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만할래요, 공작님-17화 (17/94)

<17>

에드윈은 켈리안 후작의 기대감 섞인 눈빛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권한을 맡았을 뿐인 사람이 이리도 적극적인 면모를 보인다니.

“고민은 해 보겠습니다.”

“아…… 고민이요.”

애매한 대답에 곤란한 듯 눈동자를 굴리던 켈리안 후작이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이 매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귀족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도에만 해도 벌써 여럿이지요.”

“그렇군요.”

“제가 전대 공작님을 동경해 왔다는 사실은 아실 테지요.”

“음.”

“전대 공작님을 생각해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거래가 성사된다고 해서 제게 오는 이득은 없답니다.”

집요하게 매입을 종용하는 태도가 수상했다. 거기에다가 거래가 무사히 성사되어도 후작에게 떨어지는 이득이 없다니.

그럴 리 없다. 켈리안 후작이 이득 없이 움직이는 이던가. 에드윈은 실소가 터지려는 것을 부단한 노력 끝에 참아 낼 수 있었다.

에드윈이 표정을 굳힌 채 잠자코 있자 맞은편에 앉은 켈리안 후작의 속이 탔다. 후작은 잠시간의 침묵도 견디지 못하고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자꾸만 설명을 덧붙였다.

“마력석의 희소성도 아실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 좋은 마력석은 보기 힘들다는 것 또한 잘 아실 테지요.”

비장한 눈을 한 켈리안 후작이 들고 온 검은색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마력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보였다. 장인에 의해 가공된 푸른빛 마력석이었다.

즉, 물의 힘이 담긴 마력석이었다. 에드윈은 그 마력석을 눈으로 훑었다. 척 보기에도 높은 등급의 물건이었다.

저 정도 마력석 정도라면 거래 조건이 나쁘지 않은 이상은 매입할 만했다. 그렇다고 해서 켈리안 후작을 향한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에드윈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켈리안 후작이 준비한 조건을 듣기로 했다.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하하, 관심이 생기신 거로군요. 다행입니다. 전체 매입과 부분 매입이 있는데 전체 매입은 이천 골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부분 매입은 일 년에 이백 골드씩 오 년이고요. 부분 매입으로 십이 년을 채우게 되면 소유권이 생기는 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체 매입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전체 매입과 부분 매입…….”

켈리안 후작의 말을 읊으며 고민하는 체를 한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뒤 이 시간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그럼요, 아델리오 공작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참. 그리되셔서 상심이 크시겠지만, 잘 이겨 내시리라 믿습니다.”

“무슨-.”

“하하, 그럼 일주일 뒤에 뵙겠습니다.”

켈리안 후작이 여유롭게 웃으며 에드윈과 가벼운 악수를 끝내고 알현실을 나섰다.

알현실에 남은 에드윈은 켈리안 후작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짓던 표정.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켈리안 후작의 수를 읽었건만, 어쩐지 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쥔 채 알현실을 나온 에드윈이 성검을 찾으러 별채로 향했다. 별채로 가던 에드윈은 문득 익숙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꼭 언젠가 들어 본 것만 같은 웃음소리를 말이다.

보폭을 크게 하여 걷던 에드윈이 웃음소리를 더 듣기 위해 우뚝 멈췄다. 그 상태로 귀를 기울였지만, 애석하게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겨 도착한 별채의 집무실에서 성검을 찾은 에드윈이 아까는 미처 열지 못했던 문을 떠올렸다. 뒤이어 제 별채에 귀한 손님이 와 있다는 테오의 말도 떠올렸다.

열어 보지 못한 문 앞에 선 에드윈이 천천히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리고 문을 활짝 젖히려던 찰나, 테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

에드윈은 이번에도 문을 열지 못했다. 미간을 찌푸린 에드윈이 저를 찾는 테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델시아는 별채 후원에 놓인 티 테이블에 앉아 엘라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보이는 태는 여유롭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가씨, 어떠세요?”

“엘라.”

“가끔은 외출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글쎄.”

“사실 저는 공작님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요. 공작님께서는 아가씨를 기억하지도 못하신다는데…….”

엘라가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아가씨께서 상처받으시는 게 싫어요. 솔직히 기억을 잃은 공작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페르도 백작님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더 슬퍼요.”

“…….”

엘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끌어 내려 찻주전자를 매만졌다. 화려한 꽃이 새겨진 찻주전자 또한 에드윈과 델시아가 함께 고른 물건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사용할 찻주전자라며 제 주인 델시아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때를 떠올린 엘라의 눈이 서글퍼졌다. 델시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마음이었다. 아델리오 공작을 한없이 사랑하고 좋아했다.

