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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시아의 짐이 하나둘 챙겨지고 페르도 백작이 가져갈 서류도 하나둘 정리가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델리오 공작가에 전달해야 할 파혼장에 대한 답신뿐이었다. 델시아의 결정을 기다리느라 답장을 아직 보내지 못했었다.
페르도 백작은 짐을 싸고 물건을 정리하느라 어수선한 델시아의 침실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책상에서 물건을 챙기느라 바쁜 델시아가 보였다.
“델시, 바쁘니?”
델시아의 곁으로 다가선 페르도 백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급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놀란 델시아가 커다래진 눈으로 페르도 백작을 바라보았다.
“어,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단다. 정리하느라 바쁘던데, 아비가 방해한 것은 아니지?”
“아니에요. 다 끝나 가던 참이었어요.”
“그럼 잘 맞춰서 왔구나. 다른 게 아니고 네게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단다.”
페르도 백작이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든 서신을 꺼내 보였다. 일전에 델시아가 읽고 나서 반으로 접어 두었던 파혼장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제 아버지가 따로 보관하고 있었던 듯했다.
델시아는 보기만 해도 음식물이 얹힌 것처럼 가슴이 턱턱 막히는 파혼장을 짧게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잖아요.”
“그래도 델시, 네 의견이 제일 중요하잖니. 언젠가 그의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고 너도 믿었었을 테고.”
“그랬었죠. 그랬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델시아가 파혼장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페르도 백작은 책상 위에 파혼장을 올려 두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럼 남은 것은 하나겠구나. 델시, 네 이름을 이곳에 서명하면 된단다.”
페르도 백작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을 가만히 쳐다보던 델시아가 아직 정리하지 않은 깃펜과 잉크를 꺼냈다. 펜촉에 잉크를 담뿍 묻힌 델시아가 빈칸에 차분히 서명했다.
‘델시아노르 페르도.’
그 이름이 파혼장 위에 적히자 기분이 이상했다. 체념하고 포기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일말의 미련과 애석함. 에드윈과의 가장 단단하던 연결고리가 이렇게 끊어지고 말았다. 고작 제 이름 하나, 에드윈의 이름 하나를 적는 것으로.
고귀하던 서약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약속이, 모두에게 맹세했던 영원이.
이름을 적는 것으로 전부 없던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이렇게나 간단한 일이었다. 에드윈이 말한 파혼은 이렇게나 간단하고도 손쉬운 일이었다. 왜 이제야 서명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우스울 정도로 금방인 일이었다.
약혼식까지의 거리는 그토록 멀었는데, 파혼은 이리도 간단했다. 델시아가 흐릿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이 파혼장에 서명하며, 에드윈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후련하고 홀가분했을까. 아니면 아무런 감흥도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델시아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에드윈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분명 그는 파혼장에 제 이름을 서명하며 일말의 미련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었다.
“델시?”
델시아의 웃음에 놀란 페르도 백작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놀란 델시아가 서둘러 고개를 내젓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냥…… 우스워서요.”
그래. 우습다면 우스운 생각이었다. 무표정하게 이름을 쓰며,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에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는 에드윈을 떠올리는 것은.
“그럼 렌토에게 전달하라고 알리마. 급한 것 없으니 찬찬히 준비하렴. 소중한 물건은 잘 챙겨야 하잖니.”
“네, 그럴게요.”
대답을 마친 델시아는 제가 직접 소지할 가방에 다이어리와 깃펜, 즐겨 보는 책을 하나씩 넣었다. 그러다 책상 서랍을 연 델시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드윈과 주고받은 편지를 넣어 둔 서랍이었다.
빼곡하게 놓인 편지와 희미하게 느껴지는 에드윈의 향에 델시아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것들을 버린다거나 태우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에드윈과의 추억이었으며 한때 우리가 연인이었노라는 흔적이었으니까. 델시아는 편지의 처리를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열었던 서랍을 다시 닫은 델시아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치 그 편지를 적어 보내던 에드윈에게 인사하듯 느릿하고 망설임이 가득한 눈짓이었다. 그렇게 에드윈과의 기억을 내려놓은 채 가방을 닫으려던 델시아가 잠시 멈칫거렸다.
이미 결정을 끝냈건만 그의 편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때의 추억 정도는 가져가고 싶다는 이기심이 피어오른 듯했다.
결국 편지까지 가방에 넣은 델시아가, 엘라에게 가방을 건네고는 침실을 나왔다. 돌아서서 저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침실을 가만히 응시한 델시아가 찬찬히 계단을 내려갔다.
