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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47화 (47/94)

<47>

“델시, 자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과거의 파편을 더듬던 델시아가 문을 두드리는 제 아버지의 목소리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 아니요. 아직 안 자요.”

“그렇구나. 다른 건 아니고…… 몸 상태가 괜찮으면 내일은 나들이라도 다녀오는 건 어떤지 묻고 싶어서 왔단다.”

“정말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 다녀온다면 괜찮단다. 그럼 이만 가 보마. 잘 자렴.”

“네. 안녕히 주무세요.”

이내 제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델시아는 깃펜을 내려놓고 다이어리를 덮었다. 다이어리를 쓰는 일에 더는 집중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지가 선뜻 권한 나들이가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제 아버지도 권유할 정도면 제 몸 상태가 제법 괜찮아졌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내일 아침 존에게 쿠키를 구워 달라고 해야 할 듯했다. 나들이에서 간식거리가 빠지면 안 되니까.

다이어리를 서랍에 넣고 깃펜을 정리한 델시아가 침대에 누웠다. 인공 마력 심장도 델시아의 설렘을 아는 것인지 꼭 진짜 심장인 양 콩닥거렸다. 이불을 덮은 델시아가 캐노피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바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덕인지 아니면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다는 차를 마신 덕분인지, 평소보다 잠이 들기 수월했다. 델시아는 뒤척이지도 않고 곤히 잠들었다. 잠든 이의 검푸른 새벽은 금세 지나갔다.

거멓던 새벽은 슬슬 피어오르는 햇살에 서서히 스러져 갔다. 주황빛 햇살에 하늘이 덧칠됐다. 델시아의 방 안 가득 햇볕이 내리쬐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탓에 햇빛이 오롯이 들이닥치자 평온하던 델시아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새근새근 내쉬어지던 호흡이 점차 빨라지나 싶더니 이내 델시아의 눈이 뜨였다.

“…….”

델시아는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며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델시아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렸다. 이내 델시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창가를 응시했다.

그녀는 방을 가득 채운 햇살을 맞으며 눈을 살짝 감았다. 적당한 따스함이 몸에 감돌자 기분이 좋았다. 괜히 배시시 웃은 델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가에 손을 댄 델시아가 완전히 해가 떠오른 하늘을 바라봤다.

백작 성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기에 하늘이 아주 잘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민가와 울창한 숲도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찼다. 델시아는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숲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의자에 걸린 숄을 챙긴 델시아가 그것을 몸에 두르고는 침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온 델시아는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다 식당을 가기 전에 있는 주방 문 틈새로 고개를 빼꼼 내민 델시아가 안을 살폈다.

주방과 식당을 담당하는 존이 미소를 띤 얼굴로 한창 요리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델시아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놀란 델시아가 서둘러 몸을 돌려서 확인하자 제 아버지인 페르도 백작이 보였다. 일찍부터 멀끔히 차려입은 백작은 델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잘 잤니, 델시?”

“네. 아버지도 좋은 꿈 꾸셨어요? 아직 이른 시간인데 바빠 보이시네요. 무리하시는 건 아니죠?”

“그럼. 무리하지 않는단다. 델시 네가 어제 내게 무리하지 말라고 했었잖니.”

그 말에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일이 바빠도 적절히 휴식하셔야 하고요.”

“그래, 델시. 노력해 보마.”

기쁜 얼굴로 대답한 페르도 백작이 팔을 뻗어 주방 문을 활짝 열었다. 삐걱거리며 문이 완전히 열리자 그들을 확인한 존이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좋은 아침이네요!”

“좋은 아침이네, 존. 아침부터 분주해 보이는군. 아침은 간단히 차려도 된다고 했잖나.”

“하하, 우리 아가씨께서 드실 음식인데 어떻게 간단히 차립니까!”

“존, 자네의 정성은 높이 사지만, 자네가 무리하는 건 우리 델시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거야. 그렇지, 델시?”

“네.”

델시아의 대답에 페르도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꼭 저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듯해 존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머나, 일찍 일어나셨네요. 푹 주무셨어요?”

“데보라, 좋은 아침이야.”

그때 데보라가 다가와 인사했다. 데보라는 트롤리에 음식을 나르며 말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날씨가 좋더라고요. 이런 날에 호수를 구경하면 수면이 반짝이는 절경을 볼 수 있어요.”

“그럼요. 데보라가 오랜만에 맞는 말을 꺼냈네요. 페르도 호수는 언제나 아름답지만, 해가 높이 떠오른 낮과 달이 크게 떠오른 새벽이 가장 절경이죠.”