하지만 아델리오 공작은 아니었다. 그는 제 주인에 관한 기억은 모조리 잊고 말았다. 그런 자의 곁에 머물겠다는 제 주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끝끝내 허락한 페르도 공작의 의중도.

엘라는 제 속이 타는 양 숨을 씨근덕거렸다. 아델리오 공작은 델시아를 외면하고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그 모습에 상처받을 제 주인을 상상하니 가슴이 답답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엘라, 괜찮아.”

“아가씨…….”

“항상 말하잖아.”

“…….”

“오늘보다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아가씨는 아니잖아요.

엘라는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 내고는 델시아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델시아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이 마지막일지, 내일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좋게만 생각하려는 델시아의 모습은 도무지 비극의 당사자 같지 않았다.

처음에 듣고는 꽤 놀란 듯 보였으나 이내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초연하게 굴고 있지 않은가.

엘라는 제 주인의 심지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더 속상했다. 차라리 심지가 약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상황에서 아델리오 공작가에 오지는 않았을 텐데.

“영애!”

엘라는 후원 끝에서 달려오는 테오와 그의 옆에 선 발레인을 발견했다.

“테오, 발레인 경.”

그들의 이름을 작게 읊은 델시아가 웃었다. 테오는 틈틈이 델시아를 찾아와 온갖 소식을 전해 주고는 했다.

에드윈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에드윈의 기분은 어떤지, 에드윈의 상태는 어떤지.

델시아가 궁금해할 만한 소식을 말이다. 이번에는 에드윈의 호위 기사 발레인 또한 묵묵히 그 옆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델시아의 앞에 당도한 테오와 발레인이 가볍게 예를 갖추었다.

“영애,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네, 덕분에요.”

“하하, 전 한 게 없는걸요. 이번에는 발레인도 함께 오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경, 오랜만이에요.”

델시아의 인사에 살짝 웃은 발레인이 이내 미소를 거뒀다. 델시아의 안색을 살핀 발레인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럼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괜찮아요.”

에드윈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델시아와 마주칠 때마다 괜찮으냐고 물어 왔다. 델시아는 언제나 그렇듯 괜찮다고 대답했다.

정말 괜찮았고,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니까. 작은 욕심을 채우려, 가족들에게 짐으로 남기 싫다는 것을 핑계 삼아 도망 왔으니 당연히 괜찮아야만 한다.

“주인님께서 저녁에 업무가 있어 바쁘다고 하시네요. 제가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테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정말요.”

테오가 하는 노력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해서 델시아가 바라는 것들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영애의 이름을 입에 올릴 틈도 주지 않으셔서……. 그리고 페르도 백작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반응도 미지근하셨고요.”

“……그런가요.”

테오의 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델시아가 이내 수긍했다. 제 아버지까지 정말 새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 말은 즉, 자신과 연관된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제 이름이나마 기억해 주길 바랐던 것은 정말, 정말로 사치였던 모양이다. 제 가문의 이름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데 제 이름을 들으면 어떠하겠는가.

치맛자락을 쥔 델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애와 하신 약속, 가신 곳들조차 기억하지 못하셨어요. 어떻게 영애와 관련된 것만 쏙 잊으셨는지…….”

“…….”

이어지는 말에 델시아는 어떻게든 유지하던 평점심을 잃을 뻔했다. 멀쩡하지는 않아도 정상적인 것처럼 뛰던 심장이 뻐근했다.

잠시 밭은 숨을 토해 낸 델시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걱정이 담긴 테오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지만, 델시아는 미소 지으며 괜찮은 체했다.

자신과 관련된 기억은 모조리 잊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했던 약속은 물론 갔던 곳, 추억까지 모두 잊었다는 사실에 못내 미련이 남았다.

“그,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영애를 보신다면 금방 기억하실 거고, 결혼식도 무사히…….”

“테오, 에드윈과 결혼할 마음은 없어요.”

“네?”

“에드윈의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지켜보고 싶어서 온 것뿐이에요.”

“하지만 영애.”

테오가 당황한 낯으로 횡설수설했다.

“주, 주인님께서는 영애를 보시자마자 기억하실 테고 그럼 결혼식은 당연한 수순일 텐데. 어째서 그러시는 건가요? 정말 어디 안 좋으신 건 아니죠? 아니면 주인님께 실망하셨다든가…….”

“모두 아니에요. 그냥, 모든 게 끝난다면…… 영지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서요.”

델시아가 지친 기색으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조금 비틀거려 발레인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실의에 젖어 조금 힘들어하는 사람.

딱 그 정도로만 보이면 됐다. 그 이상으로 힘들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것 역시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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