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54화 (54/94)

<54>

“그 안에 든 게…… 정말 드래곤이라고?”

그가 가져온 유리병을 유심히 살핀 델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적이나 영상석에서 봐 오던 드래곤과 클라우드가 가져온 유리병 안에 든 것의 모양이 퍽 상이했다. 게다가 드래곤이 유리병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몸집도 아니고 말이다.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라우드가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는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이건 하르투아의 심장이야.”

“……심장?”

“응. 내가 추락한 하르투아를 찾으러 갔을 때는 이미 정령의 숲에서 자연의 일부가 된 뒤였어. 남아 있는 건 하르투아의 심장뿐이었고. 그 심장을 주워서 이 유리병에 보관한 거야. 이 심장만이 남아 있는 하르투아의 일부니까…….”

“그럼 그게 드래곤의 심장인 거구나.”

클라우드가 보여 준 하르투아의 심장은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강한 마력이 가득 담겨 있어 반짝거리는 빛이 오묘했다. 델시아는 홀린 듯 그것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뗐다.

“드래곤의 심장은 처음 보는데, 굉장히 아름답네. 그리고 되게 거멓다.”

“그렇지? 하르투아는 블랙 드래곤이었어. 그래서 심장도 검은색이야.”

클라우드는 하르투아의 심장을 테이블 한쪽에 올려 두고는 다시 델시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찻주전자에 든 차가 거의 식었다는 것을 확인한 클라우드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찻주전자에 찻잎과 따뜻한 물이 다시 채워졌다. 찻주전자를 들어 델시아의 잔과 제 잔을 채운 클라우드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 이야기를 더 해 줘, 델시아.”

“내 이야기……?”

“응. 수도에서 어땠는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음…….”

“그리고 네 심장은 왜 그런지.”

마지막 말을 묻는 클라우드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클라우드 네가 어떻게…….”

“어제 알았어. 너를 치료하면서. 사실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던데.”

“……그랬구나.”

“응. 네 안에 든 건 지금껏 봐 온 인공 마력 심장 같지 않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미안해.”

차를 한 모금 마신 델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클라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쉬이 말해 주지 않으리라고는 예상했었다. 어쩌다 심장이 그렇게 된 건지, 델시아의 마력과 심장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째서 그것을 품은 것인지.

솔직히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다. 하르투아를 잃은 클라우드에게 델시아는 마지막 남은 소중한 존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면 델시아.”

“응?”

“매일매일 숲에 와.”

“매일매일 오라고?”

“응. 내 마력으로 도와줄게.”

클라우드가 빙긋 웃었다. 제가 마력을 불어넣어 심장이 안정을 찾도록 돕는다면 그래도 버티는 기간이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심장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어서 저도 안심할 수 있을 터였고. 델시아의 심장은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최악이었으니 말이다. 클라우드의 권유에 잠시 고민하던 델시아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오기 힘들면 언제든 말해.”

“응. 그런데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괜찮아, 델시아.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돼.”

클라우드가 그렇게 말하며 델시아의 찻잔을 다시 채웠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보는 델시아의 동공이 가라앉았다.

“델시아?”

“……아, 미안. 그렇게 할게.”

정신을 차린 델시아가 서둘러 대답하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에드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앞의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듯 제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날, 비안나의 집에서 마신 차가 떠오름과 동시에 주검이 된 에드윈의 모습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아직도 싸늘하게 식은 에드윈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졌다. 꼭 지금 당장 닥친 일인 양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참 우습고 참 미련하게도 이렇게 되고 나서도 에드윈에 관한 기억을 전부 잊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자 노력해 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에드윈을 살린 것만큼은. 그것 하나만큼은 델시아의 뜻대로 되었다. 그것마저도 안 되었다면 절망적이었을 터였다. 지금보다 여생이 길다고 해도 사는 것 같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그를 살린 일에는 단 한 점의 후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저를 보며 싸늘한 낯을 했을 때는 조금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 제 욕심으로 에드윈을 살린 것이었으니 어쩌면, 신들이 내리는 형벌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델시아가 찻잔을 들었다. 야윈 손이 바르르 떨렸다. 조금만 긴장을 놓치면 이렇게 에드윈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이 넘실거리며 찾아왔다. 찻잔을 든 델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델시아.”

