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어머니, 아버지.”
“그래, 보니타. 어땠니? 응?”
파티가 끝나고 저택은 금세 정리되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제 부모에게 말을 전하지 못한 보니타는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소식을 전했다.
“……거절당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보니타.”
“공작님께서는 저와 찻잔을 맞댈 시간 같은 건 없으시대요.”
“뭐?”
켈리안 후작과 후작 부인이 황당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보니타는 그들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들을 말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보니타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며, 켈리안 후작과 후작 부인은 이를 책할 생각이 없었다.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튀었으니까.
“분명 공작이 아직도 페르도 백작의 딸을 잊지 못한 것이겠죠.”
“하아, 페르도 백작은 이런 것마저도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니……. 이것 참.”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그때의 감정은 남아 있을 것 아니에요? 그 싹마저 잘라 내야 하는 것을. 우리가 실수했어요. 공작부터 들쑤셔서는 안 됐던 거예요.”
“부인, 그렇다면…….”
“조만간 페르도 백작저로 서신을 보내야겠어요.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놓칠 수야 없죠. 안 그래요?”
후작 부인의 말에 켈리안 후작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떻겠는가. 공작이 그렇게 나오니, 보다 만만한 쪽을 건드리는 수밖에는 없다.
후작 부인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웃었다. 상처를 조금 들쑤신다면 어렵지 않게 떼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페르도 백작은 저택에 도착한 서신을 살피던 도중 수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어제 파티를 주최한 켈리안 후작가에서 백작가로 보내 온 서신이었다. 정확히는 후작 부인이 델시아에게 보낸 것이었지만.
페르도 백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신을 살폈다. 켈리안 후작 부인과 델시아는 접점이 하나도 없을 터인데, 어째서 이런 서신을 보내 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델시아를 찾을 이유가 있던가? 사실은 그런 것보다도 최근 그들이 보이는 행보가 탐탁지 않아 더욱이 의심하게 되었다. 아델리오 공작가에 자꾸 이상한 추파를 던진다는 소식이 벌써 여러 건이었으니…….
페르도 백작은 서신을 노려보며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보낸 것인지 고민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델시아에게 온 서신을 멋대로 열어 볼 수도 없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페르도 백작이 서신을 들고 델시아의 침실로 찾아갔다. 서신을 전해 준다는 핑계로 델시아와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델시, 일어났니?”
“……네, 아버지.”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오자 페르도 백작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델시아의 목소리는 어제보다도 더 가라앉아 있었다. 밤사이 펑펑 울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페르도 백작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음, 델시. 네게 서신이 하나 와서 전해 주려고 왔단다. 괜찮겠니?”
델시아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없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서신이요?”
“그래. 켈리안 후작 부인에게서 온 서신이란다.”
그러자 문 너머로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델시아를 기다렸다. 이내 침실의 문이 열리고 델시아가 얼굴을 내보였다.
“오, 델시.”
“……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잠이라도 설쳤는지 피로한 얼굴을 한 델시아가 아침 인사를 건네자 가슴이 미어졌다.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서신이…… 왔다고요?”
제 딸아이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던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 들어가도 되겠니?”
“음…… 네.”
거절할 것이라는 페르도 백작의 예상과는 달리 델시아는 쉬이 허락했다. 페르도 백작은 문틈 사이로 발을 들였다.
그러고는 델시아와 나란히 침대에 앉아 서신을 열어 보았다. 나이프로 봉투를 열어 서신을 꺼낸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에게 건넸다.
델시아의 작은 손이 서신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읽던 델시아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응? 그게 무슨 말이니, 델시.”
“켈리안 후작 부인께서 저를 만나 뵙고 싶으시대요.”
“후작 부인이 델시 너를?”
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델시, 후작 부인과 너는 개인적인 친분이 없지 않니. 후작 부인이 너를 어떻게 알고…….”
페르도 백작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민에 잠긴 얼굴을 했다. 덩달아 고민하던 델시아가 느릿하게 물었다.
“제게 볼일이 있어서 만나 뵙고 싶으신 거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델시, 후작 부인의 소문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란다.”
