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46화 (46/94)

<46>

“델시, 쿠키는 맛있니?”

영지를 살피러 갔던 페르도 백작이 식당으로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입을 우물거리며 존과 데보라가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던 델시아는 제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페르도 백작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사용인에게 건네고는 델시아와 존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바람에 옆으로 밀려난 존이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제 주인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오랜만에 먹어서 더 맛있어요. 아버지도 드실래요?”

“오, 델시.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토록 기특할 수가 있겠니? 아마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일 게다.”

페르도 백작은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말하고는 존을 힐끗거렸다. 그러자 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팔짱을 꼈다.

“질투의 상대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존 아저씨?”

데보라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존은 그녀의 말에 과장된 음성으로 부정했다.

“데보라, 내가 델시아 아가씨를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은 맞지만, 주인님을 질투하지는 않는단다. 아무렴!”

“네에, 네.”

“그 이해는 못 하지만, 그러는 척하는 것만 같은 투는 뭐냐, 데보라?”

“글쎄요. 그 이유는 아저씨께서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존과 데보라가 다시금 옥신각신 다투려고 하는 틈을 타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의 귓가에 작게 물었다.

“델시, 아비와 산책하지 않겠니? 이미 많이 했겠지만, 아비와 하는 것은 또 다른 묘미가 있을 게다.”

“저는 좋은데, 아버지께서는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델시, 너와 하는 산책이야말로 내게는 기쁨이란다.”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을 잠시 쳐다본 델시아가 빙긋 웃으며 꼭 잡았다. 델시아는 여전히 다투는 중인 존과 데보라 그리고 그들을 말리느라 바쁜 엘라를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성 복도를 걸으며 페르도 백작은 오늘의 일과를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안정되어 있더구나. 시장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다행이에요, 아버지. 아버지께서 수도에 계시면서도 힘을 쓰신 덕분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델시. 그래도 내심 걱정이 많았단다.”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아버지의 말을 듣던 델시아의 시야에 무언가 익숙한 물건이 들어왔다. 기다란 나무판이었다. 성 한쪽 벽에 걸린 나무판을 발견한 델시아가 그것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아버지, 저기 저거요.”

“저기? 아, 델시 너와 아놀드의 키를 쟀던 나무판이구나. 아직까지 이곳에 걸려 있을 줄은 몰랐는데…….”

델시아는 페르도 백작의 손을 잡은 채 나무판 앞으로 향했다. 나무판에는 제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저와 아놀드의 키가 표시되어 있었다. 델시아는 작게 적힌 숫자들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물었다.

“정말 제가 이렇게나 작았어요?”

“그럼, 델시. 존이 너를 볼 때마다 또래보다도 훨씬 작은 것 같다며 걱정할 정도였단다. 지금은 이렇게 잘 자라 주었지만.”

“세상에……. 솔직히 믿기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작았다니.”

델시아는 믿기지 않는 듯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엄지로 제 키가 표시된 부근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바라봤다. 곁에 서서 델시아를 내려다보던 페르도 백작의 눈가가 돌연 붉게 달아올랐다.

무게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자란 것인가. 그토록 작았던 아이는 훌쩍 큰 것도 모자라 부모인 저보다 먼저 눈을 감을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다.

“…….”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를 볼 때마다 솟구치는 설움과 비통함을 꾹 눌러 담고는 심호흡했다. 델시아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제 딸도 덩달아 실의에 빠질 것이다. 아버지인 제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그녀가 절망하지 않도록 도와야만 한다.

“누구보다도 다정하게 자란 델시아 네가 자랑스럽구나.”

페르도 백작의 말에 나무판에 박혀 있던 델시아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따스한 쪽빛 눈동자를 잠시간 말없이 쳐다보던 델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자상하고 따뜻하신 아버지의 딸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기뻐요.”

“오, 델시…….”

페르도 백작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델시아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작게 한숨 쉬었다. 델시아의 체력은 많이 회복된 것 같으나 체력과 생명력은 별개였다. 델시아가 운동하고 약을 먹고 만전에 만전을 기해도 이 이상의 건강 회복은 어려울 터다.

델시아에게 있는 건 그녀의 심장이 아니라 인공 마력 심장이었으니까. 마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을 선고했지만,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녀가 선고받은 일 년보다 더 살지 아니면 살지 못할지 마녀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페르도 백작은, 그러니까 델시아의 아버지는. 남은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우스운 발악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제 아버지의 품에서 나온 델시아는 그와 함께 바깥으로 향했다. 오후의 절반 이상을 바깥에서 보냈으나 제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은 또 달랐다.

“델시, 이곳에 있는 게 네게 큰 힘이 되었으면 한단다.”

“이미 큰 힘이 되고 있는걸요. 존과 데보라를 다시 만나서 기뻐요. 그리고 다른 사용인들도 따뜻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델시 너와 긴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란다. 축제 때까지만, 이 못난 아비를 이해해 줄 수 있겠니?”

