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주인님, 별채에 손님을 들였는데…….”
에드윈은 점심부터 저를 졸졸 쫓아다니며 횡설수설하는 테오를 짜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딘가 불안한 듯 테오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떨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처리할 일이 많아 바쁜 에드윈에게는 더없이 성가시고 거슬리는 행동이었다.
“손님?”
“그게…….”
“아니, 아니다. 나중에 듣도록 하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라 테오 너와 어울려 주고 싶지도 않고.”
델시아의 이름을 꺼내려던 테오는 단칼에 저지당한 채 멍한 눈을 해야만 했다. 오늘의 에드윈은 평소보다 더 까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윈은 안토 백작의 연이은 연락에 약속을 잡고 찾아갔으나 그곳에서 우스운 꼴만 보고 왔다.
대낮부터 이상한 곳에 데려가려고 하지를 않나, 자꾸만 희귀한 물건을 들이밀지를 않나. 아무튼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에드윈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숨을 천천히 골랐다. 책상 위에는 상당한 양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전장에 있을 때 처리하지 못한 일감들이었다. 며칠간 열심히 처리한 것 같은데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처리가 급한 서류 뭉치를 뒤적인 에드윈이 한 장을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내 집무실에는 펜촉이 사각사각 미끄러지는 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린 채 높이 쌓인 서류들을 처리해 나가던 에드윈의 손이 돌연 멈췄다.
“테오, 이것 하나만 묻도록 하지.”
“네, 주인님.”
“내 별채에 왜 허락도 없이 손님을 들였지?”
“기억을 잃으시기 전에 허락하셨던 일입니다만…….”
“아,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미심쩍은 얼굴로 되묻는 에드윈의 눈치를 보며 대답한 테오는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델시아의 이름을 삼켰다. 제 주인과 함께 단장한 별채에 홀로 있을 델시아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델시아는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테오는 델시아를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분명 에드윈이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에 밤잠은 물론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볼이 움푹 패고 가늘던 손목은 더 가늘어졌다. 게다가 말을 잇는 것마저 버거워하지 않던가. 테오는 건강하던 델시아의 모습이 변했음에 약간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에드윈의 귓가에 그녀의 이름을 조금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속삭였다면 결과가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양심의 가책.
에드윈의 화를 받아 내기 싫어 애써 외면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차분히 숨을 고른 테오가 모르는 척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요, 주인님. 이제 페르도 백작님은 안 찾으시는 건가요?”
“……페르도 백작은 왜.”
“근래 들어 안 찾으시는 것 같기에…….”
“원래도 친한 편은 아니었잖아.”
“……네?”
테오가 당황한 눈으로 반문하자 에드윈이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피곤하니 나가 봐.”
“아직 처리하실 게 많은데, 벌써 피곤해하시면 안 됩니다.”
“네가 옆에서 조잘대니까 하기 힘들군.”
“핑계도 많으십니다.”
투덜거린 테오는 델시아의 이름을 속살대려던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에드윈은 서류를 처리해나가며 불쾌한 얼굴을 했다.
“페르도 백작의 얼굴만 떠올려도 기분이 나빠진단 말이지.”
작게 중얼거린 에드윈이 제 뒤에 놓인 성검, 파시오를 쳐다봤다. 이런 때면 파시오가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말이다. 전쟁에 나갔을 때만 해도 파시오가 시끄러워 견딜 수 없었던 것만 같은데. 근래 들어 조용했다.
불러도 대답도 없었고.
“나한테 삐진 건가.”
삐질 이유가 있던가.
고개를 갸웃거린 에드윈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서류를 마저 처리했다.
***
다음 날이었다.
에드윈은 가 볼 곳이 있다며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고, 테오만이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할 뿐이었다. 오늘 아침에 봤던 델시아의 얼굴이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테오가 가진 죄책감의 무게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집무실을 돌아다니던 테오가 결심한 듯 서류 뭉텅이를 들고 별채로 향했다.
마주치는 사용인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어 왔지만, 테오는 바쁘다는 핑계로 못 들은 체하며 걸음만 옮겼다.
델시아가 있을 별채에 들어선 테오는, 별채 안에 딸린 작은 집무실에 들어가 서류를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조금 있으면 에드윈이 돌아올 것인데, 그때 해야 할 업무가 별채에 있다며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에드윈과 델시아가 우연을 가장하여 만난다면, 조금은 상황이 나아지지 않겠는가. 테오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살금살금 별채를 나선 테오가 본관의 집무실에 있는 서류를 전부 치웠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작은 쪽지를 남겼다. 혹여 못 알아볼까 힘주어 글씨를 쓴 테오가 휘파람을 불며 집무실을 나섰다. 에드윈이 업무에 사용할 펜도 테오가 챙겼다.
별채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정말 업무만 보다가 시간을 다 보내면 안 되니까. 여분의 펜을 찾으려 별채를 살피다 델시아가 있는 방의 문을 열어야 무언가 진전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펜을 주머니에 넣자 양심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에드윈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테오는 잠시 일이 있다며 도서관으로 쏙 내뺀 후였다.
