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35화 (35/94)

<35>

파티에서 돌아온 에드윈이 얼굴을 구긴 채 고민에 잠겨 있자 테오가 그의 주위를 서성이며 자꾸만 질문을 던져 댔다.

“어떠셨어요? 델시아 아가씨께서도 오셨던가요? 이야기는 해 보셨어요?”

“……테오.”

“네, 주인님!”

“닥쳐.”

“…….”

에드윈의 차가운 목소리에 테오가 끙, 앓는 숨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오늘 제 주인은 보기 드물게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였다. 평소에도 차갑게 구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테오는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고는 에드윈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 분. 마침내 에드윈이 입을 열고 속 안에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테오.”

“네, 주인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발코니까지 따라온 걸까.”

“……네?”

테오가 멍청한 얼굴로 되묻자 에드윈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놓고는 억울하다는 듯 해명하려 하더군.”

“……어떤 분께서요?”

“페르도 백작의 여식.”

“……아, 아니!”

에드윈의 대답에 테오가 돌연 목소리를 크게 내며 펄펄 뛰었다.

“쉬려고 들어오셨을 수도 있잖아요! 설마 주인님을 쫓아오신 줄 알고 무서운 얼굴로 다그치신 거예요?”

“……닥쳐. 네 생각처럼 그렇게 나쁘게 굴지는 않았으니까.”

“그 기준이 다르잖아요. 주인님은 아가씨께 왜 그렇게 모질게 구시는 거예요?”

“테오.”

“……네.”

“너는 누구의 집사지?”

에드윈이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에 헛기침을 한 테오가 에드윈의 시선을 피했다. 델시아 걱정에 저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만 것이다. 그것도 하늘같이 높은 제 주인께.

테오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주인님. 당연히 위대하고 고귀한 아델리오 공작가의 집사이지요! 새삼스럽게 물으시고 그러십니까?”

그 대답에도 에드윈은 날 선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테오는 한참 동안 에드윈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너스레를 떨어야만 했다.

“그건 그렇고. 테오, 이리 와봐.”

“예? 가, 갑자기요?”

테오의 너스레를 지켜보던 에드윈이 돌연 그를 향해 손짓했다. 테오는 혹여 한 대 얻어맞는 것인가 싶어 눈치를 보다가 에드윈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며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이런 걸 옷에다 붙이고 다니면, 지나가던 새가 모이로 착각하고 달려들 수…….”

테오의 옷에 붙은 흰 실밥을 떼던 에드윈이 말을 잇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주인님?”

“어딘가 익숙한 말인데.”

“저는 처음 듣는 말인데요?”

“그래.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말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에드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를 쳐다보는 테오에게 손을 휘저었다.

“떼어 냈으니 가 봐.”

테오는 제 주인의 이상 행동에 뺨을 긁적거리다가 찬찬히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아델리오 공작저 집무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

“……델시.”

페르도 백작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백작은 파티에서 돌아온 직후,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델시아를 보며 걱정스러워했다. 설상가상으로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델시아의 곁에 있었다던 아놀드조차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니…….

“아버지, 일단 들어가시는 게…….”

“됐다. 아놀드, 너부터 들어가서 쉬렴. 아비는 괜찮으니 말이야.”

“하지만…….”

“괜찮대도. 어서 들어가 보아라. 아놀드 너도 많이 시달렸을 것 아니니.”

페르도 백작의 말에 아놀드가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제 침실로 돌아갔다. 이제 델시아의 침실 앞 복도에는 페르도 백작만이 남았다. 백작은 문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델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응? 이 아비에게만이라도 말해 주렴.”

“…….”

“아놀드에게 대충은 들었단다. 발코니에 다녀온 이후부터 쭉 이런 상태였다고. 그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거니? 응?”

“……아니에요. 괜찮아요.”

괴로운 듯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문 틈새로 흘러나오자 페르도 백작은 눈을 찡그렸다. 가라앉은 델시아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페르도 백작이 마른세수하며 숨을 내쉬었다.

“델시, 이 아비는 네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뿐이란다. 그게…… 이 아비가 가장 바라는 일이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란다. 아비에게 그 일을 이룰 기회를 주지 않겠니?”

“아뇨.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쉬세요.”

“오, 델시. 그러면 식사라도 하렴. 파티에 갈 준비를 한다고 끼니도 거르고, 이런저런 시달림에 먹은 게 없을 텐데……. 아비와 이야기하기 싫으면 끼니라도 챙기렴. 제발, 델시.”

“……배가 고프지 않아요. 내일, 내일 먹을게요.”

델시아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의 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눈을 끔벅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델시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 것을 그랬다. 친우들과의 대화는 나중으로 미뤄도 됐었을 텐데…….

