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델시아를 아델리오 공작저로 보내기 하루 전. 사용인들은 짐을 싸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바쁜 것은 엘라였다. 필요한 옷들만 골라서 챙겨 가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계절에 맞춰, 필요에 맞춰 옷을 고르고 고른 엘라가 이마에 스민 땀을 닦아 내며 델시아의 곁에 섰다. 침대에 앉아 사용인들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던 델시아가 웃었다.
“고마워, 엘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드디어 내일이라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렇죠, 아가씨?”
“그러게.”
델시아가 짧게 대답했다. 내일 가족들의 품을 떠나 공작저로 간다는 게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그토록 꿈꿔 왔음에도 말이다.
“내려가시겠어요?”
“응. 도와줄래?”
“그럼요.”
델시아가 책상 위에 올려진 벨벳 주머니를 품 안에 넣고는 엘라의 도움을 받아 아래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델시아가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 앞에 선 델시아가 천천히 두드렸다.
“아버지.”
“오, 델시. 들어오렴.”
델시아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아놀드였다. 아놀드가 문을 활짝 열고 델시아를 내려다봤다.
“좋은 오후야, 델시아.”
“응. 좋은…… 오후야, 오빠.”
“들어와. 저기 앉아 있다가 가.”
아놀드가 푹신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델시아가 엘라의 손을 놓고 아놀드에게 팔짱을 끼었다. 엘라는 가족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집무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델시아만을 위해 준비된 소파는 참으로 푹신했다. 그곳에 앉은 델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신 감탄할 정도로 말이다.
“델시아 너를 위해 아버지가 주문하셨어. 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델시아 네가 집무실에 자주 놀러 왔으면 하시는 마음은 마찬가지셨을 테니까.”
“아놀드.”
델시아에게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늘어놓는 아놀드의 이름을 부른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망설이던 아놀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매듭지었다.
“아무튼. 너를 위해 들여놓으신 거야.”
“고마워요, 아버지.”
“별거 없단다, 델시.”
페르도 백작이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델시아는 페르도 백작이 내려놓은 최고급 깃펜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니?”
“그냥, 아버지랑 오빠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요.”
“오, 델시…….”
페르도 백작이 활짝 웃으며 델시아를 바라봤다. 델시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그의 기분이 달라졌다. 델시아가 웃으면 페르도 백작도 웃고 델시아가 울면 페르도 백작도 울먹였다.
그런 존재였다. 페르도 백작에게 델시아는, 부모에게 자식은 그런 존재였다. 페르도 백작은 저를 보며 눈매를 휘어 웃는 델시아가 어여뻐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저 어여쁜 아이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꼭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델시아, 공작저에 가면 심심하지 않겠어?”
“수도 놓고 책도 읽으면…… 시간이 금방 갈 거야.”
그렇게 대답한 델시아가 품 안에 넣어 뒀던 벨벳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은 델시아가 그 안에 든 커프스단추와 깃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그게 뭐야?”
아놀드의 물음에 델시아가 살짝 웃었다.
“선물.”
“무슨 선물?”
“아버지랑 오빠에게 주는…… 선물.”
그 말에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인지. 페르도 백작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저 ‘선물’이라는 단어일 뿐인데, 가슴이 참 아팠다. 델시아에게 선물을 처음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일까.
페르도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오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찬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 이렇게 준비했니.”
목소리가 약간 떨리긴 했지만, 다행히 델시아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페르도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델시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아놀드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보던 서류도 내팽개치고 델시아의 앞으로 성큼 다가간 아놀드가 테이블 위를 응시했다.
세공된 블루 사파이어가 박힌 한 쌍의 커프스단추와 구하기 어렵다는 피닉스의 깃털로 만들어진 깃펜 두 자루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특히 블루 사파이어 커프스단추를 보는 페르도 백작과 아놀드의 눈에 눈물이 들어찼다. 자신들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의 단추를 선물한 델시아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피닉스 깃털 깃펜 또한 델시아의 마음이 잘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피닉스의 깃털은 행운과 안녕 그리고 원하는 것을 가져다준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깃펜과 단추를 조심스럽게 만지는 페르도 백작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지금 이 순간 페르도 백작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델시아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는 것. 피닉스의 깃털이 들어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
“그날 커피 하우스에서 말입니다.”
“…….”
“듣고 계십니까? 그 커피 하우스에서요.”
“듣고 있으니까 말해.”
에드윈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대충 말하고 말라는 손짓에도 테오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귀족 영애로 보이던 분이 계셨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혹은 아시는 분이거나요.”
“귀족 영애?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테오 네 관심이 그렇게나 지대하다면 그 영애가 누구인지 알아봐 줄 수는 있지.”
