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래. 애초에 저는 에드윈이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왔을 뿐이다. 단지 그랬을 뿐이다. 정말 그랬을 뿐인데…….
델시아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침대 기둥을 잡고 힘겹게 일어난 델시아가 에드윈에게 예를 갖췄다.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
미약한 목소리가 에드윈의 귓가에 간신히 닿았다. 에드윈은 아무런 감흥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델시아를 훑었다.
“아뇨.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합니다.”
선을 긋는 듯한 말투에 델시아가 드레스 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간신히 곧추세운 허리가 금방이라도 꺾일 듯 흔들렸다. 그녀는 울컥하려는 것을 애써 참아 내고 있었다.
사실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에드윈에게 울며 매달리고 싶었다. 저를 기억해 달라고. 이런 낯선 모습은 무서우니 제발 저를 꼭 안고 달래 달라고.
전처럼 귓가에 다정한 말을 속삭이며 저를 보듬어 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에드윈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에드윈은 델시아가 나가기를 바라는 듯 친히 문까지 열어 주었다.
그래서 매달릴 수 없었다. 델시아는 비칠거리며, 문 앞에 선 에드윈을 지나쳤다. 에드윈은 문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침실을 나서려는 델시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마치 곡예라도 하듯 아슬아슬하게 걷던 델시아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한계였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심장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끄는 것은 힘겨웠다. 그녀의 심장은 제대로 된 기능은 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존재만 할 뿐이었으니.
근 몇 달간은 눕거나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간간이 해 오던 수놓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저하되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스스로 걷는 것도 반년 만에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은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별채 안 침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심장이 급작스레 뻐근해져 왔다. 홀로 걸음을 옮겼기 때문인지, 비참한 현실에 예고도 없이 내던져졌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델시아의 눈꺼풀이 그대로 감겼다. 시야가 그대로 점멸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있던 델시아의 몸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정신이 아득해짐과 동시에 차갑고도 비정한 현실이 함께 멀어졌다. 델시아는 일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
델시아의 위태로운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윈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델시아노르 페르도!”
에드윈이 놀란 목소리로 델시아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옆으로 쓰러진 델시아의 얼굴은 희게 질린 상태였다.
이름을 혀끝에 얹는 것만으로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 심장은 왜 불안하게 뛰어 대는 것인가.
에드윈이 미간을 찌푸리며 델시아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몸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가벼워 에드윈은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델시아를 침실 안 침대에 내려놓은 에드윈이 옆에 달린 설렁줄을 당겼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엘라가 허둥지둥 달려오다가 에드윈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아, 아델리오 공작님.”
에드윈은 짜증이 담긴 눈으로 엘라를 쳐다봤다. 말 한 마디 없음에도 무엇을 요구하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의중이 꾹꾹 눌러 담긴 시선이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 두리번거리던 엘라가 죽은 듯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델시아를 발견해 내고는 소리를 지르며 서둘러 테오에게 달려갔다.
“테, 테오!”
당장 페르도 백작에게 상황을 알려야만 했다.
***
테오를 통해 페르도 백작을 부른 엘라가 델시아의 곁을 지키고 서서는 울상을 지었다. 체력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어도, 이렇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었다.
엘라는 ‘트레이를 조금만 더 늦게 가져다 놓을걸’, ‘차라리 어떻게든 다이닝 룸으로 모셔가 식사하시게 할걸’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후회했다.
엘라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달려온 페르도 백작은 마치 주검처럼 누운 제 딸아이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얼어붙고 간담이 서늘해지며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버리는. 그야말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페르도 백작은 이른 아침부터 에드윈을 찾아가 따지고 들었던 제 모습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나서지만 않았어도 델시아가 충격받아 쓰러지는 일 같은 건 없었을 텐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니,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죄스러웠다.
“……델시.”
딸아이의 애칭을 입에 담는 것뿐인데 이토록 심장이 아려올 수가 있을까. 페르도 백작은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델시아의 모습을 동공에 담았다.
뺨에 밀가루를 잔뜩 묻힌 채 아놀드와 뛰어다니던 어렸을 적의 델시아가 떠오를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었다.
“아아…… 델시.”
다시금 입에 담는 애칭이 못내 무거웠다. 페르도 백작은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 내며 돌아섰다.
피로한 낯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에드윈이 보였다. 델시아의 걱정은 단 한 톨도 담기지 않은 메마른 눈동자.
제 딸아이는 저 눈동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눈동자를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저 눈동자에 어떤 상처를 받았을까.
“……제 탓입니다.”
“백작.”
“공작님께 실언하여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제 탓입니다.”
“……백작.”
갈라진 목소리가 자책했다. 델시아와 아델리오 공작이 이런 식으로 마주친 것은, 델시아가 쓰러진 것은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그렇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백작도 놀랐을 텐데요. 지금은 책임을 따지는 것보다는 안정을 취하도록 돕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당신을 살리겠다는 딸아이를 말리지 않은 것 또한 제 잘못이니, 저는 죽기 직전까지 저를 탓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백작, 그만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들었던 백작의 말에 혼란스러운데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이제는 혼란을 넘어 피로한 상황입니다.”
에드윈은 말을 마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제 와서 누군가를 책하며 책임을 따지고 들기에는 늦었다. 그리고 짜증을 내며 전부 관두자고 지껄이기에는 제가 받은 게 너무나 컸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에드윈이 페르도 백작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파혼하자고 했습니다.”
“…….”
“그렇다고 몰상식하게 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 사례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머뭇거리기는 하였으나 결코 사례가 약소한 일은 없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백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사례가 약소하든 약소하지 않든 그것은 저와 델시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델시아가 사례를 바라며 희생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는 아델리오 공작이 제 딸아이의 희생을, 어떠한 보상을 염두에 두고 벌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제 딸아이는 사례를 바라고 희생한 게 아닙니다. 후에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깨닫게 되시겠지요. 그때에는 이미 늦었을 테지만요…….”
“늦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또한 언젠가 알게 되시겠지요. 실례 많았습니다. 제 딸아이가 이곳에 머물며 사용하고 이용한 것들에 대한 값은 마땅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다 큰 아이가 이렇게나 가벼워서야……. 페르도 백작의 눈시울이 절망과 안타까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페르도 백작은 에드윈에게 짧게 묵례하고는 별채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델시아의 짐을 챙긴 엘라가 페르도 백작을 뒤따랐다.
마치 이곳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옅게나마 존재하던 델시아의 흔적이 전부 지워졌다.
홀로 남아 이를 별 감흥 없이 보던 에드윈이 눈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짜증스러운 상황임은 확실했다. 억울한 상황임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짜증이 일던 차였다.
“주, 주인님!”
밖에서 상황이 종료되기를 기다리던 테오가 에드윈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유능한 집사를 지친 눈으로 확인한 에드윈이 이내 주저앉았다.
“허, 허억…….”
심장이 뜯겨나갈 듯 죄였다. 꼭 상황을 이렇게 만든 에드윈을 책하듯 말이다. 그때 진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에드윈의 허리춤에서 파시오가 낮게 진동했다.
― …….
진동하던 파시오는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리고 불현듯 제 꿈속에 찾아오던 여자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간 제 꿈에 나왔던 여자가 페르도 백작의 여식이란 말인가.
놀란 눈으로 에드윈을 보던 테오가 다급히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인님!”
“……테오.”
에드윈이 눈을 찡그리며 테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괘, 괜찮으세요?”
“아니. 전혀 괜찮지 않군.”
아직도 뻐근한 심장과 불쾌한 기분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얼굴을 와락 구긴 에드윈이 테오와 함께 별채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