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변한 계절에 맞춰 도톰한 연녹색 드레스를 입은 델시아가 엘라의 도움을 받아 아래층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한 사용인들의 얼굴이 밝았다.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기분은 어떠세요? 아! 날이 좋은데 산책이라도 하시는 건 어때요?”
그 인사에 델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따뜻하게 대꾸했다. 사용인들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식당에 도착한 델시아가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먼저 와서 앉아 있던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는 델시아를 보자마자 환한 얼굴을 했다.
“좋은 아침이구나, 델시.”
“델시아, 잘 잤어? 얼굴이 좋아 보이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오빠.”
델시아의 앞에는 수프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식사량이 줄면서 부담되는 음식은 자제해야만 했다. 때문에, 아델리오 공작가에서도 늘 수프로 아침을 대신했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수프를 떠 마시면서도 델시아는 잔잔한 얼굴을 잃지 않았다. 전이었다면 탈력감에, 무력감에 그리고 부끄러움에 숙였을 고개도 꼿꼿했다.
“델시, 수프는 입에 맞니? 아델리오 공작가와 다르지는 않아?”
“아니요, 훨씬 맛있어요.”
델시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움푹 팬 뺨이 안쓰러워 속이 상했지만, 짓는 웃음이 너무나 말갛기에 페르도 백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렇게라도, 이렇게라도 곁에 머물러 준다면. 다 괜찮다.
“델시아, 오늘 뭐 할 거야? 나랑 외출할래?”
아놀드가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며 물었다. 델시아는 아놀드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음…… 아니. 나랑 가면 오빠가 불편할 거야.”
“왜?”
“평소보다 신경 쓸 게 많아질 테니까.”
“뭐?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델시아?”
“…….”
내내 밝았던 델시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그 반응에 아놀드는 초조한 듯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델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그래. 내가 전과 다르잖아. ……여러모로.”
“……여러모로?”
“응. 그동안…… 사교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내 모습도 예전 같지 않으니까…….”
그렇게 답한 델시아가 수프를 한 번 더 떠먹고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제 대답에 아놀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본 델시아가 작게 덧붙였다.
“괜찮아. 대신 한창 유행이라는 베이커리에서 쿠키를 사다 줘.”
“베이커리……. 정말 그거면 되는 거야?”
“응, 정말 그거면 돼.”
델시아의 말을 듣는 아놀드와 페르도 백작에 결연함이 들어찼다. 그 얼굴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엘라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델시아는 입가를 정리하느라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니까.
식사가 끝나고 외출하는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를 배웅한 델시아가 침실로 올라왔다. 책상 앞에 앉은 델시아는 익숙한 손길로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달이 떠오르고 나서야 꺼내던 다이어리는 이제 해가 쨍한 낮에도 쓰였다. 몸이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델시아의 마음이 급해진 탓이었다.
델시아가 펜을 쥐고 다이어리를 써 내려갔다.
[오늘은 평소보다 몸이 가벼웠다. 기분도 좋고 몸도 좋은 것 같다. 아버지와 오빠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준비하고 나갔는데, 어디를 간 걸까?
어디를 간 것이든 수도에서 유행 중이라는 베이커리의 쿠키만 사 온다면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요즘 꿈에 에드윈이 웃는 얼굴로 나온다. 에드윈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했을 법한 모습으로 자꾸 나를 토닥인다.
현실에서의 에드윈은 그렇지 않은데. 꿈속의 에드윈은 다정하다. 한없이 상냥하고 다정하여 나를 자꾸 기대하게 만든다.
그래도 기대할 수는 없다. 아직도 나를 보던 에드윈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그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어찌나 서럽던지 눈물을 왈칵 흘릴 뻔했다. 이름 하나만 기억해 주길 바랐던 바람이 커져서 이 지경까지 되었지만…….
에드윈의 곁에 머물렀다는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에드윈을, 우리 가족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게 속상할 뿐이다.
그동안 너무 이기적으로 군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적어도 가족들 앞에서는 에드윈을 잊은 척해야겠다. 그러면 아버지와 오빠의 마음이 조금은 놓이지 않을까?