그릇에 음식을 담던 존이 한마디 거들었다. 마치 델시아의 외출을 종용하는 것 같은 어조에 페르도 백작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에 델시에게 나들이를 권유했네. 델시, 존과 데보라의 말대로 오늘 호수를 구경하고 오는 건 어떻니?”

“음…….”

델시아는 제게 시선이 집중되자 눈치를 보다가 말을 삼켰다. 호수보다는 숲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마침 버려진 숲에 관한 과거의 기억도 떠올랐고……. 그리고 호수를 구경하는 것보다 조용한 숲에 들어가 나무에 등을 대고 책을 읽는 편이 더 좋았다.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던 델시아가 활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델시아가 애매한 행동을 보이자 페르도 백작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대답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우선 아침부터 먹자꾸나, 델시. 존이 새벽부터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어서 맛을 봐 줘야 하지 않겠니?”

“하하, 두 분 다 만족스러워하실 겁니다. 어제보다는 가볍게 준비해 봤습니다.”

“자신 있는가 보군.”

“저는 늘 자신 있습니다.”

존이 그렇게 말하며 음식을 담으며 생긴 자국을 깨끗한 헝겊으로 훔쳤다. 식당으로 가 자리에 앉은 델시아와 페르도 백작은 존이 나르는 음식을 확인했다.

“감자를 으깨어 만든 샐러드라. 양고기 스튜보다는 확실히 가볍군.”

“아가씨께서 고기보다 채소를 더 좋아하신다는 걸 나중에야 기억해 냈지 뭡니까.”

“맞네. 델시는 예전부터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

델시아는 포크를 들어 존이 만든 샐러드를 맛보았다. 으깬 감자 샐러드는 델시아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샐러드를 음미한 델시아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맛있어, 존.”

“역시. 아가씨는 맛을 아십니다.”

존은 그렇게 말하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페르도 백작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가볍게 끝낸 델시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하셨던 외출 말인데요.”

“그래, 델시. 호수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니?”

“음, 호수보다는 숲으로 나들이를 가고 싶어요.”

“숲?”

“네. 어렸을 적에는 자주 갔던 숲인데…… 크고 나서는 못 가 봤잖아요. 성처럼 숲도 그대로인지 가서 보고 싶어요.”

델시아의 말에 페르도 백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찡그리다가 물었다.

“델시, 어디에 있는 숲을 말하는 거니?”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그래. 버려진 숲만 아니면 괜찮단다. 그곳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며칠을 허비하기 십상인 곳이니…….”

델시아는 제 아버지 입에서 ‘버려진 숲’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움찔했으나 서둘러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나 제 아버지의 말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버려진 숲은 일전부터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데보라와 그곳에 처음 갔던 것도, 왜 버려진 숲이라고 불리는 것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몇 날 며칠을 졸랐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모두가 입을 모아 불길하다고 이르는 숲이었다.

“그래요. 버려진 숲만 아니면……. 그곳은 너무 위험하잖아요. 좋지 않은 소문도 많고요.”

데보라의 말에 막 식당으로 돌아온 존이 맞장구쳤다.

“암, 그렇지. 버려진 숲은 페르도 영지에 오래 산 이들도 혀를 내두르잖냐. 난다 긴다 하는 녀석들도 그 숲에서는 길을 잃거나 실종되었다지.”

델시아는 존과 데보라가 한마디씩 거들 때마다 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참! 나들이에는 간식을 챙겨 가셔야죠! 존 아저씨께서 솜씨 발휘를 하셔야겠네요. 아저씨, 어제 구운 쿠키보다 훨씬 더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드리는 건 어때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다행히 데보라가 화제를 돌려 주는 바람에 델시아는 잠시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페르도 백작은 어제처럼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외출에 나섰다. 그러나 델시아의 다정한 배웅에 금세 풀어진 낯으로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며 웃음 지었다.

제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온 델시아는 존이 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덕에 식당과 연결된 창 없는 창문으로 델시아를 살피던 존은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 했다.

“아가씨, 이런 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쉬고 계시면 제가 잘 준비할 수 있는데요!”

“나도 쿠키를 구워 보고 싶어, 존.”

“쿠키를…… 아가씨께서요?”

“응. 직접 구운 쿠키를 가지고 나들이 가고 싶어.”

“하지만…….”

존이 망설이며 밖에 서 있는 데보라에게 눈짓했다. 그의 도움 요청을 확인한 데보라가 주방으로 다급히 들어와 말했다.

“아가씨, 아무래도 주방엔 화기가 많아 위험한 데다가 답답하실 거예요. 쿠키 모양만 같이 만드시는 건 어때요?”

데보라가 내민 절충안에 델시아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어쩌겠는가. 쿠키 모양이나마 만들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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