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덱스, 델시는 좀 어떤가.”
“음…….”
엘라의 호출로 급하게 도착하여 진찰을 막 끝낸 덱스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일전에 진찰했을 때 마력 측정기를 망가트릴 정도로 방대하던 마력에 이상한 움직임이 생겼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심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듯했다. 마력의 소용돌이가 완성된다면…….
당장 마력 폭주가 일어나 생을 달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머물다가는 다른 이들도 폭주에 휘말리고 말겠지.
페르도 백작을 마주하는 덱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덱스, 무어라 말 좀 해 보게.”
“이게…… 마력 폭주가 우려되는 상태입니다.”
“마력, 폭주…….”
페르도 백작의 눈이 질끈 감겼다. 델시아가 쓰러졌다는 덱스의 연락에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물어물어 겨우 들은 대답이 이것이라니. 셀레나를 잃게 만들었던 그 마력 폭주가 델시아를 위협하고 있다니.
아……. 아찔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에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페르도 백작을 좀먹어 갔다.
“또, 또 다른 문제는 없는가!”
“아무래도 심장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정확한 원인은…….”
“……심장.”
페르도 백작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역시나 심장의 문제였다. 비안나라고 저를 소개한 마녀가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 년도 채 살지 못할 것이라던 델시아는 이제 겨우 한 달을 넘기고 있었다. 한 달을 갓 넘긴 상태가 이러한데, 이다음은…….
페르도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델시아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마력에 잠식되어 가는 델시아의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백작님…….”
덱스가 조그맣게 페르도 백작을 불렀다. 하지만 페르도 백작은 대답할 수도, 덱스를 마주 볼 수도 없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델시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슬픔으로 덧칠된 페르도 백작의 머릿속에 일순 비안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나중에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수도 외곽으로 와.
수도 외곽. 비안나는 분명 수도 외곽으로 저를 찾아오라고 했다. 수도 외곽의 어딘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페르도 백작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다급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아델리오 공작 저택을 빠져나갔다. 대기 중인 마부를 마주한 페르도 백작이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 외곽으로 가게. 어서!”
서둘러 마차에 올라탄 페르도 백작이 초조한 얼굴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페르도 백작은 수도 외곽에 멈춰 선 마차에서 황급히 내렸다. 어떻게 이곳까지 당도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델시아가 그러했듯 두리번거리던 페르도 백작의 눈앞에 숲이 보였다. 캄캄한 숲. 페르도 백작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페르도 백작이 숲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잠시 열렸던 숲의 입구가 단단히 닫혔다.
빛이 보이지 않는 숲. 그 숲에서 페르도 백작은 정처 없이 헤매야만 했다. 일전에 델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셀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이 숲까지 들어왔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값비싼 옷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풀과 나무를 헤치며 걸었다는 것밖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수도 외곽에 이런 숲이 존재했던가, 하는 의문은 잊은 지 오래였다.
“허, 허억.”
턱 밑까지 올라온 숨을 몰아쉰 페르도 백작이 더는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다리를 힘겹게 끌어 갔다.
숲은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누군가가 살 만한 공간과 건물도 없었고. 그러나 숲을 다시 나가는 것은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직감이 자꾸만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의 직감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델시…… 델시.”
페르도 백작은 제 딸아이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창백했던 안색.
델시아가 쓰러진다면 당장 데리고 돌아가겠다던 일전의 말이 전부 잊힐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싸늘한 안색을 또 보고 싶지 않았다. 숨이 멎는 순간을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희미하게 흩어지는 숨을 잡지도 못하고 힘없이 버티고 서 있기 싫었다. 버티는 것만이 제 일은 아니었다. 저는 아비이고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든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채 걸음을 옮기는 페르도 백작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바로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나아가기 힘든 숲에서 페르도 백작은 용케도 쓰러지지 않았다.
“제발…….”
간절한 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마저 이겨 내야만 했다. 페르도 백작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러다 무릎이 꺾여 넘어질 뻔했을 때, 거짓말처럼 눈앞에 빛을 뿜어내는 나무가 나타났다.
“아, 아…….”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안나가 저기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허겁지겁 나무 앞으로 달려간 페르도 백작이 크게 외쳤다.
“델시, 델시를 살려 주시오. 제발 우리 델시를 살려 주시오!”
끼익, 나무의 문이 열리고 무릎 꿇은 페르도 백작의 몸에 비안나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델, 델시가…….”
“델시아? 델시아가 왜?”
페르도 백작을 일으켜 세운 비안나가 되물었다.
“쓰, 쓰러졌소. 안색이 창백하고 호흡도 약한데……. 의원의 말로는 마력이 폭주할 거라고-.”
“폭주?”
