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델시아가 클라우드를 찾아 숲에 방문한 지도 벌써 나흘째였다. 그녀는 클라우드와 함께하며 부쩍 웃음이 늘었다. 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페르도 백작이었다. 그는 외출에 나서려는 델시아의 뒤에다 대고 오늘도 많이 웃고 오라며 외칠 정도로 그녀의 변화를 반겼다.
“오늘은 어떤 케이크예요?”
“초콜릿 칩을 넣은 컵케이크래. 클라우드가 눈을 동그랗게 뜰 걸 상상하니까 벌써 웃음이 나와.”
“저도 알렉스 경께서 드시면서 감탄하시는 모습을 볼 생각에 벌써 미소가 지어지네요.”
엘라는 마부석에 앉은 알렉스의 귓가에 들릴까,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웃음을 터트렸다. 클라우드와의 만남이 늘수록 델시아의 심장은 점차 안정되었다. 여전히 힘에 부치기는 하였어도, 일전처럼 심장의 문제로 풀썩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델시아가 건강을 조금씩 되찾을 때마다 페르도 백작이 제일 기뻐했다. 당장이라도 델시아를 품에 안고 안뜰을 뛰어다닐 기세였다. 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식탁에 꽉 차도록 음식을 차려 내기까지 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델시아의 말에도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런데 클라우드 님과는 매일 무슨 이야기를 하세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도 하고, 서로 궁금한 것도 물어.”
“오랜만에 만나셔서 나누실 이야기가 많을 것 같기는 해요. 그렇죠?”
“으응. 맞아.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
“혹시 클라우드 님께서 아가씨를 좋아하시는 건…….”
“엘라.”
델시아가 고개를 단호히 내저으며 엘라를 쳐다봤다. 쪽빛 눈동자는 단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절대 아니야.”
“하지만…….”
“클라우드는 친구로서 나를 챙겨 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건 순전히 호의일 뿐이고.”
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알겠어요, 아가씨.”
엘라의 대답에도 델시아는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러니까 오해해서는 안 돼, 엘라.”
클라우드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을뿐더러 제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 식으로 오해를 받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마차가 작은 숲 입구에 멈춰 섰다.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내린 델시아가 숲 초입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자 엘라가 서둘러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아니…… 이런 게 있어서.”
델시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둥그런 포털이 있었다. 이제껏 포털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에 델시아는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위험한 포털일지도 모르니 잠시 물러서십시오.”
알렉스가 굳은 얼굴로 나섰다. 델시아를 데리고 알렉스의 뒤로 숨은 엘라가 잠자코 기다렸다. 포털 주위를 확인하듯 잠시 분주하던 알렉스가 이내 무언가를 들고 델시아에게로 다가왔다.
“여기, 이런 게 있었습니다.”
“이게…….”
“쪽지 같습니다.”
“쪽지?”
“예. 돌멩이에 고정된 채 포털 옆에 있었습니다.
델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렉스가 건넨 종이를 확인했다.
「델시아에게.
아무래도 이곳까지 오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포털을 만들었어.
포털에 올라오면 바로 우리 집 앞까지 오니까 편하게 사용해.
다른 인간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특별한 마법을 걸어 놨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
그럼 이따 봐, 델시아.
클라우드가.」
정갈한 글씨로 쪽지를 남긴 이는 클라우드였다. 이틀 전 엘라와 포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는 델시아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쪽지를 바구니 안에 넣었다.
“아가씨, 이제 편하게 가실 수 있겠어요.”
“그러게. 클라우드가 배려해 준 것 같아.”
“그러니까요! 어서 포털 위로 올라가 보세요. 이따 이곳에서 봬요.”
“응, 엘라. 알렉스 경과 즐거운 시간 보내.”
델시아가 웃는 얼굴로 포털 위에 올라갔다. 그러자 흰 빛무리와 함께 델시아의 몸이 사라졌다. 이윽고 사라졌던 델시아의 몸은 클라우드의 집 앞에 나타났다. 포털을 처음 이용한 델시아는 급작스럽게 장소가 변하자 조금 휘청거렸으나 미리 나와 그녀를 기다리던 클라우드가 받쳐 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고, 고마워.”
“천만에. 델시아, 좋은 점심이야.”
“응. 오늘은 점심으로 뭘 먹었어?”
클라우드와 델시아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델시아가 바구니에서 디저트와 식기를 꺼내면 클라우드는 차를 준비했다.
“그냥 과일 먹었어. 사과 두 개.”
“세상에. 그걸로 배가 차?”
“늘 그렇게 먹어 와서 괜찮아.”
“그래도 그렇지. 참, 오늘은 초콜릿 칩이 들어간 컵케이크야.”
“컵케이크?”
클라우드는 새로운 디저트를 만날 때마다 놀란 눈을 하고 관찰하느라 바빴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달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남기는 일은 없었다. 델시아가 바구니에서 컵케이크를 꺼내 트레이 위에 올려놓았다. 갈색빛의 컵케이크를 유심히 관찰하던 클라우드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먹어 봐. 달콤할 거야.”
“진흙처럼 생겼는데?”
“초콜릿이라는 거야. 한번 먹어 봐.”
클라우드는 눈을 찡그리다가 컵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푹신한 컵케이크를 여러 번 우물거린 클라우드가 꿀꺽 삼키고는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달아.”