제가 없는 동안 남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못된 말이나 비아냥에 델시아가 상처를 받은 게 분명했다. 페르도 백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어떻게든 델시아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제 딸아이가 쓸쓸하게 괴로움과 우울을 견디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의연하게 군다고 해도 분명 서툴게 극복하다가 되레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델시, 아비는 기다릴 테니 언제든 말하렴. 네 슬픔을 아비에게 나눠 주렴. 이 아비는 네게 힘이 되어 주고 싶으니. 알겠니, 델시?”

“……네. 감사해요, 아버지.”

“그래. 좋은 꿈 꾸렴.”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의 방문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훑다가 제 침실로 걸음을 돌렸다. 걸어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델시아에게 어떠한 힘도 되어 주지 못한 것 같아 죄스럽기까지 했다.

페르도 백작이 방문 앞을 떠나자 어떻게든 울음을 참고 있던 델시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내 델시아의 침실 안은 억눌린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흐, 흐윽……. 흑, 흐흐흑.”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갑게 변해 버린 에드윈을. 별채에서 맞닥뜨렸을 때도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에드윈의 태도보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으니까. 에드윈이 무사한 것을 깨닫고 나니 그가 매정하게 변해 버린 게 눈에 들어왔다.

“흐, 흐으윽, 흑. 에, 에드윈…….”

저를 보며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 그토록 시린 말을 내뱉는 게 정녕 에드윈이던가. 정녕 제 연인이었던 에드윈이던가. 각오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제가 한 일에 대한 부작용임을 진작에 인지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의식이 들고 나서 저를 내려다보며 누구인지 몰라 혼잣말할 때도 델시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 참혹한 현실을…….

“아, 으, 흐으윽. 흐윽…….”

울음만이 나왔다. 너무나 괴로웠다. 결국 끝끝내 에드윈에게 닿지 못했다. 현실을 마주했을 뿐이다. 그와는 마음도, 몸도 그 어느 곳도 닿지 못했다.

그 뺨을 한 번 만졌다면, 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어깨를 살짝 쥐었다면, 누구보다도 따뜻한 손을 잡았다면, 제게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을 훑었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랬다면.

이 후회는 덜했을 것이다. 이 괴로움은 덜했을 것이다.

“흐, 흐윽. 흐흑……. 에드윈. 에드윈…….”

아니, 사실 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못내 미련이 남아, 한 번만 더 머물겠다며 이기적으로 굴었겠지. 델시아는 이토록 나약하고 이토록 한심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언젠가 꾸었던 에드윈과의 행복했던 꿈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 꿈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저렸다. 모든 것이 끝난 직후는 이렇게나 아프고 괴로우며 처참한 것이었다.

“어, 어떡해……. 흐윽. 어, 어떡해…….”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이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한 번만 더 에드윈을 보겠다, 한 번만 더 에드윈과 이야기하겠다. 이런 말만 반복하던 자신인데.

에드윈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걸음을 옮기던 델시아는, 언제나 존재하던 이정표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정표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델시아는 그럴 수 없었다.

“모르겠어……. 흐윽. 정말 모르겠어.”

눈물만이 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방울방울 맺혔다. 마음이 미어졌다.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무언가 걸린 것 같아 토해 내려 소리를 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목만 아플 뿐이었다.

입을 틀어막던 손은 어느새 제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목 부근이 뜨거웠다. 꼭 불덩이라도 삼킨 듯 말이다.

손을 축 늘어트리던 델시아가 옆자리에 놓인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에드윈과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빠짐없이 기록하려고 하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기록할 게 없었다. 단 하나도. 무어라 쓸 말이 없었다. 에드윈은 여전히 찬란하였으며 아름다웠다. 그의 미래에 더 이상 저는 없겠지만. 이렇게 기록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볼 때마다 눈물지을 것이다.

결국, 델시아가 다이어리를 꼭 끌어안고는 울음을 삼켰다. 목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오열하던 델시아가 이내 몸을 축 늘어트려 침대에 뉘었다. 창밖을 응시하니 벌써 시커먼 장막이 드리웠다. 델시아는 시커멓게 물든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날 델시아는 참으로 잔혹한 꿈을 꾸었다. 까맣게 물든 곳에 서서 저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는 에드윈이 나왔다. 그에게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한……. 그런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잠에서 깨었다 다시 잠들길 반복했다. 잠에 빠져 다시 꿈을 꾸면, 어김없이 에드윈이 나타나 가라앉은 시선을 하고 저를 쳐다봤다. 그리고 또 꿈에서 깼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고 델시아는 에드윈의 낯선 얼굴을 또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기는 매한가지인, 그런 게 반복됐다.

델시아는 견딜 수 없었다.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에드윈 없이는 모든 게 어려웠다. 정말 모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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