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21화 (21/94)

<21>

“아가씨, 당장 백작님께…….”

“아니야, 엘라.”

제발. 더는 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아.

제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하던 일도 모두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델시아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저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을 아버지를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설사 작은 비밀이 모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과오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사냥 대회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사냥 대회는 황실에서 주최하는 것으로 북부에 있는 토푸르 영지에서 개최된다고 했다.

하여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귀족은 오늘부터 토푸르 영지로 향해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에드윈도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열린 승전 기념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기에, 사냥 대회만큼은 반드시 참가하라는 황명이 있었다.

에드윈도 테오도 발레인도 모두 사냥 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쁠 것이었다. 델시아는 테오가 사냥 대회 채비에 넋을 놓기 전에 손수건을 미리 전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따뜻한 볕이 별채의 후원을 감싸고 있었다.

그 평온한 전경을 감상하는 델시아의 머릿속은 조금 복잡한 상태였다. 한 달이 지나도록 에드윈과 마주치기는커녕 그와 스친 적도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마주치기를 바라는 우스운 심보가 델시아의 머릿속을 집요하게 주물렀다.

“……보고 싶다.”

작게 중얼거리는 델시아의 얼굴이 그리움에 잠겨 어두웠다.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던 델시아의 눈이 돌연 동그랗게 커졌다.

“……아.”

테오와 발레인 그리고 델시아의 에드윈이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에드윈이 이곳까지 걸음 할 이유가 없는데…….

델시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에드윈이 고개를 들어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은, 그의 눈에 들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숨소리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에드윈이 저를 보고 얼굴을 찡그릴까 봐. 각오했음에도 그 모습에 마음이 찢어질까 봐.

델시아는 얼굴을 찡그린 채 테오와 이야기를 나누는 에드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눈도 껌뻑이지 않고 하나하나 아로새기듯 바라봤다.

장미 덤불 앞에 선 테오가 무어라 말하자 에드윈이 한숨을 내쉬며 장미꽃을 쳐다봤다. 비바람에 살아남은 장미를 손에 쥔 에드윈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 모든 것을 관찰하던 델시아는 저를 쳐다보는 발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슬쩍 미소 지은 델시아가 손을 조심히 흔들자 발레인이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에드윈…….”

장미꽃을 놓은 에드윈은 이내 걸음을 돌려 본관으로 향했다. 아마도 사냥 대회를 갈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창문에 손을 얹은 델시아의 눈동자가 슬픔에 잠겼다.

열다섯 살 이후 델시아는 사냥 대회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에드윈이 참석하면 델시아도 참석했으니까.

에드윈은 그 무렵에도 굉장한 실력자였다. 아무렴 성검의 주인이니 당연했다. 성검과 척척 맞는 호흡으로 마물을 사냥하는 에드윈의 모습이 너무나 반짝여 델시아는 매번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에드윈이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에드윈과 함께 걷던 테오가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지, 테오.”

“……아, 아니에요.”

“별채에 뭐라도 있는 건가?”

“아, 아뇨?”

테오의 대꾸에도 에드윈이 멈춰서 뒤돌아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별채를 살핀 에드윈이 어깨를 으쓱였다.

“테오, 네 말이 맞는 날도 있네. 정말 아무것도 없군.”

“제, 제가 아무것도 없다고 했잖아요.”

“네 말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몸을 홱 돌린 에드윈이 다시 앞서가고 테오와 발레인은 그 자리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타이밍 좋게도 델시아가 창가에서 멀어진 것이다.

에드윈과 델시아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면 좋았겠지만, 아직은 섣부른 일인지도 모른다. 델시아도 원하는 것 같지 않고 에드윈의 은근한 거부 반응도 여전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렇다.

― 그러고 보니 페르도 백작 영애께서는……

― 그만. 그 가문은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니 그만하지.

테오의 말에 에드윈이 진저리치며 단호하게 나왔다. 그 태도에 테오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델시아의 이름은커녕 페르도 가문의 이름조차도 못 꺼내게 하니 어떻게 말을 붙일 수 있었겠는가.

다음 날은 더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주인님께서는 일전부터 페르도 백작가의 델시아……

― ……그 입 다물어, 테오.

에드윈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까지 썼다. 은근한, 아니 완강한 거부 반응에 테오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거들고 나서려던 발레인도 눈치를 보며 빠졌고 말이다.

테오와 발레인이 지난날의 씁쓸한 기억을 떨쳐 내고는 서둘러 에드윈을 따라갔다.