“응. 초콜릿 칩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가 봐. 그래도 나쁘지 않지?”
“응. 먹을 만해.”
“참, 이제 축제가 얼마 안 남았는데.”
델시아가 축제 이야기를 꺼내자 컵케이크 가루가 묻은 입가를 정리하던 클라우드가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클라우드, 너도 축제 때 올 거야?”
“……축제 때?”
“응. 나는 엘라랑 구경하기로 했거든.”
“인간들 많잖아.”
“아무래도 축제니까 그렇지.”
그녀의 말에 클라우드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고민했다. 그녀와 함께하려면 축제에 가는 것이 좋으나 다른 인간들과 부대끼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델시아 이외에는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할 마음 또한 없었다.
축제 날짜를 물으러 온 인간들 또한 클라우드와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날짜를 물으면 클라우드가 작은 신호를 주거나 다음 날에 간단한 쪽지를 남겨주는 식이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면, 저를 찾으러 오는 인간들 때문에 숲이 시끄러워져 여러모로 피곤했다.
“……고민해 볼게.”
클라우드는 고민하겠다고 말하고는 컵케이크를 베어 물었다.
“클라우드, 이 숲에는 아무도 안 와?”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는 거야.”
클라우드가 컵케이크를 우물거리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델시아는 그가 입 안에 든 음식물을 삼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왜?”
“내가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숲에 발을 들이면 헤매도록 마법을 걸어 놨거든.”
“그럼 클라우드 네게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전부 헤매게 돼?”
“아마도.”
클라우드가 차를 들이켜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클라우드조차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은 축제에 관한 날짜를 물으러 오는 인간들 말고는 거의 오지 않은 것뿐이고, 걸어 둔 마법도 그다지 강력한 수준은 아니었다. 차를 삼킨 클라우드는 잠시 고민했다. 혹여 나쁜 마음을 품은 인간이 숲에 걸린 마법을 파괴하려 들 수도 있었다.
“클라우드?”
“……아. 잠깐 다른 생각 좀 했어.”
“그래? 표정이 심각해 보이길래. 나쁜 일은 아니지?”
“응. 그냥…… 별거 아니야.”
숲에 걸린 마법이야 며칠 시간을 들여 보수하면 되고 제 몸은 제가 지키면 된다지만, 이곳에 놀러 오는 델시아는 달랐다. 제가 한눈파는 사이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생각이 급작스럽게 들자 온몸에 나 있는 솜털이 비쭉 서는 듯했다. 아무래도 델시아가 지니고 다닐 호신용 장신구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클라우드는 결연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델시아, 있잖아.”
“응?”
“목걸이가 나아, 반지가 나아, 귀걸이가 나아, 팔찌가 나아?”
“……뭐라고?”
“뭐가 하고 다니기 제일 편해?”
델시아는 클라우드의 물음이 눈을 껌뻑이다가 한참 뒤에 대답했다.
“반지……?”
“응. 알겠어.”
“근데 그건 왜?”
“아무래도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반지를?”
단편적인 설명에 이해하지 못한 델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네 말을 듣고 생각해 봤는데, 만일의 일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아.”
“만일의 일?”
“나쁜 마음을 먹은 인간들이 숲에 쳐들어올 수도 있잖아. 숲에 걸린 마법을 보수하는 동안 지니고 다닐 반지를 만들어 줄게. 내일쯤이면 줄 수 있을 거야.”
“으응……. 고마워.”
델시아는 클라우드에게 짤막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차를 마셨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클라우드는 반지의 디자인이라도 고민하는 것인지 내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델시아는 그런 클라우드를 배려하느라 어떠한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 델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탑 구경해도 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응. 구경해도 돼.”
“물건들은 안 건드릴게.”
“딱히 위험한 물건은 없어서 괜찮아.”
클라우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델시아는 밖에서는 작은 듯 보였으나 내부는 널찍한 탑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일 층은 음식물을 보관하는 용도인 것인지 선반과 과일들이 잔뜩 있었다.
계단을 올라 이 층으로 가자 이번에는 클라우드의 연구실과 문이 보였다. 아마도 델시아가 신세를 졌던 침실이 있는 듯했다.
“몇 층까지 있어?”
“삼 층.”
이번에는 클라우드가 앞장섰다. 그는 삼 층으로 향하는 나무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는…….”
“하르투아가 썼던 곳이야.”
커다란 침대와 책꽂이 그리고 책상만이 놓인 방이었다. 델시아는 커다란 드래곤이 썼을 방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침대가 되게 크네.”
“폴리모프했을 때 썼던 곳이라 그나마 작아.”
클라우드의 설명에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걸음을 돌렸다. 이윽고 일 층까지 내려온 델시아가 클라우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벌써?”
“응. 그동안 아버지랑 시간을 많이 못 보내서.”
“그래, 델시아. 내일 또 보자.”
클라우드는 그렇게 인사하며 델시아를 보냈다. 이윽고 그녀가 사라진 숲이 고요에 젖었다. 클라우드는 제게 익숙하던 고요가 점점 낯설어지자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델시아.”
클라우드에게 고요가 낯설어진 건 델시아의 존재 덕분이었다. 클라우드는 제게서 고요가 멀어지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외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