엘라는 델시아가 비틀거리지 않도록 도우며 말을 걸었다.
“아쉬우시겠어요.”
“음…… 가끔은 생각이 나겠지. 그래도 정들었던 곳이니까.”
수도의 저택을 떠난다는 게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고, 델시아 또한 이 저택에 정이 많이 들었기에. 그러나 가야만 했다. 이곳에 계속 머무르다가는 저도 모르는 이기심이 피어올라 스스로를 갉아먹을 것이었다.
델시아는 페르도 백작이 기다리는 저택 바깥으로 향하려다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엘라가 의아한 눈으로 델시아를 쳐다봤다.
“두고 오신 거라도 있으세요? 제가 가져올까요?”
“아니, 엘라. 나……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서. 아버지께는 먼저 타시라고 전해 줘.”
말을 마친 델시아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엘라가 뒤통수에 대고 조심하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저택 후원에 도착한 델시아가 후원 깊숙한 곳까지 걸음을 옮겼다.
웬만한 사용인들은 잘 다니지 않는 곳이지만, 델시아는 아끼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델시아와 에드윈의 추억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찾던 곳에 당도한 델시아가 찬찬히 숨을 내쉬며 아래를 응시했다. 유칼립투스였다. 푸릇한 유칼립투스를 응시하는 델시아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언젠가 에드윈이 이곳에 흔적을 남기자며 가져왔었던 게 이렇게 추억이 되어 이곳에 남았다. 델시아는 햇빛을 받으며 평온하게 있는 유칼립투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봐야 할 것을 전부 봤으니 이제는 영지로 가야 한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델시아가 어느새 마차 근처까지 도착했다. 델시아가 마차 쪽으로 향할 때였다.
“……델시아.”
그 목소리에 델시아의 걸음이 멈췄다. 우뚝 멈춰 선 델시아가 찬찬히 몸을 돌렸다. 저를 기다렸는지 퍽 다급한 모습의 에드윈이 보였다. 델시아는 일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를 바라봤다.
“델시아…….”
에드윈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델시아를 응시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게 무어라 말을 해 주길, 잠깐 보았던 기억에서처럼, 그때 발코니에서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어떤 말이라도 해 주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러나 델시아는 이미 체념한 지 오래였다. 이미 렌토를 통해 서명을 완료한 파혼장도 공작저로 보낸 이후였고.
꼭 기억을 되찾은 사람처럼 구는 모습에 델시아는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참아 냈다. 일말의 미련까지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떠한 여지도 남겨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델시아가 힘들었던 때에 에드윈은 곁에 없었다.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그만둘 이유는 충분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이제는 전부…… 그만할래요, 공작님.”
고개를 숙인 델시아가 중얼거리듯 빠르게 말하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에드윈은 가지 말라는 말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노력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이윽고 델시아가 탄 마차가 출발했다. 에드윈은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마차의 뒤꽁무니만을 멍하니 응시했다.
― 멍청한 아델리오.
파우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핀잔을 주어도 그저 멍한 눈으로 마차가 있던 자리를, 델시아와 눈을 마주쳤던 자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저를 부를 때 에드윈이 아닌 공작님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이윽고 에드윈의 무릎이 꺾였다.
에드윈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황망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심장이 아팠다. 몸에서 뜯겨나갈 듯 괴롭게 굴었다.
“주, 주인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 나온 테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에드윈의 몸을 일으켰다. 에드윈은 테오가 일으키는 대로 힘없이 일어났다.
“이, 일단 마차에 타세요. 어서요.”
테오의 도움으로 마차에 탄 에드윈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있었다.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이상하리만치 목이 멨다.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흔들리는 꼴이라니. 우스웠음에도 스스로를 비웃을 수가 없었다. 에드윈은 일그러진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어떤 모진 말보다도 그녀의 그만하겠다는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
마차에 탄 델시아가 차창 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백작저가 멀어져 있었다. 델시아는 이제는 점처럼 보이는 에드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델시, 공작이 네게 또 모진 말이라도 한 거니? 응?”
“아니, 아니에요.”
짧게 대답한 델시아가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덤덤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홀가분한 것도 같았다. 델시아는 눈동자를 몇 번 끔벅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이제 얼마 후면 백작 영지에 도착할 것이다. 에드윈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는 백작 영지에.
그리고 델시아도 미련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했음에도 어딘가에 남아 몸집을 불리는 미련에서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