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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58화 (58/94)

<58>

“테오.”

“예, 주인님.”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적을 터인데.”

“네.”

에드윈이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아놀드 페르도.”

“예?”

“델시아의 남자 형제 말이다.”

“아, 예. 페르도 영식께서는 수도에 계십니다.”

테오의 대답에 에드윈은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펴기를 반복하던 에드윈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는 내게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가?”

“예, 아무래도…….”

“역시 그렇겠지.”

“예?”

“만나 봐야겠다.”

에드윈의 말에 테오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제 주인이 먼저 나서서 아놀드를 만나겠다고 할 줄은 몰랐기에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페르도 백작 쪽에서도 그다지 반기지 않을 일일 텐데……. 테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우선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날짜를 잡도록.”

“예. 보내기는 하겠지만, 긍정적인 회신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왜지?”

“델시아 아가씨를 곁에서 봐 오신 분일 텐데…… 그런 아가씨를 매몰차게 대하신 공작님을 만나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에드윈이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테오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점점 건방져지는군.”

“……이번 일만큼은 어쩔 수 없습니다.”

“됐다. 됐으니까 내가 보는 앞에서 서신을 써서 보내도록 해라.”

“……예, 예.”

테오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하고는 에드윈의 책상 옆에 배치된 자리에 앉아 아놀드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서신은 테오 네가 직접 전달하고.”

“예?”

“토 달지 말고 다녀오지, 테오.”

“……예. 알겠습니다.”

테오가 에드윈의 눈치를 살피며 서신을 마무리 지었다. 이윽고 서신을 챙긴 테오가 에드윈의 집무실을 나서며 신신당부했다.

“저 다녀올 동안 아무 데도 가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그래, 테오. 알겠으니까 어서 가.”

테오는 마지막까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에드윈을 응시하다가 페르도 백작저로 향했다. 테오가 나간 사이 에드윈은 습관처럼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그는 하루에 한 장 이상은 읽지 않았다. 맛있는 간식을 아껴 먹는 아이처럼 매일 한 장 한 장 읽었다.

“……하.”

에드윈은 테오가 돌아올 때까지 다이어리를 곱씹어 읽으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테오가 집무실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에드윈의 귓가에 들렸다. 에드윈은 읽던 다이어리를 책상에 내려놓고 문을 응시했다.

“허, 허억. 헉, 주인님.”

테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에드윈은 테오의 손에 서신이 들린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가져오도록.”

“여, 여기…… 페르도 영식께서…… 허억.”

“설명은 됐으니까 서신 주고 저기 가서 앉아.”

“예.”

테오가 제 주인에게 서신을 건네고는 이마에 스민 땀을 닦았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를 칭찬하듯 한번 훑어본 에드윈이 서신을 열어 내용을 살폈다.

“뭐,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 저녁에 만나자는군.”

“다행이네요! 어디서 만나시는 겁니까?”

“페르도 백작저에서.”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럼 채비를 시작하셔야겠네요!”

“됐다. 그다지 중요한 만남도 아니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기뻐 보이시는데요?”

“닥쳐.”

에드윈이 얼굴을 구기며 사납게 말하자 테오가 킥킥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제 주인의 성미를 건드렸다가는 별로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테니 별수 없었다.

* * *

“델시, 이리 와 보거라.”

“무슨 일이세요?”

“영상구가 도착했단다.”

“영상구라면…….”

“그래. 아놀드와 대화를 나눌 영상구란다.”

페르도 백작의 설명에 델시아가 그의 곁으로 갔다. 영상구는 아직 불투명했다.

“곧 아놀드가 연결할 게다.”

잠시 기다리자 페르도 백작의 말대로 영상구가 번쩍였다. 두어 번 더 번쩍이던 영상구 안에서 아놀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델시아는 아놀드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 아버지, 델시아!

“오, 아놀드. 잘 보이는구나. 혈색이 좋아 보이는데, 잘 지내는 게냐?

― 예, 잘 지내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신 거였는지 제대로 체감하는 날들을 보내는 중이에요.

“하하, 그렇구나. 아놀드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게다.

“응, 오빠. 오빠는 늘 잘했으니까.”

델시아가 웃으며 잇는 말에 아놀드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참, 이따가 아델리오 공작께서 오시기로 했어요.

“아델리오 공작이?”

― 네. 묻고 싶은 게 있다더라고요. 만나지 않을까 하다가 이왕이면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지만…….”

말끝을 흐린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를 살폈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델시아의 얼굴이 작지만, 분명한 그늘이 생겼다. 헛기침을 해서 아놀드에게 신호를 준 페르도 백작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힘든 일은 없느냐?”

― 네. 아직은요. 그런데 켈리안 후작 쪽 움직임이 조금 이상해요. 귀족들에게 마력석이 나는 광산을 판매하고 있다는데…….