제 집무실에 들어선 에드윈은 집무실에 있어야 할 서류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테오가 남긴 쪽지를 발견했다. 빠르게 읽어 내린 에드윈이 얼굴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 전환하실 겸 이번 업무는 별채의 집무실에서 처리하시죠! -테오]
“빌어먹을.”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여 애먼 걸음을 하게 만들다니. 분신처럼 여기는 성검을 챙긴 에드윈이 빠른 걸음으로 별채에 들어섰다.
한숨을 내쉬며 별채의 집무실로 들어온 에드윈이 책상 앞에 앉았다. 서류 한 뭉텅이가 에드윈을 기다리고 있었다.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던 에드윈은 집무실에 펜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본관까지 걸음하기에는 귀찮았다.
별채를 뒤진다면 펜 하나 정도는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에드윈은 피로한 숨을 뱉으며 별채의 방을 하나씩 열어 펜을 찾기 시작했다.
주인도 없이 비워진 방이 많았다. 과거의 자신은 무슨 이유로 별채를 꾸미는 데에 큰돈을 썼던 것일까.
문을 하나하나 열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인 거야.”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인지, 쓸데없는 일을 벌인 테오를 향한 것인지 모를 말이 혼잣말처럼 나왔다. 에드윈이 이를 으득 갈며 마지막 문을 활짝 열려고 할 때였다.
“헉, 헉. 주인님!”
“무슨 일이지?”
“켈리안 후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떠한 연락도 없이?”
“예. 돌려보낼까요?”
시종이 땀을 닦아 내며 묻자 에드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급한 일이 있나 보지. 알현실로 안내해라. 금방 갈 테니.”
“예, 알겠습니다.”
시종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본 에드윈이 문고리를 잡던 손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집무실의 서류를 챙겨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한 피로감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도 피곤하고 지치는 것인가. 에드윈은 이 모든 게 빌어먹을 테오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본관에 들어섰다.
그리고 집무실에 서류를 도로 가져다 놓고 켈리안 후작이 기다릴 알현실로 향했다.
“오, 아델리오 공작님.”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켈리안 후작.”
“하하, 전장에서 성검으로 적군을 베어 내셨다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델리오 공작가의 저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건만, 설마 이 정도로 성검을 자유자재로 다루실 줄이야!”
불쑥 방문한 것에 관한 사과는 없었다. 켈리안 후작의 몰상식함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던 에드윈이 숨을 삼키며 빈정거림을 참았다.
“그렇습니까.”
“이럴 게 아니라 성검의 귀한 모습을 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성검이…….”
습관적으로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던 에드윈이 돌연 얼굴을 굳혔다. 성검을 별채 집무실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수상한 손님을 두고 자리를 비우고 싶지는 않았다.
기대감에 젖은 켈리안 후작의 얼굴에 에드윈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성검을 두고 왔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다음에 볼 기회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에드윈은 멋대로 다음을 기약하며 넉살 좋게 말하는 켈리안 후작의 모습에 불쾌함을 느꼈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디까지 무례를 범할지 지켜보려는 심산이었다.
에드윈은 자리에 앉아 켈리안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현재 진행 중인 사업과 투자 그리고 지분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 마력석이 대량으로 매장된 광산이 발견됐다더군요.”
“그렇습니까.”
“마침 매물이 나온다는데, 상태가 무척 좋다고 합니다.”
“음.”
켈리안 후작은 남부 지역에서 발견됐다는 새로운 광산을 두고 열변을 토했다. 지리적 이점과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번지르르한 말이 에드윈의 귓가를 간질였다.
자꾸 에둘러 말하는 태도가 에드윈에게 피로함을 가중했다. 무료한 얼굴로 고개만 주억이던 에드윈이 결국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켈리안 후작을 쳐다봤다.
“그래서 본론이 무엇입니까.”
“저, 공작님께 투자하실 의향이 있는지 여쭈고 싶습니다.”
“투자?”
“예, 그렇습니다. 남부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 중 하나인 아타즈 백작의 영지에 있는 광산이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죠?”
어렴풋이 그 이름을 들었던 것도 같아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켈리안 후작이 눈을 반짝였다.
“아타즈 백작은 그런 커다란 광산을 관리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며 제게 권한을 맡기고 싶다더군요.”
“그렇습니까.”
“예, 매입을 먼저 권할 수 있는 작은 권한 정도지만요.”
“꽤 큰 권한처럼 보입니다만.”
“하하, 그렇게 큰 권한은 아닙니다. 그저 약간의 친분이 있어서 맡게 되었을 뿐. 아, 그래서 말인데…… 공작님께서 이 광산을 한번 매입해 보시겠습니까?”
“매입이라…….”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광산 매입은 처음이시리라 생각하고 왔습니다. 혹 모르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제가 상세히 설명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본론을 꺼낸 켈리안 후작의 얼굴에 미소가 잔잔히 번졌다. 눈동자에 덧칠된 탐욕이 어울리지 않게 두른 겸손과 상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