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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59화 (59/94)

<59>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소백작.”

“그 호칭은 아직 제게 과분합니다.”

아놀드는 에드윈을 안으로 맞이하며 적절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가 저를 따라오며 저택 내부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저택을 구경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젠가 와 본 것 같은데 확실치 않아서 말입니다.”

“그러시군요.”

아놀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래층을 안내했다. 제가 쓰는 집무실, 식당, 후원 등을 소개한 아놀드가 이번에는 위층으로 에드윈을 데려갔다. 가족이 아닌 자에게는 공개하지 않았을 사적인 공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아놀드는 에드윈에게 부러 위층을 보여 주었다. 에드윈을 떠보듯 델시아가 사용한 침실의 문 앞에서 그녀가 썼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윈은 아놀드가 기대하는 것만큼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떨떠름한 낯으로 위층의 방을 전부 소개한 아놀드가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더 궁금한 곳이 있으십니까?”

“후원이 더 궁금하군요.”

“후원은 아까…….”

“후원 깊숙한 곳을 알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에드윈의 말에 아놀드가 눈을 껌벅이다가 그를 후원으로 데려갔다. 아까 보여 준 게 후원의 전부이거늘, 깊숙한 곳을 알고 있다는 에드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후원 깊숙한 곳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예?”

“저도 잘 모르기에 왔습니다.”

아놀드가 헛숨을 들이켜며 에드윈을 쳐다봤다. 알 것 같다던 말을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잘 모르겠다니. 저를 놀리려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놀드는 뺨을 긁적이다가 후원 끄트머리까지 에드윈을 안내했다.

“이곳이 후원의 가장 끝입니다.”

“그렇군요.”

“예,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드윈이 찬찬히 걸음을 옮기면서 후원을 살폈다. 아놀드의 불안한 시선이 그의 걸음걸이를 쫓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던 에드윈의 걸음이 한쪽 구석에서 멈췄다.

“…….”

에드윈은 말을 잃은 듯 그곳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쭈그려 앉았다.

“……공작님?”

“아.”

아놀드의 부름에도 에드윈은 짤막한 탄성만 뱉을 뿐, 별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공작님?”

아놀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드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그가 무엇을 보는 것인지 확인했다. 에드윈이 보는 것은 한 그루의 나무였다. 후원에 이런 나무가 있었던가. 아놀드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식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게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예?”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이 나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기억해 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에드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놀드보다 먼저 걸음을 옮겨 저택 안으로 향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아놀드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서둘러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에드윈과 아놀드의 저녁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아놀드를 그를 응시하며 식기를 움직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방문을 요청하신 겁니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아는 선에서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는 말고요.”

에드윈이 스테이크를 잘게 썰면서 말하자 아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서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라면 뻔했다. 제 동생인 델시아와 관련된 물음이겠지. 아놀드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식사가 끝난 뒤, 응접실에서 이야기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식사 자리는 조용했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에드윈은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아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어지던 침묵은 식사가 끝남과 동시에 깨졌다.

“공작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놀드는 에드윈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차를 내올까요?”

사용인이 묻자 아놀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금방 이야기가 끝날 것이니 차는 되었다.”

“예, 알겠습니다.”

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에도 에드윈은 의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이내 사용인이 응접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아놀드가 먼저 자리에 앉고는 에드윈을 쳐다봤다.

“앉으시지요.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기에 차를 내오지 말라 시켰습니다.”

“그 말은 제게 긴 시간을 내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도 해석되는군요.”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살짝 웃은 에드윈이 아놀드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소백작께서는 제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저는 전후 사정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만, 소백작께서는 알고 있으실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에드윈의 말을 듣는 아놀드의 얼굴이 점차 침전했다. 에드윈이 꺼낸 이야기는 델시아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아놀드 자신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에드윈은 저를 구하려다가 희생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제게 에드윈이 전후 사정을 물어 오고 있다. 아놀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옆에 달린 설렁줄을 당겼다.

“예, 도련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차를 내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수도의 저녁이 깊어졌다.

* * *

“축제가 머지않았네요. 이틀 후면 축제가 시작되다니.”

데보라의 말에 존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난 목소리를 내었다.

“이제 내 주스가 빛을 보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군!”

“아가씨, 존 아저씨의 주스가 얼마나 팔릴 것 같으세요?”

“당연히 전부 팔린다고 생각하실 테지. 그렇죠, 아가씨?”

델시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취향에 맞는다면 얼마든 사 갈 수도 있는 게 존의 주스였으니……. 델시아는 존과 데보라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반 이상은 팔리지 않을까……?”

“아가씨, 반 이상이라니요?”

존이 눈을 끔벅거리며 되물어 왔으나 델시아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만하게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군.”

“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델시. 좋은 아침이구나.”

페르도 백작이 식당으로 들어서며 다정하게 인사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아놀드와 영상구로 대화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아놀드는 에드윈이 저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아무튼…… 델시아에게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완전히 기억을 찾은 것 같지는 않아요.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저를 찾아왔을 테지만, 델시아의 이야기는 빼고 전했어요.’

‘그래, 아놀드. 알려 줘서 고맙구나.’

아놀드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어쨌든 에드윈이 기억을 찾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필 델시아가 마음을 정리한 때에……. 페르도 백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식탁 앞에 앉았다.

“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간밤에 무리라도 하신 거예요?”

“오, 델시. 아비는 괜찮단다.”

페르도 백작이 웃으며 대답했으나 델시아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델시, 어서 먹으려무나. 든든하게 먹어야 해. 오늘 오전부터 짧게 비가 올 것이라고 하였으니, 오늘만큼은 집에서 쉬거라.”

“네, 그럴게요.”

델시아가 식당에 나 있는 창으로 밖을 확인했다. 하늘은 아직 맑았으나 멀리서 거뭇거뭇한 구름이 보이는 게,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창문에서 시선을 뗀 델시아가 포크를 움직여 식사를 시작했다.

“참, 델시.”

“네.”

“축제 때 나서지 않아도 괜찮단다. 편하게 쉬렴.”

“그래도 괜찮을까요?”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성치 않은 몸으로 영주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델시아가 그다지 반겨 하지 않을 터였다. 이를 잘 아는 페르도 백작은 그녀가 나서서 말하기 전에 먼저 배려하기로 했다.

“내년에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페르도 백작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묻자 델시아가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렴요!”

아무것도 모르는 존이 우렁찬 목소리로 델시아 대신 대답했다. 페르도 백작은 그런 존을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존.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한번 믿어 봐야겠지.”

델시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존과 데보라를 비롯한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듯했다. 후에 원망을 듣더라도 말이다. 그들에게 이런 짐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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