“아, 광산. 혹여나 해서 말하지만, 켈리안 후작과는 엮이지 말거라. 그편이 여러모로 낫단다.”

― 그렇지 않아도 최대한 피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수상해서요. 듣기로는 아타즈 백작의 광산이라던데…… 백작으로부터 판매 권한을 받았나 봐요.

“관련해서 알아봐야겠구나. 아타즈 백작이라면 일전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니.”

― 네. 기다릴게요, 아버지. 그럼 그동안 잘 지내, 델시아. 아버지께서도 건강히 잘 계시고요.

아놀드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델시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인사했다.

“오빠, 몸 건강히 잘 지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축제 때는 올 수 있어?”

― 최대한 가 보도록 할게. 일정만 맞으면 축제 내내 있을 수도 있어. 그럼 이만 끊을게, 델시아. 이만 끊을게요, 아버지.

“그래, 아놀드. 들어가거라.”

이내 영상구가 불투명해지다가 완전히 통신이 끊겼다. 페르도 백작은 영상구를 상자에 넣고 몸을 돌려 델시아를 응시했다.

“델시, 아놀드가 한 이야기는…….”

“괜찮아요. 설마 기억이 돌아왔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다만, 그러는 이유가 궁금해서…….”

“아놀드에게 물어보도록 하마. 이유는 이 아비도 궁금하니 말이다.”

느릿하게 말하는 페르도 백작의 얼굴이 조금 차가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억하기를 바라던 때에는 아무런 노력도 보이지 않던 그가, 델시아가 수도를 떠나 영지로 오게 돼서야 뒤늦게 노력하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델시아를 흔드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물론 델시아는 완전히 체념한 듯 보였지만…….

“델시, 괜찮은 게냐?”

“네. 괜찮아요. 몸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늘 걱정이란다.”

“무리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아버지도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델시. 그렇게 하마.”

그 이야기를 끝으로 델시아는 집무실을 나와 안뜰로 향했다. 성에서 느긋하게 쉬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간 클라우드와 어울리느라 모두에게 격조했다.

“아가씨!”

가제보에서 미리 기다리던 엘라가 손을 흔들었다.

“엘라, 먼저 와 있었네.”

“네. 할 것도 없어서요.”

엘라는 델시아가 앉도록 도운 뒤, 차를 따랐다. 클라우드와 마셨던 차와는 다른 종류였다.

“엘라, 알렉스 경은?”

“네?”

“아니, 알렉스 경도 함께하면 좋잖아.”

델시아가 장난스럽게 웃자 엘라가 얼굴을 붉혔다.

“어우, 아니에요. 아가씨도 참!”

“그래서 주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데?”

“그냥…… 그냥 일상에 관해서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글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델시아를 응시한 엘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아가씨.”

“그래, 엘라. 알겠어.”

델시아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장난을 멈췄다. 엘라는 차를 홀짝이며 허공을 응시하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도련님께서는 잘 계신대요?”

“응. 바쁘지만,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오늘 에드윈이랑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대.”

“네? 아델리오 공작님과 저녁을요?”

“에드윈이 먼저 만남을 청해 왔대.”

델시아는 덤덤한 얼굴로 말을 마쳤다. 사실 에드윈이 아놀드와 저녁을 먹든 무얼 하든, 델시아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기도 했고. 델시아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왜 인제 와서 그러시는 걸까요? 조금만 더 일찍 그러시지. 다 늦은 지금에야…….”

“괜찮아, 엘라.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낫다고 전에도 내가 말했었지?”

“아무리 그래도…… 억울하잖아요. 그러다 공작님께서 다른 분과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시게 된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요.”

“모든 걸 알고도 각오한 건 나야, 엘라. 누구도 탓할 수 없어. 탓한다면 나 자신을 탓해야겠지.”

델시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일전에도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제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어쩌면 신의 형벌일지도 모른다. 이기적인 저를 책하려는 신의 형벌.

델시아는 에드윈을 위해서라면 신의 형벌을 기꺼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결과, 이렇게 되었다. 바라던 대로 된 것이다. 모두가 기억해 내지 못하는 에드윈을 탓해도, 델시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에드윈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편하게 가려는 에드윈을 붙잡고 놓지 못한 제게 잘못이 있다.

“엘라, 항상 고마워.”

“아가씨, 불안하게 왜 그러세요…….”

“타지까지 와서 고생하는데,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지.”

델시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가 점차 또렷해졌다.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델시아는 물방울이 떨어진 종이처럼 서서히 주황색으로 번져 가는 하늘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신의 형벌을 기꺼이 받을 준비를 했음에도, 곧 저 아름다운 하늘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괜히 울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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