“네, 그럼요. 영주민들을 위해 항상 노력하시는 아버지가 좋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아버지께서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잘 기다릴 수 있어요. 이제 어린아이도 아니잖아요.”

델시아의 말에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목이 메어 제대로 된 문장을 내뱉을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욕심을 부려도 될 텐데, 딸아이는 이런 순간에마저 저를 배려한다.

아델리오 공작의 곁에 가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저와 아놀드를 설득했었던 과거가 무색할 만큼이나 미련 없는 모습이었다. 페르도 백작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눈물을 보일 것 같아 괜히 헛기침하는 척 큼큼거렸다. 속이 쓰렸다.

* * *

저녁을 먹고 침실로 올라온 델시아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는 심신이 지쳤었기에 다이어리를 펼쳐 볼 힘도 없었다. 아침에 들었던 축제 이야기를 기록하던 델시아의 손이 멈칫거렸다.

“버려진 숲…….”

델시아는 언젠가 버려진 숲에서 길을 잃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제 놀이 상대가 되어 주던 에드윈조차 바빴던 시기였기에 데보라와 함께 나들이를 갔었다. 오랜만의 나들이였기에 어린 델시아는 굉장히 들뜬 상태였었다.

그러나 데보라가 돗자리를 펴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저는 겁도 없이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에 발을 딛자 귓가에 들리던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었다. 너무나 인상 깊은 일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델시아는 길을 잃었다. 뒤를 돌아봐도 데보라는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숲의 입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찾으려 한참 걷던 델시아는 커다란 나무와 그 옆에 세워진 탑을 발견했다.

그리고 탑에 나 있는 창문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제 또래의 남자아이 또한. 남자아이는 델시아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요정이야?’

아이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당황한 델시아가 고개를 붕붕 내젓자 아이의 눈은 더 동그래졌다.

‘요정이 아니라고?’

‘응. 평범한 사람이야. 요정을 기대했다면, 미안.’

‘요정이 아닌데 이 숲에 들어온 거야? 어, 어떻게?’

‘들어오면 안 되는 숲이었어? 난 몰랐어, 미안해. 길을 잃어서 다시 못 나가고 있었거든.’

델시아의 말에 남자아이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금세 아래로 내려왔다. 아이는 델시아를 경계하며 주춤거렸다.

‘왜 그래?’

‘아니야. 그것보다 나가는 길이 궁금한 거야?’

‘응. 데보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말도 없이 사라져서 놀랐을 거야.’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면 얼른 가야겠네. 그 사람도 숲에 들어오게 된다면 곤란해질 테니까. 금방 나가게 해 줄게.’

남자아이가 앞장섰다. 델시아가 헤매며 빙빙 돌던 길을 남자아이는 망설임 없이 가로질렀다. 남자아이를 뒤따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델시아가 들어온 숲 입구가 보였다. 델시아는 숲 입구에 서서 아이를 쳐다봤다.

‘고마워. 넌 이름이 뭐야?’

‘모르는 존재한테는 이름 알려 주는 거 아니랬어.’

‘나는 델시아노르 페르도야. 편하게 델시아라고 불러.’

‘…….’

‘오늘은 내가 길을 잃는 바람에 오게 됐지만, 다음에는 놀러 와도 돼?’

아이는 말없이 델시아를 보다가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든가.’

‘진짜지? 그럼 내일 또 올게. 내일 돼도 내 이름 잊으면 안 돼!’

‘……알았으니까 얼른 가. 숲에 들어오는 인간은 너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다른 인간을 데려올 생각은 말고.’

숲을 나간 델시아는 데보라에게 약간의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에 들떠서 귀담아듣지 않았다. 끝에 가서는 데보라도 포기한 듯 말이라도 하고 가라며 잔소리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 날. 델시아는 데보라와 함께 다시 숲으로 향했다. 데보라는 델시아를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델시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혼자 가시면 저 걱정돼서 안 돼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해요!’

‘괜찮아, 데보라. 아버지께서 호신용 목걸이를 주셨어. 마법 식이 적혀 있는 목걸이라고 하셨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목걸이를 쓸게. 그럼 되지?’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10분이에요. 그 시간이 지나도 아가씨께서 나오시지 않으면, 찾아갈 거예요. 아셨죠?’

‘응! 다녀올게, 데보라.’

신기하게도 델시아는 어제와는 달리 길을 잃지 않고 금방 아이를 만났던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10분이라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아이와 한두 마디만 나눠도 시간은 금방 지나갔으니까. 어느 날은 아이가 물었다.

‘나랑 더 이야기하고 싶어?’

‘응. 그런데 데보라가 10분밖에 시간을 안 줘. 이것도 많이 준 거랬어.’

‘그러면…….’

델시아에게 이름까지 알려 주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마음의 문을 연 상태였던 아이는 그녀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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