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51화 (51/94)

<51>

엘라와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델시아가 도서관을 관리하는 로웬에게 인사했다.

“안녕, 로웬.”

“안녕하세요, 아가씨. 찾으시는 서적이 있어서 오신 거예요?”

로웬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델시아의 곁에 섰다. 백작 성의 도서관은 규모가 컸지만, 이용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여 매일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기만 했다. 그러던 로웬에게 드디어 이용객이 찾아온 것이다.

“아가씨, 어떤 서적을 찾으시는 건가요?”

로웬은 혼자 있는 동안 도서관에 존재하는 서적을 전부 분류하고 분류한 위치를 종이에 빼곡히 기록했다.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었으나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지루함에 지칠 것만 같았다. 로웬은 다른 영지와는 달리 보기 좋게 정리된 서적들을 등지고 서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퍽 자랑스럽게 보이는 용태였다.

“응? 찾는 서적은 따로 없고, 가볍게 읽을 걸 고르려고 왔어.”

“아하! 그렇다면 이쪽으로 오시죠!”

로웬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종이에 적힌 카테고리를 확인한 로웬이 델시아에게 물었다.

“문학을 다룬 서적이 좋으신가요, 아니면 지식을 다룬 서적이 좋으신가요?”

델시아는 의욕적으로 구는 로웬을 가만히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황하던 로웬이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급하지 않으니까 편하게 해, 로웬.”

“하, 하하……. 도서관에 누군가 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신났었나 봐요.”

“이렇게나 훌륭하게 정리된 도서관에 이용객이 없다니. 너무 안타까운 일이네. 앞으로 자주 와야겠어, 엘라.”

“네, 아가씨. 저도 자주 들러서 책을 읽어야겠어요.”

엘라와 델시아가 나누는 대화에 로웬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오세요!”

살짝 웃은 델시아는 로웬의 도움을 받아 책 여러 권을 골랐다. 그것을 받아 든 엘라가 델시아와 함께 도서관을 나섰다.

“또 오세요!”

델시아와 엘라의 뒤에다 대고 로웬이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몸을 살짝 돌린 델시아가 손을 흔들고는 페르도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들고 갈게, 엘라. 편하게 쉬고 있어.”

“백작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아가씨.”

“응. 엘라도 다른 일 하지 말고 쉬어.”

고개를 살짝 숙인 엘라가 위층으로 올라가고 델시아는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델시. 어서 들어오렴!”

“네. 들어갈게요.”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간 델시아가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푹신한 소파에 앉자 페르도 백작이 자상하게 물었다.

“델시, 어떤 서적을 가져왔니? 요즘에는 어떤 종류의 서적을 읽는지 궁금하구나.”

“음, 오늘은…….”

델시아가 들고 온 서적을 페르도 백작에게 내보였다. 페르도 영지의 역사가 적힌 역사서였다. 이를 확인한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페르도 영지의 역사서라니……. 우리 영지의 역사가 궁금했던 게냐?”

“네. 아무래도 소홀했던 것 같아서요.”

델시아의 말에 페르도 백작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델시아도 아놀드 못지않게 가문과 가문이 가진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아델리오 공작과 교제를 시작하면서 가문의 역사보다는 그와의 추억을 새기는 데에 여념이 없게 되었었지만 말이다.

그랬던 델시아가 먼저 나서서 역사서를 읽겠다고 하다니. 페르도 백작은 꼭 과거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델시아가 꺼낸 역사서 한 권만으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페르도 백작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을 언제나 마음속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델시아가 멀쩡하고 모든 게 순조로우며 안정되었던 과거로.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겠지만.

“그래, 델시. 편하게 읽고 가렴. 아비도 아비의 일을 할 테니.”

페르도 백작이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집무실은 고요에 젖었다. 페르도 백작이 서류에 글씨를 쓰고 델시아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 속에서 드문드문 들릴 뿐이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역사서를 읽던 델시아의 눈꺼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무거워졌다. 이내 델시아의 몸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델시아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채로 소파에 비스듬히 눕게 되었다.