그런데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괜찮아지는 걸까? 내게는 반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 반년간 마음의 준비를 끝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에드윈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으면서도 에드윈이 보고 싶으니……. 누군가가 나를 바보라고 욕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다이어리를 덮은 델시아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상하게도 하고 싶은 말들을 하나씩 적을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이어리가 채워질수록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어설픈 미련도 조금씩 떨어지는 듯했다.
곧 있으면 자신도 모든 미련을 버리고, 모든 기대를 버리고 편안해지겠지.
그래. 조금은 자유로워지겠지. 이 모든 것에서.
……그렇게 된다면 정말 편안해질까?
다이어리를 쥔 델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보니타.”
“네, 아버지.”
“나의 딸아.”
“네.”
켈리안 후작이 제 턱을 매만지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가 왜인지 스산하여 보니타는 눈을 내리깐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부디 이상한 요구나 명령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네가 아델리오 공작과 약혼한다면, 우리 가문도 보니타 너의 미래도 완벽할 텐데.”
“아버지,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보니타. 다시 없을 최고의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왔으니 말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기만 하면 된다. 하하! 정말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이지.”
켈리안 후작은 탐욕이 가득 들어찬 얼굴로 크게 웃었다. 그의 안광이 짙은 야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은 보니타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아버지가 어디선가 이상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와서는 무언가를 꾸미는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
“그래, 보니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델리오 공작님께는 정혼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오, 보니타. 내가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총명한 너라면 이미 눈치채고도 남았을 터.”
“무엇을요.”
“공작의 약혼자였던 페르도 백작의 딸이 더는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야.”
설마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으실 줄이야. 그들이 얼마나 견고한 관계인데. 제 아버지의 말에 보니타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물었다.
“설마 페르도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온 제국민이 아델리오 공작님이 페르도 영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는데도요? 공작님이 기억을 잃었거나 둘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지 않은 이상은…….”
켈리안 후작이 제 딸의 말에 진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대답했다.
“그러니까 다시 없을 최고의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것 아니겠느냐.”
우리는 그 기회를 잡기만 하면 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보니타?
작게 덧붙이는 말에 보니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아버지가 정말로 이상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온 것 같았다.
보니타는 혹여 듣는 귀라도 있으면 어쩌나,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낮은 소리로 책했다.
“아버지, 대체 어쩌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켈리안 후작은 아직도 델시아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는 에드윈을 떠올리며 흡족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에드윈의 곁에서 일하는 하녀, 안나가 주기적으로 소식을 전해올 때마다 켈리안 후작의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기억도 못 하는 약혼자 자리에 제 딸 보니타를 앉힌다면…….
“꽤 볼 만한 그림이 나오지 않겠느냐?”
정말 볼 만한 그림이 나오겠지. 아무렴, 제 딸만큼 제격인 상대가 또 어디에 있다고. 물러 터진 페르도 백작의 딸보다는 보니타가 아델리오 공작과 잘 어울릴 게 분명했다.
공작도 총명한 제 딸과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눈다면 금방 빠져들 테고, 보니타 또한 그를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아델리오 공작이 사교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더구나.”
“그 말씀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거겠지. 반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렇게 허비했으니, 어떻게든 무마하려 들 것이다.”
“…….”
“아델리오 공작이 공작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고 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사교계에 나서면.”
보니타, 네가 가서 그를 도와주렴. 총명한 너라면 내가 방금 한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그 말을 끝으로 보니타는 후작의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집무실 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눈을 끔뻑이던 보니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델리오 공작님과 페르도 영애가 완전히 틀어졌다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절절하던 그들이 대체 어쩌다……. 보니타는 처음 듣는 소식에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사교계에선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기억이 없는데, 제 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사교계에 떠도는 가십거리에 아무런 흥미도 없는 사람이 말이다.
“으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작게 구시렁거린 보니타가 제 방으로 올라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보니타는 아델리오 공작과 맺어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무렴 공작 부인의 자리보다는 역시 후작이 되어 가문을 이끄는 편이 낫겠지.”
계단을 올라가며 보니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