“…….”

“델시아?”

“……으응.”

“안색이 안 좋아. 혹시 어디 불편해? 몸이 아프다거나, 속이 안 좋다거나.”

“아니야. 나 괜찮아. 그냥…… 예전 일이 떠올라서.”

델시아가 말을 얼버무리고는 차를 홀짝거렸다. 클라우드가 조금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저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델시아는 애써 외면했다.

“……내가 수도에서 뭐 하면서 지냈냐고 물었지?”

델시아가 살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클라우드는 급작스럽게 말을 돌리는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델시아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더 물었다가는 되레 그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언젠가 때가 되어 그녀가 제게 이야기해 주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응. 수도는 어떤 곳이야?”

“수도는 사람이 무척 많아. 그리고 꼭 무기가 없는 전장 같아. 실제 전장은 가 본 적 없지만, 귀족들 사이에 도는 긴장감이나 주고받는 가시 돋친 말만큼은…… 전장과 다를 바 없어.”

“수도는 무서운 곳인가 보네.”

클라우드가 제 팔뚝을 양손으로 문지르다가 픽 웃었다. 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행동임을 눈치챈 델시아가 덩달아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거기서 십 년 가까이 지냈지만, 항상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지.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었어.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오빠도 늘 영지로 돌아오고 싶어 하셨고.”

수도에서 아등바등 버티던 과거를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혔다. 몸을 죄는 옷을 입고, 취향에 맞지도 않는 음악과 미술품을 감상하고, 느낀 적 없는 감상을 말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들판과 숲을 뛰어다니며 살아온 델시아에게 그 모든 것은 처음이었고 동시에 몸을 옥죄는 억센 사슬이었다.

그나마 에드윈이 곁에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영세하게나마 이어지던 가문이 급작스러운 성공을 맞으며 크게 성장하자 가문을 무시하던 귀족들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다가왔다. 사탕발림과도 같은 말의 연속이었지만, 그 속에는 따가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어린 델시아에게 따가운 가시가 남긴 상처는 무척이나 오래갔다.

“이제는 여기서 쉬어, 델시아.”

클라우드가 위로하듯 내뱉는 말에 델시아가 웃었다.

“그러려고. 아마 앞으로는 영지에서 계속 지낼 것 같아. 달리 갈 곳도 없고.”

“갈 곳이 왜 없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말만 해. 내가 무슨 마법을 부려서든 데려가 줄 테니까.”

“고마워, 클라우드. 못 본 사이 더 든든해졌네.”

“나는 언제나 이랬어.”

클라우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델시아의 기억 속 클라우드는 저보다 작은 몸집을 하고 있었으며 자라날 대로 자라난 머리카락을 대충 동여맨 채로 다니던 아이였다. 성별도 헷갈릴 정도의 차림새였고. 그때와 지금의 클라우드는 정말 동일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며 차림새며 그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것이다.

“델시아, 내일도 올 거지?”

“응. 내일도 올게.”

“와서 나랑 차도 마시고 치료도 받고 가.”

“그럴게. 고마워, 클라우드.”

“내가 할 말이야.”

클라우드는 그렇게 말하며 델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델시아, 손 줘 봐.”

“손?”

“응. 네 손바닥에 내 마력을 흘려보낼게. 그러면 삐걱거리는 심장이 조금은 안정을 찾을 거야.”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손바닥에 마력을 흘려보낸 클라우드가 조금 뒤 미소를 지은 채 손목을 놔주었다.

“다 됐어.”

잠시였지만, 낯선 이의 온기가 머물렀던 손목을 매만진 델시아가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금방 스며든 클라우드의 마력은 순백색의 잔상을 남겼다. 꼭 그의 순수함을 보여 주듯 무척이나 깨끗한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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