진정시켜 놓은 마력이 벌써 폭주할 리가 없는데.
굳은 얼굴로 중얼거린 비안나가 페르도 백작을 쳐다봤다.
“델시아 지금 어디 있어?”
“아델리오 공작 저택의 별채에 있소.”
“안내해.”
비안나의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서 나온 비안나와 페르도 백작은 마차를 타고 아델리오 공작저로 향했다. 향하는 동안 그들 사이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비안나였다.
“괜찮을 거야.”
“…….”
그 말에도 페르도 백작은 안도할 수 없었다. 델시아의 초췌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어떻게 안도하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 도착한 별채에서 비안나는 델시아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비안나의 차가운 손이 델시아의 이마를 덮었다.
그 상태로 미세하게 마력을 흘러 넣자 델시아의 몸에서 우글거리는 마력이 이마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비안나의 아랫입술이 치아에 짓이겨졌다. 델시아의 마력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마력이 불어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두 종류로 나뉘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충돌이 잦아질수록 꺼져 가는 것은 델시아의 생명력이었다. 두 개의 마력이 델시아의 생명력을 좀먹으면서까지 서로 우위를 점하려는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비안나는 제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을 하는 페르도 백작을 쳐다봤다.
“급한 대로 마력을 눌러 놓겠지만, 그렇게 오래 유지하지는 못 할 거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지금껏 버틴 게 대단할 정도야.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
“델시…….”
델시아의 몸에 흘러든 비안나의 마력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요동치던 델시아의 마력에 비안나의 마력이 덧대지자, 조금씩 진정되는 듯 보였다.
희게 질렸던 델시아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 델시…….”
눈물을 삼킨 페르도 백작이 델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한없이 작은 손이 너무도 차갑게 느껴졌다.
페르도 백작은 그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억지로 델시아를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아서.
델시아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
에드윈이 사냥 대회에서 돌아왔을 때는 페르도 백작과 비안나의 노력으로 델시아가 고비를 넘긴 이후였다.
밀려 있던 대외 일정을 오전 내내 마치고 돌아온 에드윈이 책상 앞에 앉았다. 처리할 서류가 아직도 잔뜩 남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따로 챙겨야 할 일정이 잦았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일정을 소화해야 할 정도로, 몹시 빠듯한 나날이었다. 에드윈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일전에 넣어 뒀던 자료를 찾으려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찾던 자료가 아닌 애먼 깃펜이 하나 잡혔다.
“이게 뭐지?”
깃펜을 집어 훑은 에드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쪽빛 보석으로 장식된 펜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신이 구매했을 리 없는 디자인이었다. 보석 장식이 된 펜은 그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책상에 대충 올려 둔 에드윈이 다시 서랍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이번에는 쪽빛의 커프스단추를 찾을 수 있었다.
“…….”
커프스단추 또한 에드윈의 취향이 아니었다. 애초에 쪽빛은 에드윈이 좋아하지 않는 색이었다. 그리고 좋아하지도 않는 색의 물건을 사들일 만큼 희소성 있는 디자인도 아니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 물건이 서랍에서 속속들이 발견되는 것이 의아했다. 의아함 이후에 드는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저 물건들을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꼭 저 물건들이 병의 근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누른 에드윈이 거슬리는 물건들을 전부 치우라는 명령을 내리려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하녀, 안나가 들어와 가볍게 묵례했다.
“이 물건들을 당장 치우도록.”
“펜과 커프스단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에드윈이 귀찮다는 듯 대꾸하자 안나의 얼굴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좋은 조건의 권유라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안나가 펜과 커프스단추를 집었다.
에드윈은 기쁜 듯 보이는 안나의 태도에 의뭉스러움과 껄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아니, 안나의 태도에서 느끼는 것인지 다른 무언가에서 느끼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다는 사실이었다.
“잠깐.”
에드윈이 지시한 것을 손에 쥐고 나가려던 안나의 걸음이 멈췄다.
“됐어. 그냥 내 침실에 가져다 놓도록.”
“이것들을 침실에요?”
“그래.”
“……네, 알겠습니다.”
안나가 떨떠름하게 대답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에드윈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머리가 다시 윙윙 울렸다. 무거운 돌덩이가 뇌에 얹힌 듯 답답하고 무거웠다. 에드윈은 결국 찾으려던 서류는 포기한 채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꼭 중요한 것을 잊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매일 에드윈의 꿈에 찾아오던 여자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의 망령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심지어 꿈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가.
“……이상하군.”
움직이지 못하게 저를 묶어 둔 채 자신의 이야기만 하던 여자가 무어라고 자꾸 생각나는 것일까. 여자의 얼굴이 뿌옇게 보임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심장이 뛰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