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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할래요, 공작님-27화 (27/94)

<27>

“델시아, 제가 없는 동안 잘 있었나요?”

감미로운 목소리가 델시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델시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그에게 안겼다. 따뜻한 품이었다.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대고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에드윈.”

델시아의 목소리에 에드윈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간질거려 델시아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완벽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영원히 깨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고 단단했다. 그래. 에드윈은 살아 있다. 살아서 저를 보며 웃음 짓는다. 제 모든 것을 궁금해한다. 늘 그랬듯.

“뭐하면서 지냈어요? 제가 보고 싶지는 않았나요?”

“……보고 싶었어요. 사실 에드윈이 너무 보고 싶어서 조금 울기도 했어요.”

에드윈의 앞에서는 꼭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온갖 어리광과 투정을 부리게 되었으니까. 언제나처럼 에드윈은 모든 것을 받아 주며 델시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탐스러운 상아색 머리카락이 에드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늘어졌다. 에드윈이 델시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 안긴 델시아는 너른 꽃밭에 도착했다. 델시아를 천천히 내려놓은 에드윈이 꽃밭에 먼저 앉았다.

에드윈이 단단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는 델시아를 올려다봤다. 말갛게 웃으며 에드윈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델시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명한 하늘에는 환한 해가 떠올라 있었다. 델시아와 에드윈처럼 맑은 하늘과 눈부신 해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에드윈, 다친 곳은 없죠? 그곳에서 밥도 잘 챙겨 먹은 거 맞죠?”

“그럼요. 델시아와 약속했잖아요.”

“에드윈이 다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꼭 제가 겪는 것처럼 아픈걸요.”

델시아와 에드윈의 대화에 피우스가 윙윙 진동했다.

― 델시아, 나도 무사히 다녀왔다.

“피우스도 고생 많았어요. 전장에서 힘들었죠?”

― 에드윈 녀석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통에 진이 다 빠지더군. 그간 겪어 온 녀석들과는 달리 기운이 좋아서……

“피우스, 말은 바로 해. 네가 일방적으로 날뛰었으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리는 거지?”

― ……흥.

에드윈의 말에 피우스는 정곡이라도 찔린 듯 끙, 앓는 소리를 흘리다가 잠잠해졌다.

이렇듯 모든 것이 더없이 평화로웠으며 더없이 완벽했다. 델시아의 심장도 쿵쿵 잘 뛰고 있었고 에드윈 또한 멀쩡했다.

에드윈이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델시아를 반년 동안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에드윈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꿈이었다. 아주 불쾌한 악몽.

마음이 무너지는 양 아팠던 악몽과는 달리 에드윈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와 델시아를 기쁘게 해 줬다. 델시아를 안아 주고 달래 주며 행복하게 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아직 불안한 구석이 남아 델시아를 걱정스럽게 했다. 하늘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델시아가 조심스럽게 에드윈을 불렀다.

“에드윈.”

“네, 델시아.”

“당신은, 저를 잊지 않을 거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절대 저를 잊지 않을 거죠? 설령 잊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저를 기억해 낼 거죠?”

델시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묻자 에드윈이 잠시 멈칫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델시아를 안심하게 만드는 잔잔한 미소를 입에 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기억해 낼게요.”

“그거면…… 그거면 됐어요. 충분해요.”

“델시아.”

“에드윈, 정말 많이 사랑해요.”

“저도 많이 사랑해요, 델시아.”

앞으로도……. 앞으로도 델시아만을……. 우리는 영원히…….

이어지는 에드윈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델시아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보이는 이 모든 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모든 게 델시아가 바라던 모습이 담긴 꿈이라는 것을.

“……미안해요, 에드윈.”

편안히 쉬고 싶었을 당신을, 내가 보내지 못해서 미안해요. 자꾸만 붙잡아 괴롭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에드윈의 모습이 점점 스러졌다. 델시아가 베고 있던 허벅지가, 델시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끝이, 델시아를 다정히 쳐다보던 눈동자까지.

그 모든 게 거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처럼 사라졌다. 이제 델시아는 컴컴한 공간에 홀로 누운 채였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컴컴한 공간에는 오직 델시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에드윈.”

