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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52화 (52/94)

<52>

소파에 누운 채 잠이 들었던 델시아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그녀는 집무실의 천장을 한참 응시하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턱 밑까지 덮여 있던 담요가 스르륵 내려갔다.

“잘 잤니, 델시?”

“제가 깜빡 잠들었었나 봐요.”

“그래. 오랜만에 바깥 외출을 해서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얼마나 잤어요?”

“30분 정도?”

제 아버지의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드가 저를 치료해 줬다고는 해도 피로는 남아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제 몸은 약간의 피로만 쌓여도 금세 지치는 몸이었으니, 저도 모르게 잠든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고는 다시금 펼쳤다.

“더 읽으려는 게냐?”

“네.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까요.”

“좋다, 델시. 아비도 조금만 더 힘을 내야겠구나.”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의 말에 살짝 웃고는 다시 서류를 쳐다봤다. 수도에 있으면서 영지에 소홀했기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도 저택에서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건만, 영지에 자리하면서 일하는 것과는 그 효율이 전혀 달랐다.

페르도 백작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서류에 쓰인 글을 꼼꼼하게 읽었다. 하나라도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그렇게 델시아는 독서에, 페르도 백작은 업무에 집중해 있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 있던 페르도 백작은, 두 번째 두드림에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래.”

“주인님, 식사하실 시간이 되어서요. 아가씨께서도 아직 같이 계시나요?”

“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군. 델시아와 금방 같이 가겠다.”

문을 두드린 이는, 음식이 다 차려졌음에도 아무도 내려오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찾아온 데보라였다. 델시아와 눈을 맞춘 페르도 백작이 슬며시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델시아 역시 제 아버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페르도 백작과 델시아가 나란히 걸어 식당까지 향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늘도 존이 바쁘게 움직였겠구나.”

“가끔은 조금만 준비해도 될 텐데요.”

“존에게 말해 주렴. 내 말은 통 듣지를 않으니.”

“한번 말해 볼게요.”

페르도 백작과 델시아가 식당에 들어서자 존이 주방에서 나와 반겼다.

“주인님, 아가씨! 어서 와서 앉으세요. 딱 맞춰서 오셨네요.”

“데보라가 적절한 때에 알려 준 덕이지. 자, 델시. 어서 앉자꾸나. 존은 음식이 식는 것을 제일 안타까워하니 말이다.”

“네, 그럴게요.”

작게 웃음을 터트린 델시아가 자리에 앉았다. 델시아의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음식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페르도 백작의 앞에 놓인 접시보다도 훨씬 더 많은 개수였다.

“존, 평소보다 더…….”

“개수가 더 많다고요? 당연하죠! 아가씨께서 오랜만에 외출을 다녀오셨는데, 부실하게 차릴 수는 없잖아요? 든든하게 드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네는…….”

페르도 백작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켰다. 그러자 눈치 빠른 존이 헛기침하며 선수를 쳤다.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주인님께 드리는 음식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암, 그럼요. 여기 있는 데보라가 증명해 줄 겁니다. 그렇지, 데보라?”

“예. 뭐…….”

“하하, 데보라도 그렇다네요.”

저택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용인답게 존은 넉살이 좋았다. 제법 낯을 가리는 페르도 백작과도 어느 정도 막역한 사이였다.

“델시, 어서 먹자꾸나. 존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만든 음식들이니 말이다.”

“주인님도 참.”

뒤끝 있게 구는 페르도 백작을 힐끗거린 존이 고개를 좌우로 내젓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당은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가씨, 입에 맞으세요?”

“응. 맛있어.”

델시아는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식사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긍정적인 델시아의 반응에 존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크게 웃었다. 존의 웃음소리는 주방 안을 꽉 채우다가 사라졌다.

“아가씨, 내일도 외출하실 건가요?”

“음, 고민 중이야.”

“존 아저씨가 내일은 빵을 구우시겠대요.”

“그래, 델시. 몸 상태만 괜찮다면 내일도 다녀오려무나. 기분 전환도 되고 좋잖니.”

데보라와 페르도 백작이 한마디씩 거들자 델시아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드도 제게 또 놀러 오라고 말했었고, 델시아도 오랜만에 만난 클라우드와 아직 나눌 이야기가 아직 많았기에 또 외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버려진 숲에 가지 않는 척 호위 기사로 대동하는 알렉스와 엘라를 속일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한 델시아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 아버지.”

