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클라우드는 델시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포털을 응시하다가 턱을 괬다. 벌써 한 시간 째 창문 앞에서 포털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전해 줄 장신구도 만들어서 두었는데……. 클라우드가 침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클라우드의 시야에 거무튀튀한 먹구름이 들어왔다.
“……아.”
클라우드는 그제야 델시아가 오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비가 세차게 쏟아지니 델시아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을 터였다. 클라우드가 창문에서 몸을 떼고는 연구실 책상 의자에 앉았다. 델시아를 고작 하루 못 만났다고 퍽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델시아가 없는 하루는 오랜만이라 클라우드는 조금 방황했다. 델시아가 일상에 없던 날에는 제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었지. 한참 고민하던 클라우드가 책장에서 책을 뽑아 들었다. 그래, 아마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던 것 같았다.
클라우드는 마법 수식이 가득한 책을 읽으며 집중하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작게 중얼거린 클라우드가 책장을 덮었다. 아마도 델시아의 빈자리가 꽤 큰 듯했다. 그렇게 긴 시간 함께한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클라우드는 델시아에게 주려고 만든 반지를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 모난 구석은 없나, 매서운 눈으로 한참 살피던 클라우드가 반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도 반지를 오랫동안 봤으니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터였다. 클라우드는 시간을 확인하려 하늘을 올려다본 뒤 대략적인 시간을 파악할 수 있는 마법 시계를 쳐다봤지만, 기껏해야 오 분 남짓 지났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잘만 흐르던 시간이 오늘따라 더뎠다. 클라우드는 가라앉은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는 웅얼거렸다.
“……시간이 안 가.”
감은 눈 사이로 델시아의 말간 얼굴이 아른거렸다. 십 년도 기다렸는데 고작 하루 이틀을 못 기다릴까. 클라우드는 주먹을 꽉 쥔 채 의지를 다졌다.
그러던 클라우드의 눈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이제 막 마법을 덧씌운 숲의 일부에서 찍힌 영상이었다. 흑마법사가 하나가 버려진 숲 주변을 수상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클라우드가 미간을 와락 구기며 그를 응시했다.
흑마법사는 버려진 숲에 발을 들이려 시도하다가 마법 장벽에 가로막혀 바닥을 굴렀다. 그는 무어라 욕지거리를 내뱉는 듯하다가 이내 걸음을 돌렸다.
“…….”
클라우드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만약 오늘 델시아가 왔다면 저 흑마법사를 마주할 수도 있었다. 클라우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시간을 보낼 방법이 생각났다. 버려진 숲을 둘러싼 결계를 더욱더 견고히 하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강한 마법을 거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면 시간이 빠르게 흐를 터였다.
* * *
점심이 되기 직전, 시커먼 먹구름에서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델시아는 침실 창가에 앉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밖을 구경했다. 나름대로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늘 선명하게 보이던 숲과 집들이 비와 뿌연 안개에 가려져 흐릿했다.
사달이 나기에 딱 좋은 날처럼 보여 델시아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몸에 두른 숄을 더욱 여민 델시아가 코코아가 든 컵을 꼭 쥐었다. 존이 비 오는 날에는 꼭 마셔 줘야 한다며 들이민 음료였다. 어렸을 적에는 존이 자주 줬던 코코아지만, 커서는 잘 마시지 않았기에 조금 낯설었다.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호호 불어 마시는 델시아의 곁으로 엘라가 다가왔다.
“아가씨.”
“응, 엘라.”
“비도 오는데, 도서관이라도 가실래요?”
“음, 그럴까? 로웬을 안 본 지도 꽤 됐으니까.”
“네. 로웬도 좋아할 거예요. 전에 가져오셨던 서적은 한쪽에 챙겨 둘게요.”
엘라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만 쉬다가 도서관 가자. 엘라도 조금 더 쉬어.”
“저는 늘 쉬고만 있는걸요. 그러면 이따가 다시 올게요.”
엘라는 그 말을 끝으로 델시아의 침실을 나섰다. 이내 바깥에서 천둥이 커다랗게 쳤다.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에 델시아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의식적으로 곁을 쳐다본 델시아는, 에드윈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보같이.”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에드윈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무의식중에 벌인 제 행동에 비웃음을 흘린 델시아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코코아가 몸 안으로 들어가자 황당한 마음이 점차 진정되었다.
