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델시아가 밭은 호흡을 내뱉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까지 향하는 동안 다리가 수십 번도 더 후들거리고 눈물방울이 수십 개는 더 떨어졌다. 어렵게 침대에 당도한 델시아가 털썩 앉았다. 델시아는 뺨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침대에 옆구리를 대고 천천히 누웠다.
그렇게 지독한 새벽이 찾아왔다. 델시아가 끙끙거리며 뒤척이던 가운데 환한 해가 하늘에 걸린 아침이 찾아왔다. 눈을 뜬 델시아는 창가를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어저께보다는 움직이는 게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러나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은 채로 잠들었던 터라 전신이 조금 뻣뻣한 감은 있었다.
“아가씨.”
앤이 문을 두드리며 델시아를 불렀다. 델시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부드럽게 열린 문 틈새로 목소리를 낸 앤 대신 엘라의 얼굴이 쑥 나왔다.
“……엘라?”
“아가씨…….”
분명 엘라는 일주일간의 휴가가 끝나지 않았을 터인데 어째서 저택에 있는 것일까. 설마 언제나 제 곁에 있던 엘라가 며칠 보이지 않자 그리워서 헛것을 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델시아는 곧 제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라가 제 앞에 꿇어앉은 채 따스한 손으로 제 손등을 덮었으니 말이다. 엘라는 앤에게 소식이라도 전해 들었는지 휴가를 보내다 온 사람치고 핼쑥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델시아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입꼬리는 부르르 떨리기만 할 뿐 올라가지 않았다.
“아가씨, 처음부터 이러실 작정이었던 거죠? 그래서 저더러 휴가를 가라고 하신 거죠?”
“엘라.”
“저는, 저는…….”
엘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델시아가 고개를 돌려 엘라를 외면했다. 꼭 제 아버지와 오빠처럼 제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듯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속없는 칭찬에는 익숙해도 이런 걱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델시아가 주먹을 꼭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 아가씨!”
엘라가 놀란 얼굴로 저를 부르짖는 모습에 델시아의 눈이 질끈 감겼다. 꼴사나웠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엘라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사용인들에게도, 에드윈에게도. 모든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던 나약하고 우스운 모습을 기어이 보이고야 말았다.
“……엘라.”
찬찬히 눈을 뜬 델시아의 입술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네, 아가씨. 말씀하세요. 어떤 것이든 괜찮으니까 말씀해주세요.”
“……나 좀 일으켜줄래?”
“그럼요, 아가씨.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고마워, 엘라. 네게는 항상……, 고마워.”
엘라는 저를 향해 내민 델시아의 손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선 델시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침대의 기둥과 엘라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고작 하루 이틀 누워있었다고. 고작 심장 하나 바뀌었다고. 고작 에드윈이……, 에드윈이 자신을 잊었다고. 사람이 이리 쉽게 무너지는 존재였던가. 아니, 자신이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던가.
엘라의 도움을 받아 침실 밖으로 나온 델시아의 몸이 돌연 누군가에 의해 들렸다.
“……아.”
“델시아.”
아놀드였다. 그녀를 품에 안아 든 아놀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 내려줘.”
“미안해.”
델시아의 요구에 작게 사과한 아놀드가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착석해 있는 페르도 백작이 보였다.
“좋은 아침이구나, 델시.”
“……아버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가족들의 모습이 델시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델시아는 아놀드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앉고는 제 가족들을 쳐다봤다.
“배고프겠구나. 어서 먹자.”
“천천히 먹어, 델시아.”
“……네.”
다정한 말들이 하나둘 델시아에게 건네졌다. 떨리는 손으로 스푼을 든 델시아가 묽은 수프를 떠서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입 안에 들어오는 수프의 양은 턱없이 적었다.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떠서 가지고 오는 와중에 수프를 질질 흘리는 탓이었다.
수프를 한 번 떠먹은 델시아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력감이었다. 부러 스푼을 세게 쥔 델시아가 수프를 한 번 더 떠먹었다. 오기였다. 그렇게 두어 번 더 떠먹던 델시아의 손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탁, 스푼을 내려놨다.
델시아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입맛이 없는 게냐.”
“……네.”
남아있는 알량한 자존심이 델시아의 고개를 끄덕이도록 만들었다. 페르도 백작은 수심에 찬 눈으로 델시아를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제 딸아이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모른 체하는 게 아비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슴이 썩어 문드러질 듯 고통스러워도 내색하지 않고, 아무 일 없었던 양 구는 편이 딸아이에게도 나을 게 분명했다.