“네, 맞아요. 사교계에서는 후작 부인 만큼 나쁜 소문의 귀족이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니?”
“…아버지,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요.”
델시아의 말에 페르도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델시, 설명이 필요하구나.”
“후작 부인께서 무슨 연유로 저를 찾으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분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가십지에 실리겠죠.”
델시아는 잠시 숨을 골랐다. 새벽 내내 뒤척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밤을 새우며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영지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것이었다.
수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으니, 차라리 영지로 돌아가는 게 여러모로 편할 듯했다. 제 가족들에게도 에드윈에게도 더는 상처 주지 않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실이 필요했다.
“갑작스럽게 수도를 떠나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잖아요.”
“델시.”
“특히나 저희 가문은…….”
델시아가 뒷말을 삼키며 제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델시…….”
“괜찮아요, 아버지. 정말로요.”
괜찮다고 연신 말을 이은 델시아가 페르도 백작에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도 페르도 백작은 전혀 안심하지 못했지만, 집무실로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영지로 돌아가고 싶다던 델시아의 속뜻을 어떻게든 짐작해보려 하면서.
그렇게 델시아는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답신이 왔다.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답신이 말이다.
하여 델시아는 엘라의 도움을 받아 분주하게 준비했다. 후작 부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부지런히 준비한 델시아는 어젯밤의 슬픔을 어느 정도 떨쳐 낸 모습으로 설 수 있었다.
응접실에 앉아 후작 부인의 도착을 기다리는데, 엘라가 달려와 후작 부인, 데이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데이지와의 만남은 처음인지라 델시아는 긴장한 낯으로 그녀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부인.”
“반가워요, 레이디 델시아노르.”
데이지가 눈매를 접어 올리며 웃고는 델시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델시아를 살피기 위해 응접실에 들른 페르도 백작은 데이지를 보고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오랜만이네요.”
“편히 이야기 나누시다 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페르도 백작은 그녀가 델시아에게 나쁜 말만 하지 않기를 속으로 바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델시아를 한 번 더 응시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데이지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꽃향기가 넘실거렸다.
역시 돈이 많은 가문이라 그런지 차 하나하나까지도 식견과 그 품질이 남달랐다. 데이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델시아를 응시했다.
“으음, 차가 참 향긋하네요.”
“……네. 그렇죠?”
“긴장할 것 없어요.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긴장하지 않았어요. 해코지하시리라 생각한 적도 없고요.”
데이지는 제 말을 조곤조곤 따라 하는 맹랑한 델시아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페르도 백작가의 일원 아니랄까 봐 말 하나하나 지려고 들지를 않는다.
“음, 레이디 델시아노르. 아델리오 공작과는 좋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괜찮나요?”
찻잔을 내려놓은 데이지의 물음에 델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뜬소문을 잠재우려고 간 파티에서 바보같이 군 탓에 결국, 알음알음 퍼지던 소문이 기정사실화된 듯했다.
테이블 위를 가만히 응시하던 델시아가 살짝 웃었다.
“괜찮아요, 부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데이지는 잠시 말을 고민하는 척,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생각했다. 다짜고짜 꺼내면 적개심이 들 법한 말이었기에 꽤 자연스럽게 내비칠 필요가 있었다.
“상심이 크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부인.”
“아, 네.”
“말씀 중에 끼어들어 죄송하지만, 혹시 저를 위로해주려 찾아오신 건가요?”
델시아의 말에 놀란 듯 잠시 눈을 깜빡거린 데이지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목적을 대놓고 물어 오는 이는 또 오랜만이라 한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하던 데이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
이미 예상했던 대답에 잠시 숨을 고른 델시아가 당황한 척 데이지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죠?”
“레이디 델시아노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수도를 떠나 영지로 돌아가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거예요.”
“네?”
“그렇잖아요. 이곳에 있으면 아델리오 공작은 물론 레이디 델시아노르와 그 가족들까지 여러모로 힘들 게 분명하잖아요. 지금까지의 결과를 봐도 그렇고요.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델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데이지를 마주했다. 그녀는 여유롭게 찻잔을 집어 들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델시아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미 영지로 떠나리라 마음먹은 덕에 속이 쓰리지는 않았다. 참담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