그것을 엘라에게 전했으니, 그래도 안심이었다. 테오의 입매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이라면 델시아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지 않을까. 근래 델시아는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말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렇게 에드윈이 사냥 대회를 위해 저택을 떠나고 점심이 되었다. 델시아는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요즘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다고 주장한 엘라의 영향이었다. 델시아는 구석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엘라의 소리를 들으며 눈을 끔벅거렸다.

델시아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정확히는 아까의 일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던 에드윈을 보고 서둘러 주저앉은 자신의 모습을.

저도 모르게 주저앉아 피하고 말았다.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에드윈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에드윈과 서로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참!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가씨.”

“응?”

“이거예요!”

엘라가 벨벳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자랑스레 내보였다.

“……영상구?”

“네! 테오가 주고 갔어요. 공작님께서 사냥하시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대요.”

“테오가…….”

영상구를 두고 가다니. 델시아가 살짝 웃었다. 테오가 어떤 생각으로 두고 갔는지 느껴졌다.

엘라는 델시아에게 잘 보이는 쪽으로 영상구를 놓았다. 아직은 잠잠했지만, 사냥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에드윈의 모습이 선명히 전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백작님께 답신이 왔어요, 아가씨.”

“정말?”

“영지를 다녀오시느라 답신이 늦어지셨대요!”

“그랬구나…….”

엘라가 나이프로 편지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 델시아에 건네줬다. 제 아버지의 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편지를 받은 델시아가 천천히 그것을 펼쳤다.

[사랑하는 델시에게.

델시, 잘 지내고 있느냐?

아델리오 공작이 네게 모진 말을 하지는 않던?

영지에 다녀오느라 답신이 늦어지게 되었구나. 미안하다.

우리 델시, 이 아비는 언제나 네 걱정뿐이란다. 너는 나와 네 오빠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밖에 하지 않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델시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사실 나는 네가 저택으로 돌아와 편하게 지내길 바란단다. 그곳에서 모진 말을 듣고 상처받을 너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구나.

아놀드는 사냥 대회에 간다고 아침 일찍 나섰단다. 네가 보낸 손수건을 받고 어찌나 기뻐하던지.

이 아비에게 줄 손수건까지 만들 여력은 되지 않았겠지. 이미 짐작했단다. 하지만 네게서 편지를 받았으니 손수건 정도는 아놀드에게 양보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우리 델시, 그곳은 어떻니? 아델리오 공작이 심은 장미를 보며 서글피 울고 있지는 않느냐. 이 아비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작은 글씨로 적을 정도로 갑갑한 것이니?

네가 언제 돌아와도 기꺼이 맞을 수 있단다. 아비는 네 결정을 항상 존중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델시.

어젯밤에는 내 꿈에 셀레나가 찾아왔단다. 따뜻하게 웃으며 델시, 너를 잘 부탁한다고 하는데 내가 무어라 할 말이 없더구나.

나야말로 셀레나에게 너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단다. 눈치 빠른 셀레나라면 내 얼굴만 보고도 잘 알아들었을 테지. 델시, 우리에게 찾아올 기적을 포기하지 말자꾸나.

아니, 아니다. 그 기적은 이 아비가 간절히 바랄 테니, 델시 너는 괴로워하지만 말아다오.

그리고 아직 아놀드와 상의 중이기는 하다만, 아델리오 공작이 계속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항의해 보려고 한단다.

그렇게나마 델시 네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구나. 그 기회가 설령 마지막 기회라고 해도 말이야.

사랑한다, 델시.]

편지를 읽은 델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목이 멨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편지를 꼭 쥔 델시아는 눈물을 꾹 참았다.

엘라가 눈치채고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져 내렸다. 거센 비가 내리는 것처럼 델시아의 뺨에 눈물 줄기가 쉬지 않고 흘렀다.

“흐, 흐윽. 아…… 아버지.”

자신을 이리도 걱정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살갑게 대할 것을 그랬다. 아버지의 마음을 차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에는 오롯한 사랑만이 담겨 있었다. 감히 헤아리지 못할 양의 사랑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델시아가 돌연 기침을 뱉었다. 이내 꺽꺽거리며 숨을 들이마신 델시아가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 박동이 너무나 빨랐다. 쿵, 쿵, 쿵, 쿵, 쿵.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소리를 듣는 델시아의 표정이 점점 식어 갔다. 온몸에 머물던 온기가 달아나는 듯했다.

델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심호흡했다. 심호흡이 한 차례 두 차례 이어질 때마다 심장이 점점 진정되어 갔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델시아의 얼굴이 잠시뿐인 평온을 찾았다. 델시아는 제 목에 걸린 로켓을 쥐며 습관처럼 되뇌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그러니까 조금만 도와줘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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