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차를 한 모금 삼킨 데이지가 덧붙였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레이디 델시아노르도 이미 잘 알고 있었나 보네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어요. 그렇죠?”
“……부인.”
“네, 말씀하세요.”
“이런 식의 발언은 다소 무례하다고 느껴지고…….”
“어머, 레이디 델시아노르. 제가 무슨 무례를 범했다고 그러세요?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연장자로서 조금 조언해 준 것뿐인걸요. 제 조언을 무례하다고 느꼈다니…… 안타깝네요.”
데이지는 부러 비웃음을 터트리고는 찻잔을 내려놨다. 값비싼 찻잔을 훑던 데이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진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으니…….”
“방금 뭐라고 하셨죠?”
“어머, 제가 무슨 말을 했던가요? 레이디 델시아노르도 참, 농담이 지나치네요.”
데이지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델시아를 보는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우월감과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데이지는 굳은 얼굴을 하는 델시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다 레이디 델시아노르를 위한 조언이었으니까요. 무례하고 서운하다고 느꼈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요.”
데이지가 생긋 웃고는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델시아는 방금까지 데이지가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라던 대로 되었으나 그런 것치고는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제삼자를 통해 다시금 상기하니 비참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찬찬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델시아가 한숨을 뱉었다.
“이게…… 이게 맞는 거겠지.”
그래. 이게 맞는 것이다. 더는 미련이 생기지 않도록 썩어 문드러진 곳을 후비고 또 후벼야만 한다. 재생할 수조차 없게끔.
데이지가 떠나고 침실로 돌아온 델시아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무기력해졌다. 수도를 떠나 영지로 돌아갈 결심을 하니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니 멀쩡하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델시아는 식음도 전폐한 채 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페르도 백작은 켈리안 후작 부인과의 만남을 괜히 허락했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후작 부인이 무어라 말해서 델시아가 저렇게 무기력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로 힘을 잃은 것인지 딱 잘라 판단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는 델시아를 지켜보고 곁에서 응원해 주는 것밖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페르도 백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수프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델시아의 침실 문 앞에 섰다.
“델시, 아침을 가져왔단다. 아침이라도 먹으렴. 응? 계속 끼니를 거르다가는 몸이 상한단다.”
“…….”
침실 안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페르도 백작은 트레이를 든 채 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델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델시, 언제든 말하렴. 이곳에 계속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요. 괜찮아요.”
지친 목소리가 문 틈새로 들렸다. 얼핏 들어도 힘겹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페르도 백작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식사라도 하렴. 응? 몇 입 안 먹어도 되니까 뭐라도 먹으렴.”
“…….”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던 페르도 백작이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겨 아래층으로 향했다. 집무실로 들어간 페르도 백작은 의자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을지…….”
“……아버지.”
그때 아놀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아버지, 델시아의 말대로 영지로 돌아가시는 건 어때요?”
“나도 고민해 봤단다. 그런데 영지로 돌아간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지……. 외려 델시의 몸 상태가 악화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란다. 비안나와도 멀어지고…….”
“비안나는 마녀니까 텔레포트를 해서라도 찾아올 거예요. 그리고 영지로 돌아가서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는 편이 나을 것 같고요.”
“그래. 역시 그렇겠지.”
페르도 백작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아놀드를 쳐다봤다. 그래, 어느샌가 자란 아들이 이제는 제 버팀목 노릇을 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벅차오르는 순간인가.
아직도 제 눈에는 어릴 적 모습 그대로인데…… 언제 이렇게 자라서 제게 힘이 되어 주려고 하는가.
“아놀드.”
“네, 아버지.”
“너무 무리하지 말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늘 그렇게 달리다가는 금세 지친단다.”
“……네.”
“집안의 대소사도 마찬가지란다. 네가 아비와 델시아를 위해 힘쓰는 것은 정말 자랑스럽고 기특하지만, 그 때문에 네가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달갑지 않단다.”