창밖을 응시하며 잔을 비운 델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있는 엘라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엘라?”
“아가씨, 일찍 나오셨네요? 잠시만요!”
엘라는 누워서 쉬고 있었는지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다가 이내 서적을 한 아름 들고 침실 문을 열었다. 델시아는 엘라의 품에 들린 서적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 도와줘도 괜찮아? 무거워 보이는데.
“그럼요. 제가 얼마나 힘이 센데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어쩐지 입매가 바르르 떨리는 모습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델시아는 엘라가 든 서적을 나눠 들려고 하였으나, 그녀가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대신에 최대한 엘라의 발걸음에 맞춰 걷기로 했다.
그렇게 서관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하던 도중 복도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어, 알렉스 경!”
“안녕하십니까.”
알렉스가 델시아와 엘라에게 가볍게 묵례한 후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곁눈질로 엘라가 든 서적의 양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춰 그녀의 품에서 서적을 가져왔다.
“어, 어!”
“도서관으로 가시는 겁니까?”
“네. 알렉스 경, 엘라를 도와주겠어요?”
“예. 마침 방향이 같습니다.”
알렉스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향하려던 것을 알고 있던 델시아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델시아는 엘라와 알렉스가 나란히 걷도록 조금 앞쪽에서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엘라와 알렉스가 소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 경은 어디 가시는 길이었는데요?”
“……저, 저도 서관 쪽에 볼일이 있습니다만.”
“오, 그래요? 방향이 같아서 경께 도움도 받고…… 운이 좋네요.”
“그렇습니까.”
엘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알렉스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 있었다. 델시아는 부쩍 가까워진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제가 들기에도 제법 무게가 나가는데, 안 무거우셨습니까?”
“좀 튼튼한 편이라서요.”
“자칫하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아, 그렇죠. 아무래도 귀한 서적들이니 조심히 다뤄야죠.”
델시아는 엘라의 대꾸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예? 아니, 서적도 서적이지만…….”
“알렉스 경, 저도 서적 귀한 줄은 안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도서관 앞에 먼저 도착한 델시아가 당황한 얼굴의 알렉스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고마웠어요, 알렉스 경.”
“예? 예. 그런데 정말 그런 의도로…….”
“잘 알아들었으니까 어서 가요, 경. 아가씨께서 기다리시잖아요!”
엘라의 성화에 알렉스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경, 그쪽은 서관이 아닌데요?”
“아…….”
다시 한번 뒤통수를 긁적인 알렉스가 엘라의 눈치를 살피며 서관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문을 연 델시아의 귓가에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로웬,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로웬!”
엘라가 로웬에게 서적을 반납하는 틈을 타 델시아가 도서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같이 가요!”
서적을 전부 건네준 엘라가 서둘러 델시아의 곁에 섰다. 그녀는 델시아를 졸졸 따라다니며 서적을 구경했다.
“엘라.”
“네?”
“알렉스 경 어때?”
“……네?”
“알렉스 경 어떠냐고.”
델시아의 질문에 엘라가 눈을 껌벅이다가 되물었다.
“좋은…… 분이시죠?”
“그렇지? 엘라 네가 걱정되셨나 봐.”
“네?”
“아까 네 걱정을 하시는 것 같더라고.”
“아, 아니에요. 서적 상할까 봐 걱정하시던데…….”
엘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스가 저를 걱정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제가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니니. 걱정한다면 제가 아니라 델시아를 걱정해야 할 터였다.
“아가씨께서 잘못 들으신 거겠죠!”
“세상에 서적을 걱정하는 기사가 어디 있어?”
“……서적을 특별히 좋아하시나 보죠, 뭐.”
“알렉스 경이 서적을?”
델시아가 웃으며 되묻자 엘라가 입을 꾹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가 저를 걱정하다니. 엘라의 뺨이 조금 상기됐다. 매일 델시아를 기다리며 디저트를 나눠 먹던 사이가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건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아무튼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으응, 그래?”
“네!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아직 알아 갈 단계가 필요해요.”
“아무튼 엘라 너도 마음이 있다는 말이네.”
“그게…… 그렇게 되나요?”
엘라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델시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볼 때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가 싶더니만, 제가 못 본 사이 조금씩 발전한 듯했다. 델시아는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손으로 부채질하는 엘라를 바라보다가 서적을 고르는 척 콧노래를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