그래.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
“하, 하아…….”
델시아가 심장을 움켜쥔 채 엘라의 부축을 받아 걸었다. 다행히도 수도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델시아와 엘라는 한 커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델시아는 손에 들린 서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에드윈의 일정을 묻는 델시아에게 테오가 보낸 서신으로, 오늘 이 시간에 에드윈과 커피 하우스에 어떻게든 방문할 계획이라고 했다. 서신을 집어넣은 델시아가 에드윈과 테오가 들어올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신 거죠?”
“으, 으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무리하시면 안 돼요. 조금이라도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네?”
엘라의 걱정에 델시아가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그러기를 수십 분. 일찍이 테이블에 놓인 차는 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엘라는 제 주인이 찻잔은 물론 자신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문만을 응시하고 있음에 걱정했다.
그때, 커피 하우스의 문이 열리며 에드윈과 테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이 커피 하우스에 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지?”
“하하, 그게…… 제가 차 마시는 걸 좋아하잖아요. 이 시간쯤이면 따뜻하고 향긋한 차가 생각나더라고요.”
말을 이으며 델시아가 있는 쪽을 확인한 테오가 눈짓했다. 테오의 눈짓에 엘라가 일어나서 그쪽으로 향하려 하였으나, 델시아의 만류에 가만히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페르도 백작 몰래 외출하면서까지 에드윈을 보고 싶었던 게 분명한 델시아가, 그를 눈앞에 두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니.
“아가씨…….”
“괜찮아, 엘라. 정말 괜찮아.”
“하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델시아가 그렇게 말하며 흐릿하게 웃었다. 사실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여 다리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저를 기억하지 못한 채 제 정체를 궁금해하던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럴 수 없었다.
제가 모습을 드러내도 에드윈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드러낼 수 없다. 델시아는 테오가 계속해서 눈짓하여도 조용히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테오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돌린 에드윈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델시아의 동공이 떨렸다. 에드윈도 저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듯했다.
“에드윈…….”
델시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고 말았다.
“볼일이 더 없다면 이만 가지.”
“……네.”
하지만 에드윈은 돌아섰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테오가 말꼬리를 늘여 대답하고는 뒤따랐다.
델시아는 멍한 얼굴로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바들거리는 손을 뻗어 찻잔을 집었다. 힘겹게 찻잔을 들어 올린 델시아가 그대로 입가에 가져갔다.
“……차가 식었네.”
“네. 시간이 꽤 지났어요.”
델시아가 커피 하우스에서 자리를 잡은 지도 어언 한 시간이 다 되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델시아가 일어나려 몸을 움직이자 엘라가 서둘러 도왔다. 그렇게 델시아는 엘라의 도움을 받아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달아왔다.
“델시, 성치 않은 몸으로 어디를 갔다 오는 게냐. 응?”
“……잠깐 바람 좀 쐬러요.”
“오, 델시.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잖니.”
“죄송해요.”
페르도 백작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자 델시아가 사과하고는 침실로 올라갔다.
“엘라, 고마웠어. 나…… 나가 봐도 좋아.”
“괜찮으시겠어요? 저녁은…….”
“괜……찮아. 저녁도 괜찮고.”
“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부르세요. 아셨죠?”
엘라는 방을 나서는 마지막까지 델시아에게 당부했다. 엘라가 나가고 혼자가 된 델시아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가를 바라봤다. 노을이 지고 있는 백작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윈.”
델시이가 속삭이듯 에드윈의 이름을 말했다. 델시아에게는 분명 에드윈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적어도 두 번은. 그러나 델시아는 그 두 번의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용기가 부족한 탓이었다.
그래도 커피 하우스에서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었다. 에드윈이 듣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버렸지만. 델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에드윈…… 보고 싶어요.”
기대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자꾸만 희망을 품게 되는 게, 희망을 품었기 때문에 자꾸만 실망하는 게 너무나 바보 같았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도, 실망을 않을 수도 없었다. 델시아는 에드윈을 사랑하기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모든 빛을 앗아갈 어둠이 찾아온다.
침대에 몸을 뉜 델시아가 눈을 꾹 감았다. 차라리 저 어둠이 제 실낱같은 희망까지 앗아갔으면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조금은 덜 힘들 것 같아서.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바랐다.