“그래, 델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그게…… 제가 오늘 외출에서요.”

델시아는 제게 집중된 시선을 찬찬히 훑다가 말을 이었다.

“버려진 숲에 갔었어요.”

“버려진 숲에 갔었다고? 델시, 그곳은 가면 안 된다고 말했었잖니!”

“아가씨, 그 숲에 들어갔다가 화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왜 그 숲에 들어가신 거예요!”

페르도 백작이 포크를 놓치며 놀란 목소리를 내고, 주방에서 뒷정리하던 존까지 뛰쳐나와 델시아를 책했다. 그들의 예민한 반응에 델시아가 제 뺨을 긁적이다가 덧붙였다.

“그 숲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버려진 숲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 숲에는 마법사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데…….”

“그 마법사도 사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존, 데보라. 일단 진정하고 델시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듯하니.”

존과 데보라가 주거니 받거니 말하자 페르도 백작이 손바닥을 펴 보이고는 상황을 중재했다.

“그 마법사가 제 친구예요. 어렸을 적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요. 클라우드라는 친구인데, 오늘 다시 만났어요. 제가 숲에서 길을 잃은 걸…… 그 친구가 도와줬고요. 그러다가 다시 만나게 된 거예요.”

“오, 델시……. 그 마법사가 길 잃은 너를 도와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다시는 이런 식으로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미리 알려 주고 갈 수는 없는 게냐? 듣기만 해도 심장이 철렁하는구나.”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다면 허락해 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 그랬어요. 다음부터는 미리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델시아의 말에 페르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존과 데보라는 그러지 못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델시아를 응시하던 존이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가씨. 클라우드라는 마법사와 언제 친구가 되셨어요? 그럴 틈이 없으셨을 텐데…….”

“그러니까요. 저도 모르는 이야기예요. 항상 저랑 같이 다니셨는데, 대체 언제 마법사와 친해지셨어요?”

데보라가 어리둥절하다는 듯 덧붙였다.

“무슨 말이야? 데보라는 항상 나와 같이 갔었잖아. 숲에는 나만 들어갔어도, 그 앞까지는 데보라와 같이 갔었는데?”

“네?”

이야기를 나누던 델시아와 데보라의 얼굴에 각각 혼란스러움이 깃들었다.

“제 기억에는 없는 일인걸요?”

델시아는 눈을 껌벅거리며 데보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데보라가 함께했었는데, 어째서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음, 아무래도 깜빡 잊고 있었나 봐요.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제 기억도 흐려진 거겠죠.”

상황이 흐지부지 종료되었음에도 델시아는 미묘한 찝찝함을 지워 낼 수 없었다.

* * *

“뭐? 하하하. 정말 그랬단 말이야?”

다음 날이 되고 페르도 백작과 존, 데보라 그리고 엘라에게까지 허락을 받고 버려진 숲으로 들어온 델시아는 클라우드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화창한 하늘 아래 놓인, 분위기 있는 테이블에 앉아 차를 홀짝이면서 나누기에는 조금 가벼운 대화였다.

“왜 웃어?”

“그게…….”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클라우드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숲에 살고 있는 걸 델시아 네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데보라라는 하녀의 기억을 조금 지웠거든.”

“뭐?”

“그때는 어렸고 무엇보다도 나 혼자였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내 목숨과도 직결된 거였으니까.”

“그건…… 그렇지.”

클라우드의 말에 델시아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한테는 말해 줄 수 있었잖아. 어제 얼마나 당황했었다고.”

“미안해, 델시아.”

“됐어. 사실 알았어도 금방 까먹었을 거야. 어렸을 때의 기억은 빠르게 흐려진다잖아.”

델시아가 차를 홀짝이고는 살짝 웃었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델시아.”

“……응.”

“참. 나 말고도 어울리는 친구가 있지 않았었나?”

클라우드의 물음에 델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까지 저와 재잘재잘 떠들던 델시아가 돌연 입을 다물자 클라우드가 의아한 낯을 했다.

“아, 아니었어?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델시아는 클라우드를 쳐다보며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 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곤란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으음, 그런 건 아니고…….”

델시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했다. 그녀는 찬찬히 숨을 들이켜다가 입을 열었다. 곧이어 그녀의 입술에서 최대한 간추린, 길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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