업무에 집중하느라 델시아가 있는 쪽을 확인하지 못한 페르도 백작은 한참 만에야 서류를 정리하면서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잠든 델시아를 발견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델시아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에서 책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렇게 두면 감기에 들 텐데. 담요가 어디 있던가…….”

페르도 백작이 제 턱을 매만지며 말하다가 집무실을 둘러봤다. 그러나 제가 집무실에 담요를 뒀을 리 없었다. 철저하게 업무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델시아를 한번 내려다본 페르도 백작이 걸음을 옮겨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집무실로 돌아온 페르도 백작의 손에는 두툼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페르도 백작은 들고 있던 담요를 펼쳐 델시아에게 덮어 준 뒤, 그녀의 머리통을 쓰다듬고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페르도 백작은 간만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채로 업무를 보게 됐다. 제 딸아이가 깨지 않도록 움직임과 소리를 최소화하는 데에 더 신경 쓴 탓이었다.

* * *

가리어졌던 진실은 에드윈의 일상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다이어리를 확인한 직후부터 에드윈은 중요한 대외 활동 외에는 저택을 나서지 않았으며, 내키지 않아도 걸음 하려 노력했던 사교계에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사실상 칩거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그가 갓 나선 사교계에 급작스럽게 발길을 끊은 이유에 관해서 밖은 시끄러웠다. 그러나 에드윈이 자리를 지키는 아델리오 저택 내부는 고요했다. 폭풍 전야라는 말이 어울릴 듯 사용인들은 제대로 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조용하게 움직였다.

“대체 무슨 일이시래?”

“그러게. 노라, 넌 전해 들은 거라도 있어?”

“아니, 나는 별채에서만 나도니까 들은 게 있을 리 없지. 안나는?”

세 명의 하녀가 하녀장의 눈을 피해 모여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중에서도 안나의 안색이 제일 창백했다.

“……아니.”

“안나 너는 주인님의 집무실과 침실을 도맡아 청소하니까 뭐라도 전해 들은 게 있을 줄 알았지.”

“그런 거 없어. 나도 매번 눈치 보면서 청소만 하다가 나오는걸.”

안나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는 제가 한 짓들을 혹여 제 주인이나 그와 긴밀한 관계인 테오가 알아챌까 두려웠다. 알아챈다고 해도 제가 최대한 잡아뗀다면 어떻게든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지만……. 안나는 켈리안 후작이 줬던 돈을 어디에 두었는지 그 위치를 다시금 상기하며 침을 삼켰다.

“어머, 일하지 않고 이런 곳에 모여서 쉬고 있으면 어떡해? 어서 각자 자리로 돌아가.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안나를 비롯한 하녀들이 이 층 창고에 모여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하녀장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들어와 으름장을 놓았다. 하녀장의 등장에 움찔거린 하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창고를 빠져나갔다.

“참, 안나.”

“네, 네?”

마지막으로 창고를 빠져나가던 안나를 하녀장이 불러 세웠다. 그녀는 긴장한 낯으로 뒤로 돌아 하녀장과 마주했다.

“주인님께서 당분간 침실과 집무실 청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

“네? 그러면 저는…….”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노라와 함께 별채를 관리하렴.”

“……네.”

“오늘부터 하면 된단다.”

말을 마친 하녀장은 안나보다 먼저 창고를 나섰다. 기어이 제 주인이 알아챈 것일까. 그럴 리 없는데……. 안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하녀장의 뒤를 쳐다보다가 노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안나, 안색이 안 좋아. 꾸지람이라도 들었어?”

“아, 아니.”

노라의 말에 안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노라는 그런 안나를 유심히 살피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 잘한다고 칭찬만 받던 네가 꾸지람을 들을 리 없지. 어쨌든 한동안은 안나 너와 별채를 관리하게 돼서 좋아.”

“으응, 나도…….”

노라는 안나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뺨을 긁적거렸다. 언젠가부터 안나는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처럼 굴었다. 꼭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가진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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