제겠지.

델시아가 뒷말을 삼키며 아놀드의 시선을 피했다.

빠르게 달린 마차는 호수 앞에 세워졌다. 호수 근처는 사람들로 가득 붐비고 있었다. 호수를 감상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확인한 델시아의 입이 벌어졌다.

“첫날이라 그런지 정말 많네.”

“……그러게.”

아놀드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델시아의 입에서 다시금 시간을 상기하는 말이 나오자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아놀드는 마차의 문을 열고 델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호수 구경하자, 델시아.”

아놀드가 내민 손을 붙잡은 델시아가 마차에서 조심히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델시아의 머리카락이 호수에서 부는 바람에 날려 너울거렸다. 델시아는 몸을 돌려 호수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와.”

델시아가 탄성을 터트리며 생기 있는 낯으로 호수를 쳐다봤다. 햇빛을 받은 호수 표면은 별이라도 쏟아진 듯 무척이나 반짝거렸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이는 잔물결조차도 아름다워 그녀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잔잔한 호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쉴 틈 없이 호수를 눈에 담던 델시아가 찬찬히 눈꺼풀을 내렸다. 콧속으로 희미한 물 냄새가 들어왔다.

“밤에는 더 아름다울 거야.”

“밤에도 보러 와야겠다.”

델시아가 그렇게 대답하며 하늘과 호수 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진 울창한 숲을 바라봤다. 눈에 담으면 담을수록 감탄만 나왔다.

* * *

“그럼 켈리안 후작은 대체 왜…….”

호수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아놀드는 제 아버지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페르도 백작은 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타즈 백작이 일부러 그런 것 같구나. 켈리안 후작에게 원한이 많은 것으로 보였거든.”

“그렇지만 양질의 마력석이 나오는 광산을 직접 보여 줬다고…….”

“글쎄다. 과연 진짜 물건을 보여 줬을지.”

“후에 켈리안 후작의 입장만 곤란해지겠네요. 저번에 열렸던 파티에서도 광산과 관련된 사업을 열띠게 홍보했으니…… 사달이 나는 건 금방이겠어요.”

“명망 있던 가문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페르도 백작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다가 아놀드를 응시했다.

“아놀드.”

“예, 아버지.”

“아델리오 공작과 너무 자주 만나지 말거라.”

“네. 저도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아놀드가 말끝을 흐리자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분명 아놀드는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델리오 공작이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기억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으니…….

모든 기억을 되찾은 아델리오 공작은 지체 없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페르도 백작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주먹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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