“예, 예?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테오가 눈을 크게 뜨며 펄쩍 뛰었다. 그 반응에 에드윈이 소리 내어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으나 부산스럽게 구는 테오가 있으니 집중이 될 리 없었다.
후원에서 산책이라도 할 생각으로 집무실을 나서는데 테오가 뒤를 졸졸 쫓아오며 자꾸만 말을 붙였다.
“아무튼! 주인님께서 그분을 모르신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왜 자꾸 나를 닦달하지.”
“예? 닦달이라뇨. 당치도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꾸 나를 닦달하지 말고 네가 직접 가서 이야기하지 그래?”
에드윈이 후원을 향해 걸으며 말하자 테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마음을 훔친 영애는 내가 알아봐 줄 테니, 직접 가서 이야기해.”
“……예?”
“영애에게 관심이 있으니, 저와 교제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가.”
에드윈이 픽, 웃고는 후원에 발을 디뎠다. 빠른 걸음으로 에드윈을 쫓던 테오가 황당하다는 듯 헛숨을 들이켜며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페르도 백작 영애의 이야기를 많이 꺼내기는 했으나, 제 주인이 그녀를 기억하기를 바라서 꺼낸 것이었는데.
어쩌다 제 주인이 자신을 오해했는가. 테오는 뺨을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라도 친 얼굴을 하고 있네.”
그때 에드윈의 호위 기사 발레인이 테오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놀렸다. 고개를 돌려 발레인을 쳐다본 테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퉁거렸다.
“사고는 무슨. 나는 유능한 집사라고. 황실까지도 나를 원했다는 거, 잊었나 보지?”
“글쎄. 잊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황실에서 뭐가 부족하다고 너를 원하겠어?”
발레인의 말에 테오가 다시 펄펄 뛰었지만, 에드윈이 걸음을 멈춰 서는 것으로 상황은 진정됐다.
“후원 가득 심을 정도로 내가 장미를 좋아했던가.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인데.”
에드윈은 후원 가득 핀 장미를 응시하며 고민에 빠졌다. 보라색 장미가 후원에 만발했다는 게 솔직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꽃을 정해서 심는 것은 보통 공작 부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집사가 하는 일인데……. 에드윈이 테오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테오, 네 짓이겠군.”
“……예? 또 뭐 가요?”
“네가 심도록 지시한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많은 장미꽃이 후원에 있겠느냐고.”
“어, 제가 그런 거 아닌데요.”
테오가 눈동자를 굴리며 부정하자 에드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내가 지시했다는 말인가.”
“……네. 정말로 주인님께서 지시하셨는걸요?”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일이야.”
“그거야 당연하죠.”
테오가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기억이 온전치 않으시니까요.”
그 말에 다시 걸음을 옮기던 에드윈의 다리가 멈췄다. 찬찬히 돌아선 에드윈이 테오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했지?”
“주인님께서는 기억이 온전치 않으시다고요.”
“내 기억이 온전치 않다고?”
에드윈은 테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테오는 장난기 많은 집사였으니까 말이다. 테오가 장난이라며 덧붙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에드윈은 테오를 피해서 나온 산책도 포기하고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은 에드윈은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내려 둔 채 테오에게 물었다.
“내가 어떤 기억을 잃었다는 거지. 그리고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그건…….”
테오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페르도 백작이 보내 온 서신에서 델시아와 관련된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해 달라고 했었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델시아가 심장을 바쳐 에드윈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지만. 그녀를 기억도 못 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해 봤자 오해만 받을 뿐이라는 말과 자칫하다가는 은혜라도 갚는답시고 사랑 없는 결혼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잠시 고민하던 테오가 최대한 의심받지 않도록 이야기를 지어냈다.
“서부 변경에서 흑마법에 당한 주인님께서는 사경을 헤매시다 깨어나셨어요.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물론 그 이전에 있었던 일도 일부 기억하지 못하셨고요. 그리고 이제야 말씀드린 건 그럴 만한 사정이…….”
“그러면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그야…… 기억력이 뛰어나신 주인님께서 무언가를 잊은 듯 구실 때가 많았으니까요.”
테오의 말이 끝나자 에드윈의 눈동자가 깊이 침전했다.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니. 아니, 자신이 흑마법에 당했다니.
“……하.”
그러던 에드윈의 머릿속에 일순 꿈에서 겪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페르도 백작 영식을 구했고, 의식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누군가를 부탁한다고 말하던 기억이 말이다.
대체 그 대상이 누구인가. 에드윈이 눈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기억날 듯 기억나지 않는 그 누군가를 떠올리기 위해 에드윈은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그것만큼 무력감과 불쾌감이 드는 일도 없었다. 에드윈은 주먹을 꽉 쥐며 작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