델시아가 작게 읊조린 이름이 컴컴한 공간에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델시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머무르다가는 이 짙은 어둠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한참을 걷던 델시아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온통 검은 곳이라 계속 이동하다가는 미아가 될 것만 같았다. 잠식되기 전에 길을 찾고 제대로 움직이는 편이 현명할 듯했다.

“……시.”

“누구세요?”

“델…….”

그때 컴컴한 공간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델시아가 여러 차례 되물었다.

“누구세요? 어디 있어요?”

“……시, ……란다.”

“저기요?”

“델……, ……와!”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멈춰 있던 델시아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으니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델시!”

“……아버지?”

“안 돼, 델시.”

“아버지!”

“델시, 눈을…… 눈을 떠. 이러지 마, 델시!”

제 아버지의 외침에 델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의 외침이 또 들려오기를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델시아.”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것이 분명한데도 너무나 상냥한 목소리에 델시아는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

“델시아, 어서 카일에게…….”

고개를 돌린 델시아는 그 낯설지만, 따뜻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를 부르는 존재에게 손을 뻗으려던 델시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이윽고 환한 빛이 번쩍이며 델시아가 갇혀 있던 공간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델시!”

다급한 목소리가 델시아를 흔들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진땀을 흘리던 델시아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 신이시여. 오, 신이시여…….”

“…….”

페르도 백작의 눈가가 촉촉했다. 델시아의 혼탁한 눈동자가 주위를 담다가 제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 버지.”

“그래, 델시. 여기, 여기 있다. 이 아비가 여기 있어.”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델시아가 살짝 웃었다. 정신이 차려지지 않아 몽롱한 와중에도 아버지가 안심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델시아의 눈이 다시 감겼다. 그렇게 델시아는 아득한 수마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또다시 혼자였다. 이번에는 아주 오랫동안.

델시아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꿈속에 쭈그려 앉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괜찮아, 델시아노르. 버틸 수 있어, 델시아노르.

***

“델시, 대체 언제 일어날 생각인 게냐.”

“……아버지.”

“델시, 꿈에서 셀레나라도 만난 거니? 정말 그런 거야?”

델시아가 다시 눈을 감은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델시아는 깊은 잠에 빠진 듯 일어나지 않았다.

숨을 쉬고 이따금씩 몸을 뒤척이면서도 잠에서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놀드, 먼저 들어가서 쉬어라.”

“아버지.”

“이 아비는 괜찮으니 먼저 가서 쉬어. 기다리는 사람은 아비 하나면 된단다.”

“…….”

안타까움에 젖은 눈으로 제 아버지를 보던 아놀드가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축 늘어진 아버지의 어깨가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감싸 줄 수도, 그 짐을 덜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날 정도로 아놀드는 무력했다.

그는 반년간 자기 자신에게 수도 없이 책임을 물어 왔다. 어떨 때는 훈련을 핑계로 몸을 혹사해 한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다.

제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게나마 죄책감을 덜어 내려 했다. 하지만 죄책감은 쉬이 아놀드를 놓아주지 않았다. 모든 책임이 제게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은 어떠한 위로도 없이 아놀드를 갉아먹기만 했다.

델시아가 저렇게 된 것도, 아델리오 공작이 델시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버지가 상심에 젖어 우울해진 것도, 저택의 분위기가 침체한 것도 모두.

그래. 그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델시아가 일주일째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니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더욱더 늘어 갔다.

아놀드가 주먹을 쥔 채 방으로 향했다. 씨근덕거리는 숨이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너무 미안해.”

아놀드의 잇새로 속죄의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 줄 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놀드는 매일 밤 속죄했다. 매일 밤 제 죄를 속삭이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용서한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아델리오 공작에게도, 델시아에게도, 제 아버지에게도 말이다.

하여 아놀드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여기는 지경에 다다랐다.

오늘도 아놀드는 제 두 손을 맞잡고 속죄했다.

맞잡은 두 손이 덜덜 떨렸다. 탁하게 뜨인 눈동자로 창밖을 환히 비추는 달을 바라보며 아놀드는 속삭였다.

델시아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델시아를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그렇게 수십 번을, 수백 번을, 그 이상을 반복해서.

델시아를 위한 기도를 반복하여도 아놀드의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았다. 마음의 짐은 도무지 덜어지지 않았다. 아놀드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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