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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시. 네 마음은 잘 알겠지만, 쉬이 허락해 줄 수 없단다. 너도 알고 있잖니. 네 몸이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아버지, 혹시라도 에드윈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아니라…… 불거져 가는 잘못된 소문을 바로 잡고 싶어서 가려는 거에요.”
“델시, 나는…….”
그저 소문에 불과한 것들을…… 성치 않은 몸으로 나서면서까지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네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작게 덧붙인 페르도 백작이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델시아의 말을 듣고는 정말 두 눈과 귀를 의심했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사교계를 나서려는 이유가 잘못된 소문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니.
페르도 백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응시하는 아놀드에게 물었다.
“아놀드,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델시아가 마음을 굳힌 이상, 돌리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요.”
“아놀드.”
“저도 아버지처럼 델시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델시아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
“델시아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고 무엇보다도 델시아의 건강이 걱정되지만, 그건 델시아 자신도 알고 있는 부분일 테고요.”
아놀드는 다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희의 반대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행할 델시아를 상상하니, 그냥 허락해 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부분만큼은…… 아놀드 네 뜻에 동의한다.”
“차라리 잘 끝맺음하고 왔으면 좋겠어요. 입맛대로 도는 말들이 더는 와전되지 않게요.”
델시아를 파티에 참석시키느냐 마느냐를 갈등하며 눈을 찡그린 페르도 백작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허락에는 당연한 조건이 붙었다.
“그래, 우선은 네 뜻대로 하려무나. 대신,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 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리해서는 안 돼. 지킬 수 있겠니?”
“……네, 네. 고마워요, 아버지. 그리고 오빠도.”
델시아가 비로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페르도 백작도 아놀드도 그녀가 미련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무시하면 금방 사그라드는 게 낭설 아니던가. 그런데도 무리하여 사교계에 다시 발을 들이는 이유는 필시 아델리오 공작 때문일 것이다. 혹여 그에게 갈 피해를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겠지. 혹은 남았을 수밖에 없는 미련 때문이거나.
그들도 사랑하는 이에게 심장을 건네고 델시아와 같은 아픔을 겪는다면…… 비참한 현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미련을 가질 것이었다.
특히나 페르도 백작은 저 또한 그러리라 생각했다. 이미 그런 전적도 있었고.
“델시, 외출을 다녀오느라 피로했을 텐데 올라가서 쉬렴. 의상실에서 들은 이야기가 마냥 좋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네.”
고개를 끄덕인 델시아가 문밖에서 기다리던 엘라와 함께 위층으로 향했다. 엘라의 도움을 받아 고급 향유로 목욕하고 잠옷을 걸친 델시아는 일찍이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던 델시아는 결국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 말았다.
의상실에서의 좋지 않은 일은 빼고 가족들과 함께 켈리안 후작이 여는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는 내용만을 열심히 끄적인 델시아가 다이어리를 덮고 베개에 뒤통수를 댔다.
천장에 달린 캐노피를 가만히 바라보던 델시아가 눈을 꾹 감았다. 간만에 파티에 참석한다는 두려움에 쉬이 잠들 수 없으리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금방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던 델시아가 눈을 떴을 때는,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바로 일주일 뒤에 열리는 파티에 페르도 백작가 일원을 초대한다는 내용의 초대장이 말이다.
델시아는 그 초대장을 보자마자 단골 의상실 주인인 피터에게 서신을 보냈다. 피터는 델시아의 부름에 금세 응했고, 매일 페르도 백작가에 방문하여 그들의 의상을 제작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파티 날이 다가올수록 델시아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피터는 차분하지만 빠른 속도로 의상들을 완성해 갔다. 그리고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는 멀찍이서 델시아를 지켜보며 한숨을 흘렸다.
허락해 주기는 하였지만, 점점 밤잠을 설치는 델시아가 걱정스러웠다. 저러다 쓰러지면 원하는 바도 이루지 못한 채 누워만 있어야 할 텐데…….
페르도 백작은 델시아에게 충분한 숙면의 중요성을 여러 번 상기해 주었으나 효과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델시아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걱정되네요.”
“그러게 말이다. 실망할 일이 생겨서는 안 될 텐데.”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 착잡하고요…….”
우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던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 벌써 파티 날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오늘 밤만 자고 일어나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드레스와 연미복도 때마침 완성되었다.