페르도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델시아에게 온통 신경이 쏠린 탓에 아놀드를 제대로 다독여 주지 못한 것만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도 아놀드는 여전히 성숙하고 인내심 있게 자리를 지켜 주었다.
그래. 그것이면 된다. 아놀드는 더 무리할 필요가 없다. 페르도 백작의 눈에는 아직 아놀드도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델시아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다고, 조금 더 성숙하게 군다고 해서 완전한 어른인 것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비의 품에서 지내고 있으니.
“배, 백작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렌토가 울상을 지으며 가십지를 내밀었다. 평소에 가십지를 읽지 않는 페르도 백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종이를 건네받았다. 대충 기사를 훑어내리던 페르도 백작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이게 무슨.”
“왜 그러세요, 아버지?”
“오, 델시…….”
페르도 백작의 손에 들린 가십지를 가져온 아놀드가 찬찬히 읽어 내렸다.
《켈리안 후작 부인이 천문학적 단위의 재산 가졌다는 모 백작가의 여식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행했다고 전해진다. 이에……(생략)》
글을 다 읽은 아놀드는 그만 가십지를 구기고 말았다. 이내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가 너나 할 것 없이 델시아의 침실로 뛰어 올라갔다.
“델시!”
“델시아, 문 좀 열어 봐. 응?”
답지 않은 큰 목소리에 델시아가 결국 문을 열었다. 움푹 팬 볼로 부자를 마주한 델시아가 느릿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델시, 켈리안 후작 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 게냐? 그 부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한 게야? 응?”
“…….”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묻는 제 아버지에게 델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는 것밖에는.
***
“오, 세상에. 주인님, 켈리안 후작 부인이 페르도 백작저를 찾아가 델시아 아가씨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대요!”
“그렇군.”
테오는 잔뜩 흥분한 채 말을 늘어트렸다.
“사교계에서 온갖 악담을 퍼붓기로 유명한 부인이기는 해도 이 정도로 못된 사람일 줄은! 가십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아세요?”
“별로 궁금하지 않군.”
“별로 궁금하지 않으셔도 들으셔야만 해요. 주인님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런가.”
“네! ‘켈리안 후작 부인이 성검을 모시는 공작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천문학적 단위의 재산을 가졌다는 백작가의 여식에게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행했다’고 말했다는데, 누가 봐도 주인님과 델시아 아가씨의 이야기잖아요!”
테오가 이를 악물었다. 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었을 델시아를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다. 테오의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발레인도 테오의 뜻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오직 에드윈만이 무덤덤한 얼굴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테오는 황당한 눈으로 제 주인을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주인님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니까요? 당장 이 가십지를 낸 곳을 없애 버려야…….”
“테오.”
“네, 주인님.”
“그게 네가 나서야만 하는 일인가?”
“그러면 아닌가요? 감히 델시아 아가씨를! 분명 후작 부인이 이런 황당하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문을 퍼트렸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에드윈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는 테오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테오, 나설 것 없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예? 어떻게 상관이 없어요. 아델리오 공작가가 이런 가십지에 공공연하게 오르락…….”
“테오, 상관없다고 했다. 이런 가십거리는 관심을 주지 않으면 금세 묻히기 마련이야.”
에드윈은 테오에게 그렇게 말했다. 흥분한 채 씨근덕거리는 숨을 뱉던 테오는 그 말에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주인님…….”
“그만 되었으니 페르도 백작가에 정식으로 파혼장을 보내도록.”
“……예?”
“뭘 자꾸 되묻지.”
테오는 제 주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벙긋거렸다. 이 가십지를 접한 델시아는 상처를 받아 힘겨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람에게 파혼장을 보내라니.
테오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보내.”
“……주인님.”
“토 달 것 없어. 페르도 백작도 예상했을 테니까. 그리고 예정된 날짜보다 늦게 보내는 것이니 그렇게 노려보지 마.”
에드윈은 제 말에 따지려고 들 기세인 테오를 외면하고는 다시 서류를 쳐다봤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처리하며 테오와 발레인을 못 본 체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