델시아는 그동안 고생한 피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하고는 말갛게 웃었다. 피터는 그 웃음만으로 충분하다며 너스레를 떨다가 돌아갔다.
파티를 하루 앞둔 델시아의 마음은 널뛰었다.
간만에 파티에 참석할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두려움이 더 컸다. 언제나 시기 어린 시선을 받아온 페르도 백작가의 일원이었기에, 온갖 구설에 오른 전적도 꽤 많았고.
이번에도 비슷할 것이었다. 늘 붙어 다니던 에드윈도 곁에 없으니 더 노골적으로 굴어 올 것이다.
일찍이 잠자리에 누운 델시아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쉬이 잠들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델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아침이었다. 온갖 고민을 하느라 밤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곧 엘라가 준비를 돕겠다며 올 텐데, 고민이 너무 많아 밤을 새워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델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비밀로 하는 게 좋을 듯했다.
***
준비를 끝마치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과거 델시아는 준비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워 사교 활동에 자주 참여하지 않았었다. 또 페르도 일가를 향한 시선도 곱지 않았으니, 사교계에 자주 모습을 비쳐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이는 에드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에드윈은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를테면 그 시간에 델시아와 이야기 하나라도 더, 식사 한 번이라도 더, 티타임 한 번이라도 더 가져야 한다며.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에드윈은 해야 할 일이 줄었으며, 전장에서 허비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메우고 입지를 다져야 할 때가 도래했다.
델시아는 새삼스레 자신과 에드윈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를 떠올려 냈다. 그토록 지우려고 애를 썼음에도 과거의 조각을 떠올리는 일은 이처럼 간단했다.
약간의 빌미만 있어도 금세 수면 위로 떠오르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엘라. 조심히 다녀올게.”
델시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아놀드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켈리안 후작의 저택이었다.
오래간만에 여는 파티라며 그 규모가 굉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아놀드가 웃으며 말했다.
“후작저는 처음이지? 이번에 큰 규모로 열렸다고 하니까 길을 잃거나 나와 엇갈리지 않게 조심해야 해.”
“그래, 델시. 아비가 신경을 써주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 같구나.”
“괜찮아요. 어린애도 아닌걸요.”
델시아는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벌써부터 귀족들의 짓궂고 노골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생각에, 입 안이 바싹 말라왔지만, 굳이 티 내지는 않았다.
“잘 들은 거 맞지? 괜찮은 것도 맞고?”
“으응.”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길만 잃지 마. 다른 사람 따라가지도 말고!”
“아무리 파티가 오랜만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하지는 않아.”
델시아가 힘주어 말하고는 차창 밖을 바라봤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이,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덧칠된 델시아의 마음 같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달리던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켈리안 후작저에 도착한 것이다. 델시아는 이번에도 아놀드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곁에서 페르도 백작이 아쉽다는 듯 시선을 보내왔지만, 일전에 델시아를 두 번이나 도맡아 에스코트하였다는 것을 잊지 않은 아놀드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델시아는 눈을 끔벅거리며 후작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페르도 백작저와는 다른 모양새였지만, 이곳 또한 거대하고 화려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델시아와 아놀드 그리고 페르도 백작이 후작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널찍한 중앙홀에는 먼저 도착한 귀족이 모여 있었다. 아놀드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델시아가 속삭였다.
“만날 사람 없어?”
“응?”
“뜻이 맞는다거나 눈이 맞았다거나…… 그런 사람.”
“……그게 무슨 말이야, 델시아.”
“아직은 없는 거야?”
아놀드가 단호히 고개를 내젓자 델시아가 배시시 웃었다. 내심 제 오빠에게 좋은 사람이 생겼기를 바랐건만,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하는 듯했다.
“델시아, 나 전장에서 알고 지냈던 친우가 보여서…… 잠시 다녀올게. 정말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응, 다녀와.”
아놀드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나도 만나야 할 친우가 있어 다녀와야 하는데, 혼자 둬서 미안하구나, 델시. 여차하면…… 발코니에서 쉬고 있으렴.”
“괜찮아요. 어서 다녀오세요.”
제 오빠와 아빠를 배웅한 델시아가 오도카니 서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에드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언제나처럼 오지 않는 듯했다. 아놀드를 기다릴 겸 아는 얼굴이 몇 명이나 있는지 세어 보던 델시아의 뒤에 누군가 다가왔다.
“저기…….”
낯선 목소리와 인기척에 델시아가 뒤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